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가들은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방랑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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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가들은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방랑하지 않는다
  • 죠안 치티스터
  • 승인 2017.11.13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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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에만 원장이 죠셉 원장에게 말했다: “내가 어떻게 수도자가 될 수 있는지 말해 주시오.” 그러자 죠셉 원장이 대답했다, “이곳에서 안식을 찾고자 한다면, 지금부터 모든 때에 ‘나는 누구인가?’라고 말하시오.”

무엇인가를 찾지 않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 쏜가? 인정받음, 돈, 집, 직업, 성공, 안정, 행복? 우리는 본성적으로 영적인 약탈자들이며 성배를 쫓고있는 탐구자들이다. 우리는 최상의 시기나 영원의 황홀경에서 포착되는 월계관과 승리의 컵을 한결같이 바란다. 우리 모두는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 중요한 질문들은 두 가지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찾고 있는가, 그리고 그러한 탐구의 결과로 나는 어떤 존재가 되는가? 이다.

어떤 사람들은 벽의 그림자를 추구하며 환멸로 끝이 난다. 다른 이들은 돌에 새겨질 성취를 추구하나 그들에게 주어지는 기념비들이 무너지고 만족하지 못할 때 불만으로 끝나고 만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미친 사람처럼 이리저리 헤매고 이것을 해보고 저것을 버리며 사냥의 마지막 광포가 그들의 마음을 소진시키고 영혼을 시들게 할 때까지 끊임없이 요구하고 거부한다. 그들은 삶을 상대로 장난하는 사람들이며 천박하고 위장한 것들을 감정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탐색의 결과로 그들은 자신들이 열심한 방랑자 이외의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종교 그리고 영성은 특유의 애호가들을, 이 스승에서 저 스승에로, 한 체제에서 또 다른 체제로, 신심 깊은 위로에서 또다른 위로로, 영적인 체하는 태도에서 영적인 도피로 왔다갔다하면서 추구하는 사람들, 그러나 그러한 여정의 끝은 고사하더라도 과정 자체를 참으로 감사할 수 없는 사람들을 갖고 있다. 그들은 추구하지만 그러한 추구를 넘어 지속되는 마음의 고향을 결코 절대로 찾을 수가 없다. 종교 그리고 영성이 최면제가 된다는 뜻은 현재의 고통을 완화시키거나 공허함을 채우는 역할만 하지 탐구의 충동 밑으로 우리를 이끌어서 원천을 찾도록 해주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찾지 못하는 핑계로서 종교를 이용하는 것이다.

참으로, 추구하는 권력을 얻기 위하여, 갈구하는 관심과 필요로 하는 안락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종교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우리들 대부분은 한 번이나 그 이상 그들 중에 끼어본적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 속의 관상가들이 아니다.

관상가들은 삶을 통찰에 대한 장애물로 여기지 않으며 영혼의 맛의 봉오리가 다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이맛 저맛을 보는 사람들이 아니다. 관상가들은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방랑하지 않으며, 그들 안에서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하여 바깥에서 찾아 헤매며 이 스승 저 스승 사이를 왔다갔다 하지 않는다.

관상가들은 자아의 길에서 그들을 만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는 하느님을 찾으려고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 전혀 없다. 관상가는 그저 있는 자리에서 기다리며 그 기다림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나는 내 안에서 하느님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다”라는 대답을 하며 있기만 하면 된다. 나는, 다른 말로 하자면, 삶의(생명의) 중심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나는 모든 체제 그 너머에 있는 원천으로 가는 사람이다. 나는 나의 어두운 영혼으로부터 멀리 있으며 나의 쉬지 못하는 정신에게는 낯설고 나의 산만한 마음에는 너무나 이질적인 빛을 추구하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하느님과 나 사이의 거리가 바로 나임을 알고 있는 존재이다.

관상적 삶을 살기 위하여 요구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으며, 왜 추구하는가를 바라보는 것이다. 심지어 선한 일도 우리가 그것을 할 때에는 소음이 되어 버리는데, 그것은 그 일이 옳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일이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어떤 위치를 가져오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를 기분 좋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에게 안정감을 주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생명을 (삶을) 조금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런 모든 것들보다 더 우리를 사로잡으며 더 채워주시는 존재이다. 우리가 찾고 있는 성작은 오로지 하느님뿐이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하느님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모든 단순한 성인들과 모든 실패한 성직자들은 그 점을 알고 있다. 관상가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적절한 자리에서 찾아야한다: 우리의 중심자아라는 지성소에서.

[원출처] <Illuminated Life, Monastic Wisdom for Seeker of Light>, Joan Chittister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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