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가난한 사람을 위한 가난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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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가난한 사람을 위한 가난한 사람
  • 월리암 J. 쇼트
  • 승인 2017.11.13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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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즐거움-14
I love the liveliness and freedom his poverty leaves him with. St Francis Photos by jotasil

첼라노의 토마스는 프란치스코가 어떻게 ‘나병 환자들에게 가서 그들과 함께 살았는지,’ ‘그들의 모든 요구에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어떻게 응답했는지’를 회상한다. 프란치스코는 그들을 씻기고,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마지막 시기에도 프란치스코는 처음의 열정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나병 환자들에게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후, 토마스의 강조점은 기적에 기울기 시작했다. 그는 나병 환자 병원에서 신체적으로 일하는 것을 강조하는 대신, 프란치스코가 앗씨시 아래 평원에서 만난 한 나병 환자의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나병 환자에게 프란치스코가 입맞춤 했다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프란치스코는 나병 환자에게 키스한 후, 돈을 조금 주고 나서 말에 올라탄다. 주위를 돌아보니 나병 환자는 흔적도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는 첼라노의 토마스가 두 번째로 프란치스코의 이야기를 모은 책에 있다. 미루어 볼 때 1240년경 작은 형제들의 기본활동이 더 이상 한센씨 병 환자들을 돌보는 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기적 같은 이야기를 더 강조하고 초기 프란치스코 운동의 특색인 나병 환자들과 매일 실제로 만나고 사는 것은 더 이상 중심이 아니었다.

나병환자 돌보기에 대한 변화된 태도들 

1260년경, 보나벤추라가 프란치스코 이야기를 저술했을 때, 나병 환자 돌보기는 더욱 더 그 중요성이 축소되었다. 보나벤추라는 프란치스코와 나병 환자의 만남을 덕을 연마하는 것과 연결한다. 완전함에 대한 갈망을 채우고 ‘그리스도의 군인’(2티모 2,3)이 되기 위하여 프란치스코는 맨 처음 ‘자신을 정복해야’했다고 표현한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나병 환자에게 돈을 준 후 키스했고, 그런 뒤 아무곳에서도 그를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초기 프란치스코 운동의 ‘좋았던 옛날’에 대한 추억들은 <페르지아의 전설> 안에 들어 있다. 이 교재는 또한 앗씨시 편람이라고도 하는데, 보나벤추라가 창립자의 ‘공식적인’ 삶이라고 저술한 것의 대안을 제시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그리고 이 자료를 보면 일상 속에서 나병 환자들의 역할은 형제들 사이에 영성과 관상기도를 실제로 경험하게 하는 매우 중대한 것이었다.

프란치스코는 나병 환자 요양소 가까이 있는 성당을 관상적 삶의 자리로 여겼고 나병 환자들도 편안해 하였다. 그곳에서 제임스 형제는 ‘때때로 여러 명의 나병 환자들을 성 마리아 성당으로 데려 왔다’(‘그 당시엔 형제들이 나병 환자 요양소에서 살았으므로’). 이 ‘형제 그리스도인들’(프란치스코는 나병 환자들을 이렇게 불렀다)은 프란치스코식의 암자에서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의 삶에 참여했다. 형제들은 ‘그곳에서 계속 밤낮으로 기도하고 침묵을 지킴으로써 거룩함을 유지하였다.’ 프란치스코회의 관상의 전통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도시 시내의 외곽에서, 사회의 주변머리에서, ‘형제’와 ‘자매 그리스도인들’인 무시받고 두려움에 찬 소수의 사람들 속에서 시작되었다.

지아노의 죠르단은 1260년대에 그가 쓴 연대기에서 초기 형제애에 관하여 나병 환자들이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자주 언급한다. 나병 환자들의 집은 형제들이 모임을 하고 묵어가는 곳이었다. 죠르단은 심지어 프란치스코의 추종자들이 나병 환자들이었다고까지 주장한다.

죠르단 같은 원로 형제들은 그들이 초기에 이룩했던 형제애를 되돌아보면서, 프란치스코회 전통의 기원에 관한 많은 초기 경험의 배경이 나병 환자들과 함께 이룬 공동체들이었다고 기억한다. 형제들이 모이고, 기도하는 자리, 살던 곳은 그들의 ‘형제 그리스도인들’인 나병 환자들이 함께 있었던 자리였다. 그러나 죠르단의 경우에도 이것 역시 일종의 향수 같은 것으로, 40년 전을 되돌아보며 떠오르는 회상이었다. 형제들이 더 커진 도시 경당의 새로운 직무를 위해 나병 환자 요양소에서 살고 일하는 것을 바꿈에 따라, 초기의 경험은 점차 경탄할 만한 영적인 영웅주의의 모형이 되었을 뿐, 반드시 모방해야 하는 필연성은 사라져 갔다.

그러나 나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 대한 보살핌이 잊혀진 것은 아니다. 13세기가 끝나갈 무렵,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따르는 참회의 형제 자매회는 병자들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보며, 병든 이들에 대한 섬김을 프란치스코 영성의 근본적인 표현 요소로 만들었다.

 

그림출처=eugene-burnand.com

나병과 해방신학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의 맥락에서, 레오나르도 보프는 나병 환자들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연민’의 중요성을 회복하는 길을 지적한다. 그의 책, <성 프란치스코: 인간해방의 모범>은 부제로 ‘가난한 이들로부터 시작하는 읽기’를 선택하고 있으며, 오늘날 지구의 피폐라는 맥락 속에서 프란치스코의 이야기를 읽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보프에게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거나 그들을 ‘위해서’만 산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으로서’ 살았다. 나병 환자들 속에서, 그리고 당시 ‘길가에 버려진’ 이들과 함께 살았다. 프란치스코의 연민이라는 위대한 선물, 버려진 이들의 고통을 나누는 역량은 부드러움과 힘을 요구한다. 이 부드러움과 힘 모두는 하느님의 수난속에서 그리스도안에서 프란치스코가 발견한 것이다.

프란치스코회의 자료들을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점으로 진지하게 읽는다면, 프란치스코회 영성의 근원에 심오한 영향을 주었던 ‘사라져 버린’ 질병의 본래 중심적인 자리를 회복하는데 도움이 된다. 오늘날 그 기억을 회복한다는 것은 기억의 의미를 한센씨병 그 이상으로 확장시키는 것이다.

비록 많은 나라에서 나병이 아직도 심각한 질병이지만 그래도 이제는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이다. 우리시대에 HIV 와 AIDS 는 건강을 해치고 전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가져왔다. 13세기의 한센씨 병처럼, 20세기에 이 병들은 사람들에게 공포와 단죄의 자세들을 일으켰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HIV 와 AIDS 로 고통 받는 우리 형제자매들 가운데에서 프란치스코가 항상 하느님 현존의 반박할 수 없는 징표라고 생각한 ‘달콤함’을 발견한다.

월리암 J. 쇼트

[원출처] <가난과 즐거움-프란치스코회의 전통>, 월리암 J. 쇼트(프란치스코회)
[출처] <참사람되어> 200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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