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유쾌하고 달콤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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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유쾌하고 달콤하시다
  • 월리암 J. 쇼트
  • 승인 2017.11.06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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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즐거움-13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께 ‘달콤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당신은 우리의 모든 달콤함입니다’; 하느님은 ‘유쾌하시고 달콤하시다.’ 프란치스코는 이 달콤함을, 하느님 현존의 맛을 처음 느낀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내가 죄안에 있을 때에는, 나환자들을 보는 것이 매우 역겨웠다.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로 나를 이끄셨고 나는 그들에게 자비를 보였다. 그리고 그들을 떠났을 때 이전에 느꼈던 역겨움이 내 영혼과 육신의 달콤함으로 바뀌었다.

 

San Francisco lava a un leproso. J.Segrelles.

나환자, 세상에서 이미 죽은 자들

앗씨시의 이전 시장이었던 아르나르도 포르티니라는 사람은 프란치스코가 살았던 시기에 나병에 걸린 사람들의 생활을 알아보기 위하여 시청 기록물 보관소에서 기막힌 자료들을 수집하였다. 이 문서들에 의하면, 두 명의 공무원들과 한 사제가 함께 정기적으로 집들을 점검하면서 나병의 징후를 확인한다. 그리고 피부에 흰색 얼룩이 생기면 병에 걸렸다는 증거가 되었다. 그 순간에 그 사람의 삶은 끝장이 난다. 그는 가족과 집, 재산과 안전을 떠나야 했고 앗씨시 마을 외곽에 멀리 떨어져 있는 나병 격리요양소에 ‘갇혀야’했다.

병에 걸린 남녀들은 어떤 아이든지 사회적 위치에 상관없이, 수용소가 있는 계곡의 ‘임종자리’로 마치도 장례행렬처럼 줄지어 걸어가야 했다. 사제는 요양소의 경당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장례미사를 거행하고 인접해 있는 묘지의 흙을 그들에게 뿌려댄다. 사제는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자비로우실 것이고 교회가 그들을 위해 기도할 것이라고 전한다. 마을 사람들이 자선을 베풀 것이라고 하면서 그들을 ‘세상에서 죽은 이들’로 선언하였다. (나환자들의 재산은 마을이 압류해서 병원운영비로 썼다).

나환자들은 잿빛 색깔의 구분되는 옷을 입어야 했고 성 금요일에 종 대신 쓰는 나무 딱딱이로 소리를 내어 그들이 지나갈 때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야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밥그릇에 들어있지 않은 음식은 절대로 만질 수 없었다. 그들은 개울물에서, 샘이나 우물에서 물을 길을 수 없었다. 이처럼 감염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 커서, 통행금지 신호소리가 난 뒤 성 안에서 나병 환자가 발견되면, 그 자리에서 죽여도 아무런 벌을 받지 않았다.

나환자들 사이에서 하느님을 경험한 프란치스코

‘그들을 떠났을 때, 이전에는 역겨웠던 것이 영혼과 육신의 달콤함으로 변했다’: 프란치스코는 죽어가는 자리에서 20년 전의 사건을 회상하고 있다. 그는 하느님의 현존을 ‘달콤함’이라고 표현한다. 특히 나환자들 사이에 계시고 그들을 위하여 일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그렇게 묘사하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왜 그렇게 말하는가? 프란치스코는 나환자들 사이에서 하느님의 특징을 경험하였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은 모든 ‘재산’을 다 포기한다. 거룩한 위치까지 포기하고 자선과 다른 이들의 도움에 의존한다. 가난한 이들 가운데에서 탄생하고 그분의 삶과 여정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졌으나 아무런 인정을 못 받았고, 벗겨지고 가장 가까운 친구들과 친지들한테서도 버림받은 채, 고통과 죽음을 맞았다. 나병 환자들은 ‘형제 그리스도인들’이었고 특별한 사람들이며, 겸손하고 가난한 연인이신 하느님의 ‘의미를 담고 있는’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프란치스코의 다음 말을 이해할 수 있다:

"형제들은 별로 가치가 없고 멸시 당하는 사람들, 가난하고 힘이 없는 사람들, 병들고 나병에 걸린 사람들, 그리고 길가에 걸인들 가운데 살 때에 기뻐해야 한다.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사람이었고 나그네였으며 자선에 의지해 살으셨다. 그분과 복된 동정녀 그리고 그분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공동체 안에 있다는 것이고, 길가의 사람들 중에 특히 나병에 걸린 사람들은 프란치스코에게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나환자들을 섬기는 것이 형제들의 첫 번째 일이고 나환자들의 집은 수도자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었다. 여행할 때에 프란치스코는 나환자들을 방문하곤 했다: ‘나귀를 타고 가고 있을 때 나환자 마을을 지나면서 그는 그곳의 어느 나환자 집에서 쉬고 싶어 했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한센씨 병을 지닌 사람들을 보살피면서 프란치스코는 복음에서 알았던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고 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돌아온 후, 다른 이들을 회심, 속죄, 삶의 변화로 초대한다. 하느님께 돌아서는 행위의 결과, 영향을 보여주기 위하여 예수님은 특별한 행동을 한다: 신체질병과 마음의 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치유한다(마태 4,23-24). 또한 후에 마태오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때 어떤 나병 환자가 다가왔고(마태 8,1-3)’ 예수님은 그를 고쳐 주셨다.

나병 환자들의 특별한 역할은 프란치스코가 회칙에서 예외를 두는 부분에서도 잘 나타난다. 돈을 받는 것을 매우 엄격하게 금지했던 프란치스코이지만 한 그룹의 사람들만은 특별한 예외를 부여한다: 형제들은 ‘나병 환자들의 긴급한 필요를 위해서는 돈을 받을 수 있다.’그는 ‘예수님의 동반자들’ 명단에 병든 이들, 구걸하는 사람들, 나병 환자들을 넣고 이들과 더불어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동정녀 마리아, 그리고 자선으로 살아가는 제자들을 포함시킨다. 형제들은 그들과 함께 있음을 ‘기뻐해야’한다.

프란치스코는 직접 쓴 저술들에서 산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가에서 들려온 ‘교회를 다시 지어라’는 목소리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는 그의 몸에 나타난 징표들(오상)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 오상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고통에 그가 심오한 연민을 느꼈다고 연결시킨다. 오히려 프란치스코는 복음적 삶에 대한 자신의 회심에 있어 나병 환자들과의 만남을 그 배경으로 이야기한다. 나병 환자들과 실제로 함께 있는 실천적인 체험, 그리고 그들을 섬기는 체험에 대해 말한다. 여기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지체 중에 고통 받는 구성원들을 발견했고, 이 경험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한 것이다.

이미 앗씨시의 나병 요양소에서는 참회자들이 나환자들에게 섬김을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프란치스코는 질병에 감염되는 위험을 (그 당시에 만연된 두려움이었다.) 무릅쓰는 남녀 참회자들에게 ‘자선을 베풀었을’ 것이다. 이처럼 ‘나환자들 가운데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는 죽은 이들로 여겨지는’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그리하여 프란치스코가 생애 말기에 여러 가지 병으로 고생한 것은 아마도 한센씨 병으로부터 온 결핵 감염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기에 혹은 죽은지 얼마 후에, 나병에 감염된 형제들을 위한 요양소가 앗씨시 외곽에 세워졌다.

월리암 J. 쇼트

[원출처] <가난과 즐거움-프란치스코회의 전통>, 월리암 J. 쇼트(프란치스코회)
[출처] <참사람되어> 200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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