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자씨처럼 “너나 잘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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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자씨처럼 “너나 잘 하세요.”
  • 윤영석
  • 승인 2017.11.07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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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석 칼럼] 

“너나 잘 하세요.”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 나오는 대사다. 감옥에서 만난 전도사가 두부를 들고 출소하는 금자씨를 반기며 이렇게 말한다. “두부처럼 하얗게 살라고 다시는 죄 짓지 말란 뜻으로 먹는 겁니다.” 금자씨는 두부가 놓인 접시를 전도사의 손에서 살짝 밀쳐내고 두부는 땅에 떨어진다. 그리고 무표정으로 말한다. “너나 잘 하세요.”

“너나 잘 하세요.” 재밌는 표현이긴 하지만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는 꽤나 잔인한 말이다. 담배 피는 고등학생 아이에게 금연을 요구하는 아버지, 아버지 입장에선 아이를 위한다고 말하지만, “아버지도 안 끊으면서 저더러 끊으라는 겁니까?”라는 답변이 돌아온다면 뒷목 잡을 일이다. 아무리 공손하게 표현해도 결국 “너나 잘 하라”는 뜻이다.  금자씨가 두부를 떨어트리며 말한 “너나 잘 하세요.” 이 말은 언행일치의 중요성을 드러낸다. 내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이란 그리스도인에게 신앙과 행동이 함께 하는 삶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예수 앞에서, 우리는 금자씨처럼 답할 수 없다

마태오 복음서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하고 제일 지키기 어려운 가르침을 이야기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며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공동번역 마태 5,37-39)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목적과 성소는 이 복음서 가르침에 다 들어있다. 그런데 이 가르침을 만약 굉장히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내 가족 누군가에게 하면 아마 금자씨처럼 “너나 잘 하세요.”라고 하지 않을까 싶다.

구약 레위기 19,18에서도 같은 가르침이 나온다. 영어 성서에는 레위기 구절이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라고 복음서의 가르침과 똑같이 번역이 되어 있다. 반면, 공동번역 성서는 좀 다르게 번역한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아껴라.” 어떤 게 바람직한 번역인지 논하기 전에 “아끼다”는 표현이 더 살갑게 들린다. 이 번역으로 복음서의 가르침을 표현하자면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하느님을 아껴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아껴라.”로 할 수 있는데 좀 더 구체적이고 친근하게 들린다. 사랑하면 아끼게 되니 틀린 번역은 아니다.

레위기와 복음서가 보여주는 공통점은 하느님과 이웃 사랑에 대한 가르침 이외에 한 가지 더 있다. 레위기 19장에서 이웃을 아끼라는 가르침이 주어진 뒤에 반복되는 하느님의 선포가 있다. “나는 야훼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19장도 비슷한 패턴을 취한다. 사랑하라는 가르침 뒤에, 예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해 물으신다. 이들은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답하는데, 예수께서 그리스도는 "주님, 하느님"이시라고 가르치신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본인의 정체성, 즉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민중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정체성을 정정하신다. 즉,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나는 하느님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이 패턴, 사랑하라, 아끼라는 가르침 뒤에 “나는 하느님이다.”라고 이어지는 패턴 앞에서 “너나 잘 하세요.”라는 반격은 무용지물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면 우리가 “예수님, 당신이나 잘 하세요.”라고 할 수 없지 않나? 하느님께서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당신 자신처럼 인간을 사랑하심은 예수의 삶과 죽음, 부활에서 드러난다. 예수께서 사랑하라 말씀하셨고 온몸으로 사랑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신 가르침, 하느님을 이웃을 온맘 다해 아끼라는 이 가르침 앞에 우리는 금자씨처럼 답할 수 없다. 그저 침묵할 수 밖에 없다.

나를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을 우리에게 시키신 걸까? 그건 아니다. 인간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 끝도 완성도 없다. 그 깊이를 더해가는 길 밖에 없다. 더 깊게 넓게 사랑하는 법을 일생을 통해 배워가는 게 아닐까? 사실 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을 둘로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한명 더 있다. 바로 나 자신이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고 내 몸처럼 나 자신처럼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가장 첫 걸음은 내가 나를 사랑하는데 있다. 나를 온전히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

우리는 얼마나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까? 혹은 얼마나 자기 자신을 질책하고 채찍질하나?  나는 병원에서 일주일에 세번씩 정신질환을 겪는 환자들과 더불어 영성그룹을 이끌고 있다. 보통 시작하기 전에 모임의 목적과 규칙 등을 설명한다. 특히나 규칙은 상당히 중요해서 초반에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그 그룹은 어수선해지기 쉽상이다.

규칙이란 게 별게 없다. 누군가 이야기할 때 경청하고 가치 판단을 하지 말 것 등등. 여기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규칙이 있다. 바로 이 그룹에서는 누구도 절대 공격하지 않는다는 규칙이다. 이 말을 하면 마치 이 그룹에서 종교 논쟁이나 자신의 신념에 어긋나는 이야기를 하는 의구심을 가진 듯 환자들이 내심 불안해 하는 기색을 보인다. 환자들이 좀 의아해 하는 찰나에 한마디 덧붙인다. “절대로 자기 자신을 공격하지 마세요.”

내가 나를 공격하지 마라

공격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흔히 나 아닌 다른 사람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공격하고 사는지 곰곰히 생각해 볼 일이다. 내가 아닌 타인을 바라볼 때 알 수 있다. 나를 상대방과 비교시켜서 나를 폄하시키는 일, 다들 해보지 않았나? 아무개가 나보다 더 잘 낫다, 이쁘다, 잘 생겼다, 잘 번다, 잘 나간다, 좋은 차를 탄다, 좋은 구두, 가방을 든다, 더 좋은 동네, 더 좋은 학벌과 학력을 가졌다 등등.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흙수저와 금수저, 갑과 을, 이 표현들은 사회적으로 우리 사회가 인간의 가치를 물질로 측정하는지 보여줄 뿐만아니라 우리 자신을 질책하라고 세뇌시킨다.

반면, 우리 내면 안에서 일어나는 다른 공격의 양태도 있다. 나를 상대방과 비교해 끊임없이 비하시키는 게 아니라 내가 더 잘났다고 하는 모습이다. 요즘 백인 우월주의라는 말이 작년 2016년 11월,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당선된 뒤로 너무나 빈번히 미디어에 오르내리고 있다. 우월주의란 뭔가? 간단히 말하자면,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고 믿을 뿐 아니라 내가 남보다 더 우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우월주의이다. 내 피부색이 하얗기 때문에, 내가 돈을 더 벌기 때문에, 내가 남자라서, 내가 이성애자라서, 내가 젊어서 등등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나는 아무개보다 우월하다. 세상은 이런 이유들을 정당화 시키려 하고 장려한다.

이 두 가지의 모습, 우리 안에 있다. 내 안에 존재하는 이 두 가지 모습을 우리가 직접 대면하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결코 올바르게 하느님의 뜻대로 사랑할 수 없다.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바로 우리 주위 이웃을 통해서 두 가지 모습을 지닌 나를 볼 수 있다.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내가 확인된다. 묵상을 통해서도 가능한데, 이 행위 또한 절대타자인 하느님과의 관계를 통해 내가 확인된다. 타인이라는 거울에 나를 비춰, 나 자신을 비하시키거나 우월하다고 우쭐거리는 나를 바라본다.

 

사진출처=pixabay.com

내 안에 있는 쓰레기 같은 우월감

내가 사는 동네 거리에선 중남미 출신 청년들이 즐비하다. 이들 모두 그날 하루 일당을 벌기 위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어느날 출근 길에 거리에 서 있는 중남미 출신으로 보이는 청년이 보였다. 문득 내가 저 청년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어떻게 발견했는지 모르겠지만 성령께서 내 마음의 눈을 열으셨다고 믿는다. 나보다 체구도 작고, 교육 또한 내가 더 많이 받았을테고, 직장도 내가 더 안정적일 게 분명했다. 이렇게 내가 더 우월할 만한 사항들을 떠올리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고작 이런 것들, 이따위 것들로 내가 저 청년보다 낫다고 하다니…참 못났다.”란 생각 말이다. 주님 앞에 부끄러웠다. 하지만 또 감사했다. 우연히 본 중남미 청년이 내 안에 존재하는 쓰레기를 볼 수 있게 내 눈을 뜨게 해준 듯 했다.

이 경험은 나 자신을 비하하고 공격하는 내 또다른 부분을 정화시켰다. 나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움츠려 드는 내 모습을 보면서 이 또한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정신이 들었다. 고작 그런 것들로 나 자신을 비하하다니..란 생각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이 아무개보다 더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나를 높이려고 한 건 아니다. 그저 하느님 앞에 잘난 것, 못난 것 없이 다 사랑받는 존재인데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해온 것에 대한 회개의 마음이 들었다.

내가 존경하는 한 성직자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안으로 깊이 들어간 영적 여정만큼만 이웃을 섬길 수 있다.” 우리 안으로 깊이 들어간 영적 여정은 우리가 얼마나 깊이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아끼며 사랑하는가란 질문과 무관하지 않다 .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겐샤이, 우리 같이 잘 해봐요.

케빈 홀은 자신의 저서 <겐샤이>에서 “누군가를 대할 때 그가 스스로를 작고 하찮은 존재로 느끼도록 대해선 안 된다”라는 뜻을 지닌 고대 힌디어 “겐샤이”를 소개한다. 이 단어에서 누군가는 타자 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포함한다.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소명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타인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작고 하찮은 존재로 느끼도록 놔둬서는 안된다.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은 타인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누군가보다 더 중요하고 우월한 존재로 느껴서도 안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발판 위에 올곧이 서서, 그저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피조물을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셨다는 진리를 붙잡을 뿐이다. 하느님께서 나자렛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당신 자신 먼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우리를 아끼고 사랑하셨다.

매 주일 미사에서 성체를 모실 때, 우리는 다시금 주님의 사랑을 확인한다. 자신의 몸과 피를 내어 사랑하신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 오실 때, 우리의 몸과 피를 내어 우리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우리에게 있다. 이제 끊임없이 불안과 공포, 혐오를 내뿜는 세상 앞에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외치자. 그리고 누군가 “너나 잘 하세요.”라고 빈정거리거나 좀 바보처럼 보이더라도 넉넉한 맘으로 “우리 같이 잘 해봐요.”라고 답할 수 있을까?
 

윤영석(바울로) 신부
미국성공회 뉴왁교구 소속 & NewYork-Presbyterian Hospital 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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