예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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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김진호
  • 승인 2017.11.12 19: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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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메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아 거리여 외로운 거리여
거절당한 손길들의 아 캄캄한 저 곤욕의 거리
어디에 있을까 천국은 어디에
죽음 저편 푸른 숲에 아 거기에 있을까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금관의 예수, 김민기 작곡

1973년도에 만든 이곡은 <금관의 예수>라는 김지하의 희곡에 맞춰서 김민기가 만든 노래입니다. 당시 유신독재 정권 아래서 이 연극은 전국 성당들을 돌면서 공연되었고, 대학생이었던 저는 80년대 초에 성공회 성당에서 감명 깊게 봤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이미지가 많이 훼손되었지만, 1970년대에 김지하는 대단했었죠. 당시 저항담론은 ‘민중론’이었는데, 여기서 나온 게 ‘민중신학’이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금관의 예수>는 대충 이런 이야기입니다. 성당 마당에 아주 멋진 예수 동상이 있어요. 어느 추운 성탄절 밤에 거지 몇 명이 동상 앞에 앉아서 신세 한탄을 합니다. 그러자 거지 한명의 머리 위로 물방울 하나가 떨어집니다. 바로 금관을 쓴 예수님이 떨어뜨린 눈물이었죠.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힘만으로는 안 된다. 너희들이 나를 해방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네가 내 머리에서 금관을 벗겨내는 순간 내 입이 열렸다. 네가 나를 해방시켰다. 내겐 금이 필요 없고 네겐 금이 필요하다. 금은 네가 가져가 네 벗들과 함께 나누어라.”

당당하고 늠름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금관을 쓰고 있는 예수님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 하지만 금관을 벗겨 내는 순간 말을 하고 활동할 수 있게 된 거예요. 그리고 거지들은 예수의 금관을 벗겨냄으로써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한 순간의 기회를 얻었던 것이죠. 그럼 여기서 ‘누가 구원자인가?’ 물음이 던져집니다. 예수님은 금관이 벗겨짐으로써 구원을 얻고, 거지들은 예수의 금관을 가져감으로써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안병무 선생이 말하는 ‘민중 메시아’론입니다. 이는 현존하는 그리스도교 신학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신학적 명제입니다. 예수님은 혼자 구원사건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대중과 함께 사건을 일으킨다는 것이죠. 이렇게 “안병무와 민중신학의 그리스도론”이 등장했습니다.

‘교회의 예수’를 넘어서 ‘역사의 예수’로

김진호 연구실장. 사진출처=강의 동영상 캡처

예수님을 알려면 먼저 복음서를 봐야 하겠죠. 4개의 복음서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중요한 텍스트는 ‘마르코 복음서’입니다. 다른 복음서는 ‘사이드 텍스트’로 읽어도 좋습니다.

학자들이 예수 이야기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경이었는데, 교회에서는 ‘역사비평적 성서연구’를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서학자 가운데 교회에서 파문당하는 일들도 많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초기의 예수 학자들은 ‘투사’나 마찬가지였어요.

1세기 말경 교회가 등장한 뒤로 18세기까지 예수를 기억하는 유일한 장소는 교회였고,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내내 권력의 중심에 서있던 교회가 예수 이야기를 독점해 오면서, 예수는 늘 권력자의 시선으로 읽혀 왔어요. 하지만 <금관의 예수>에서 보듯이 정작 예수는 권력 있는 자들의 시선 ‘밖’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제대로 읽어내려면 교회를 넘어서서 읽어야 합니다.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역사학인데, 역사를 더듬고 더듬어서 교회가 생기기 이전의 예수를 읽어보니 “예전에 알던 예수는 다르더라.”하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교회의 예수’를 넘어서 ‘역사의 예수’(historical Jesus)를 보게 된 거죠.

역사학자들은 교회가 왜곡시키지 않은 진짜 예수와, 그 예수를 전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진짜 예수는 어떤 분이셨는지 우리는 모른다.”는 것이었지요. 역사학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마르코와 마태오와 루카와 요한이 예수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역사란 무엇인가>를 쓴 에드워드 카(E.H. Carr)처럼 “역사는 과거사실의 재현이 아닌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말에 주목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서를 읽는 지금여기 서 있는 ‘나’라는 것입니다.

복음서와 같은 역사적 텍스트는 이제 우리의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해 참고하는 ‘이야깃거리’(소재)가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삶에서 부딪치는 나의 문제의식과 예수 이야기를 대비시켜 읽는 행위입니다. 혼자 읽는 것보다는 여럿이 읽으면 더 이야기가 풍부해지고, 현실감을 갖습니다. 예수 이야기는 그렇게 우리들을 통해서 지금도 계속되는 끝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by Alexander Antonyuk

가파르나움 네트워크, 갈릴래아의 예수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로 추적해보면 예수님은 26년에서 36년 사이에 돌아가셨어요. 언제 태어나셨는지는 모르지만 오래 사시진 않았던 것 같아요. 사실 그가 서른 살이나 서른세 살에 에 죽었다는 것은 추측에 지나지 않아요. 예루살렘 성지에 가면 예수님 못 박힌 곳, 쓰러지신 곳, 이야기했던 곳 등이 있는데 전부 꾸며낸 거죠. 때로 종교적인 이유로, 때로 상업적인 이유로 성지가 필요했던 거죠. 이런 성지들은 그냥 예수님을 생각하는 ‘도구’ 정도로 여기시면 좋아요.

이스라엘에서 ‘나자렛 예수’하면, ‘나자렛’ 출신이란 뜻이고, 대개는 ‘아버지 누구의 아들’로 불렸어요. 그런데 에수님은 주로 엄마인 마리아의 아들처럼 알려졌어요. 이건 대단히 비참한 경우입니다. 복음서에는 요셉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어요. 이스라엘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은 고아, 과부, 떠돌이들이었는데, 고아는 아버지가 없는 사람, 과부는 남편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 당시 사회는 그랬어요. 남성들이 재산을 모두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성 혼자 남겨진 것은 현실적으로 ‘죽음’을 의미했죠.

마태오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기원전 4년, 헤로데가 죽을 때 태어나셨죠. 헤로데는 기원전 37년부터 4년까지 팔레스티나를 통치한 군주였거든요. 헤로데는 공식적인 부인이 10명이 넘었는데, 죽을 때에 남긴 유서가 3개나 되었어요. 그래서 유권해석을 둘러싸고 아들끼리 싸울 때, 로마의 황제가 세 명의 아들들에게 분할통치를 시킵니다. 그 세 아들들은 아르켈라오, 안티파스, 필립이었죠. 갈릴래아와 베레아는 안티파스에게 상속되고, 유대아와 사마리아, 이두매 지방은 아르켈라오스에게, 그리고 갈릴래아 호수 동쪽 바산지역은 필립의 땅이 됩니다.

예수님이 주로 활동하셨던 곳은 가파르나움입니다. 이 촌락은 갈릴래아 호수에 가까운 국경지대입니다. 그곳에서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 등 예수님의 측근들이 만들어지면서, 학자들은 예수운동을 ‘가파르나움 네트워크’라고 부르는 이도 있어요. 예수님은 본래 베레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세례자 요한과 깊은 관계가 있는데, 요한의 제자들이 나중에 예수운동에 합류한 것 같아요. 한편 세례자 요한의 세례운동은 반(反)성전주의에서 비롯된 것인데, 예수님도 이를 계승하지요.

 

by Alexander Antonyuk

세례 요한, 구원의 문턱을 낮추다

이스라엘에서 죄를 용서받으려면 제사를 바쳐야 했죠. 속죄제물을 바치는 제사인데, 소나 양이나 염소가 주로 사용되었고, 가난하면 비둘기를 바칠 수 있었어요. 당시는 예루살렘 성전만이 ‘정통성전’으로 인정받고 있던 시기였어요. 이 성전은 헤로데가 방대하게 세운 건축물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유지비용이 엄청났는데, 그걸 세금으로 충당하지 않고 기부금으로 했어요. 기부금이 발전해서 십일조가 된 거죠. 일단 촌락에서 십일조를 걷으면 일부는 마을에서 쓰고, 일부는 예루살렘 복지비용으로 전환되었어요. 예루살렘에선 그걸 받아서 제사에도 쓰고 자선활동에도 쓰곤 했지요. 그래서 거지들도 예루살렘에 오면 생계에 도움을 받기도 했어요.

명절은 보통 15일정도 지내는데, 갈릴래아 같은 촌락에서 오려면 왕복 20일 정도 소요됩니다. 그렇지만 유월절 등 대부분 명절이 농번기여서 농민들은 순례를 떠나기 힘들었을 거예요. 대신에 마을의 대리인이나 대표자가 성전으로 떠날 때 양식을 주면서 대신 제물도 부탁합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예루살렘에 도착했어도 가져온 물품을 그냥 사용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성전 당국자들은 제수용품 판매를 독점업체에게 위탁을 했어요. 당국에 선약금을 낸 그 독점 대행업체가 촌락에서 가져온 물품과 성전제사용 제물을 교환해주는 식이었는데, 교환의 비율이 일대일 비율이 아니었던 거지요. 독점업체는 엄청난 마진을 남기고 성전 제사용 소, 양, 심지어 비둘기 등을 바꿔줬던 것입니다.

복음서 마지막 부분에 예수님이 갑자기 성전에서 난동을 부리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내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마라!”는 거죠. 실상 그 당시 성전에 제물을 바치는 행위로 죄 사함을 받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도리어 돈이 없어 죄 사함을 ‘못 받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마치 구원의 방주에 올라타려면 성당에서 세례 받아야 하는데 세례만 달랑 받지 못하고 그전에 일정 정도 교육도 받아야하고 봉헌금도 내야하는 것처럼 말이죠. 일요일에도 일을 해야 하는 열악한 노동자들은 구원의 방주에 올라탈 방법이 없는 거죠. 결국 죄 사함을 위한 제사제도가 죄인을 만들어내는 제도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이 “내게로 와서 세례를 받아라, 세례를 받는 순간 너희는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 것이죠. 요한은 ‘구원의 문턱’을 낮추고 싶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성전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일종의 반역도로 인식된 것이죠. 요한으로 인해 성전의 권위와 기득권이 침해당한 셈이죠. 그런데 문제는 세례자 요한이 활동한 지역이 베레아 지역이라 말씀드렸는데, 안티파스의 땅이었던 거죠. 성전은 아르켈라오스 땅이었는데, 국경 밖이라 그들은 요한을 잡을 수 없던 것이죠.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안티파스의 부정한 결혼에 대항했고, 이 때문에 결국 죽임을 당합니다.

 

by Alexander Antonyuk

회당 체제, 정결법과 안식일법에 대항하는 예수

세례자 요한이 안티파스가 보낸 군인들에게 붙잡혀 가자, 예수님은 어디로 갔을까요? 갈릴래아의 북쪽 국경지역인 가파르나움으로 가게 됩니다. 최근에 가파르나움을 발굴해보니, 촌락이 독채 형식이 아니라 다세대 주택 구조였다고 합니다. 즉 그곳은 어촌이어서 협업이 필요했고, 그래서 주민들이 공동체 생활을 해야 했겠죠. 그래서 이 안에 숨어들면 잡기가 어려웠을 거예요. 예수님이 이 안에 들어가신 것은 나름 용의주도한 선택이었던 겁니다.

예수님은 공생활 초창기에 마을 회당에서 활동했어요. 그러던 중 갈릴래아를 통치하던 안티파스에게 첩보가 들어옵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였는데, 죽은 요한이 되살아났다고도 하고 새로운 예언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있었던 거죠. 조선 말기 철종 시대를 배경으로 한 <군도>라는 영화처럼, 민란이 많이 일어날 때는 죽은 ‘홍경래’가 여기저기서 나타났다는 소문이 돕니다. 멕시코에선 ‘산초 빌라’의 부활설도 있었죠. 그렇게 전 세계적으로 민란이 있던 곳에는 어김없이 ‘의인의 부활설’이 있었어요.

요한이 죽었는데도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당국은 당연히 그를 잡으려고 했겠죠. 하지만 예수 시대는 행정망이 치밀하지 못해 중앙집권적 관리가 안 되었죠. 문제는 자치적으로 운영되던 ‘회당’에서 발생했습니다. 회당을 중심으로 예수님과 지역 유지들 간에 안식일 싸움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떤 허름한 사람이 나타나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해 준 것이지요. 게다가 그 사람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기존 제도를 성찰하라는 이야기죠. 잘못된 법을 고치라는 것이죠.

하지만 회당 체제는 안식일을 버릴 수가 없었어요.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게 멸망하고 국토의 75%가 파괴되었고, 인구의 50%가 유출되면서 마을 공동체가 파괴되었습니다. 그래서 외부인들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씨족 공동체가 무너지고, 부재지주들이 마을에 심어놓은 청지기들이 회당을 중심을 권력을 장악해 갔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가르치던 소자산가적인 엘리트들이 생겨나면서 ‘안식일법’은 대단히 중요해집니다. 이들은 정결함과 부정을 세세히 다루면서, 문제가 있는 장애인들과 세리, 창녀와 병자들을 ‘죄인으로’ 취급하고 회당 체제 바깥으로 내몰았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타인을 ‘배제하는 시스템’을 본 것입니다.

 

by Alexander Antonyuk

회당 바깥, 배제된 민중 속에서 활동하는 예수

예수님은 그들의 핵심을 건드리게 됩니다. 안식일 날 기적을 행하는 것은 일종의 그들을 향한 ‘시위’였던 것입니다. 이런 안식일 갈등 이후에 예수님은 결국 회당 안에서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서 예수의 청중들은 회당과 회당 주변 사람들에서 회당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으로 옮겨 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뒤로 갈수록 마을 언저리나 호숫가에서 주로 활동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주로 만난 사람들은 이른바 ‘바닥 백성’이었던 것입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은 예수님이 사회적으로 배제되었던 사람들과 얼마나 깊이 연루되었는지 알게 합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안전한 일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그분은 가끔 배 위에서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기도 하죠. 그러면 유사시에 쉽게 도망갈 수 있으니까요. 집이나 공터에서 이야기를 할 때, 복음서에선 명확히 집주인이 누군지 밝히지 않아요. 예수님이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 없었음을 의미하죠.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난동을 부리고 나서, 나중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려오다 연행당할 때에도 체포조는 예수님의 얼굴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유다의 키스’처럼 누군가 알려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by Alexander Antonyuk

예루살렘, 낮에는 과감하게, 밤에는 은밀하게

그런 분이 느닷없이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전까지 예수님은 도시에서 활동한 적이 없습니다. 주로 촌락에서 활동하다 생의 마지막 국면에 가장 큰 도시인 예루살렘으로 가죠. 도시는 공권력이 집중되어있어서 활동이 노출될 위험이 항상 있었지만 예수님은 이 위험을 무릅쓰고 ‘적의 심장’으로 들어간 셈입니다. 이스라엘의 최대명절인 유월절이었어요. 예루살렘 입성할 때 예수님은 어린나귀를 타고 입성합니다. 명색이 메시아인데 적토마도 못타고, ‘거지행색’을 한 남자가 입성하는 거죠. 제자들이 옷을 벗어서 바닥에 깔면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라고 환호합니다. ‘호산나’는 우리말로 ‘만세’란 뜻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성전 입성은 코믹할 정도로 초라한 행차라서, 성전경비대의 시선조차 끌지 못했어요. 이사야 예언서에는 사울도 다윗도 새끼 나귀를 타고 온다는 메시아 전승이 있었어요. 그리고 북이스라엘의 장군 예후가 엘리사 예언자에게 왕이 되리란 소식을 들었을 때 부하 장수들이 예후 앞에 옷을 벗어 깔아 줍니다. 이런 걸 ‘아포칼립스(apocalypsis)’라고 하는데, ‘묵시’ 곧 베일을 깐다는 뜻입니다. 옷을 벗어 가는 행위는 곧 새로운 왕에 대한 묵시적 신호였던 셈이죠.

예수님은 사나흘에 걸쳐 성전에 입성하고, 성전을 뒤집어엎고, 적대자들과 논쟁하고, 결국 넷째날 밤에 체포됩니다. 그분이 체포되기 전까지 행보를 보면, 낮에는 군중들 속에서 무언가를 하고 밤에는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당시 성전에서 낮에는 메시아를 자처하는 이들이 여기저기서 튀어 나와 반체제적 정치선전을 하곤 했어요. 예수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거지요. 이 때문에 명절에는 팔레스티나의 모든 군대가 예루살렘에 모입니다. 경복궁을 내려다 보았던 광화문의 총독부 건물처럼, 안토니아 요새는 성전이 한눈에 보이는 위치에 있었어요. 로마 전군이 항상 대기하고 있는 거죠. 자잘한 소요가 계속되는 동안에, 유난히 예수님의 활동이 돋보였던 모양입니다. 누가 예수인지 얼굴은 알 수 없지만, 며칠 사이에 소문이 무성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밀한 활동은 마지막 만찬을 위해 방을 구할 때도 나타납니다. “우물가에 여자들이 물을 길고 있을 텐데 그러면 쫓아가라.”는 것이죠. 낯선 사내들이 쫓아오면 무서워 도망가거나 소리 지르는 게 정상인데, 이 여인들은 미리 연통한 것처럼 방을 안내하죠. 예루살렘 입성 하실 때도 “주께서 쓰시겠답니다.”라는 암호를 주고받으며 새기 나귀를 구하죠. 이것도 뭔가 서로 내통하고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마지막 만찬을 행하는 자리는 일종의 ‘피의 만찬’이었고, 비장한 분위기였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by Alexander Antonyuk

빈 무덤과 갈릴래아 부활설

예루살렘 원로회의에서 예수 문제가 거론이 됩니다. 명절의 하이라이트가 다가오는데, 이 회의에서는 예수님이 하는 일은 내버려둬라, 건드리면 더 큰 소요가 일어날 수 있다는 합의된 사항이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만찬을 하고 있는 와중에, 예수 제자 중 한명이 이탈해서 대사제의 집에 제보를 합니다. 그러자 대사제가 다시 호의를 소집하지 않은 채 독단적으로 에수님을 체포하라고 자신의 사병들을 보냅니다. 왜 그랬을까요. 매우 긴박했던 것이죠. 결국 예수님은 은거지에서 체포되어 대사제의 집 뜰에서 심문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예수님은 유대총독인 빌라도 집무실에서 공식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고 살해당합니다. 그렇게 예수 이야기가 끝납니다.

예루살렘 인근지역에서는 백 개 이상의 돌무덤이 발견되었어요. <나라야마 부시코>라는 일본 영화처럼, 이스라엘도 시신을 유기하는 장소가 있었어요. 사람들은 가지 않고 동물들이 뜯어먹으러 가죠. 맨발의 가난한 사람들만 어슬렁거리던 곳이죠. ‘게라사의 광인’이 있던 곳도 시신을 유기하는 지역에 있었죠. 아마 그이는 그 시대 최하층 사람이었겠죠. 사람이 오면 소리를 지르고 자해를 하는 것도 두려움의 표시였던 거죠.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으나 그도 사람을 두려워했던 거죠. 그런 지역이 무덤인데, 예루살렘의 무덤은 자연동굴 속에 뚜껑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 유골함을 두는 곳입니다.

유골함의 글씨는 대부분 그리스어였어요.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시는 날, 예루살렘에서 가장 먼저 죽은 사람들이 일어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유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인근에 무덤을 잡아 두곤 했어요. 아마 그런 상류층 가운데 한 사람이 예루살렘 원로원 의원이었던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되는 날 빌라도를 찾아가 담판을 짓죠. 내가 예수의 시신을 안장하게 해달라는 것인데, 목숨을 거는 행동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요. 십자가 처형을 당한 사람의 시신은 유기시켜서 시신도 모욕을 당하게 만드는 형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안장되고 나서 사흘 뒤에 안식일 끝나자, 여성제자들 셋이 무덤가에 갔더니 무덤이 비어 있었죠. 하얀 옷을 입은 청년이 “그분은 여기 안 계시고 당신들보다 먼저 ‘갈릴래아’에 계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 안 계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당신도 그곳으로 가라는 거죠. ‘갈릴래아 부활설’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부활한 몸을 본 적이 없어요. 대신 빈 무덤을 봤던 것입니다. 이 말은 다들 갈릴래아로 돌아갔다는 것이죠. 갈릴래아로 간 공동체 사람들이 예수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 ‘마르코 복음’입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부활합니다. 부활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한참 계시다가 승천합니다. 즉 ‘예루살렘 부활설’입니다. 복음서에서 초기의 부활 이야기는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다는 데서 끝납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도 빈 무덤 이야기를 하는 16장이 원래는 마지막 부분입니다. 나머지는 나중에 덧붙여진 것이라서 문체도 달라요. 제자들이 예수님의 상처 부분을 만졌다든지, 예수가 명령해서 그물을 던지니 물고기가 많이 잡혔다든지 하는 것은 후대에 등장한 예수 이야기입니다. 후기로 갈수록 예수 이야기를 ‘몸’으로 입증하려는 이야기들이 많죠. 초기 예수부할 이야기의 핵심은 “그분이 무덤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다른 곳에 살아있다는 이야깁니다.

복음서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 예언자처럼 낙타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다고 전합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국가권력의 수배령 때문에 항상 도망다녀야 했던 재야운동가였습니다. 엘리야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어느날 다시 내려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세례자 요한을 ‘부활한 엘리야’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역시, 그분이 죽은 뒤에도 예수님 추종자들이 계속 예수 운동을 하면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전합니다. 결국 예수부활 이야기는 “예수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부활 사건을 물리적으로 화학적으로 죽은 예수가 되살아났다는 식으로 의학적으로 입증하려는 노력은 무의미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운동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이야기는 지금도 우리에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믄 문제는 예수운동을 계승하고 있다고 믿는 그리스도교가 정말 ‘예수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제 멋대로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 이야기’라고 우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물어야 할 질문은 “과연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 이야기를 계속 쓰고 있는지” 묻는 것이죠.

[출처] <가톨릭일꾼> 신문 9호
       가톨릭일꾼강습회 발제 녹취문 (2017.9.16.)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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