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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 영혼의 화가렘브란트의 ‘볼품없는’ 그리스도-1

“아무리 많은 자랑거리가 있다 해도 인생은 하느님 손 안에 있는 작은 공깃돌에 불과하다.”

<탕자의 귀환>으로 유명한 렘브란트의 말이다. 영성작가 헨리 나웬은 이 그림에 영감을 받아 “우리 인생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이라고 했다. 그 아버지는 자비롭고 자비롭고 자비롭기 때문이다. 2016년 프란치스코 교종이 ‘자비의 희년’을 선포했을 때도 이 그림이 가장 먼저 주목받았다. 네덜란드 한인교회에서 일했던 안재경 목사가 지은 <렘브란트의 하느님>(홍성사, 2014)이란 책을 읽었다. 네덜란드는 루벤스와 반 고흐와 렘브란트, 그리고 종교개혁가 에라스무스와 영성작가 헨리 나웬의 나라이다.

 

렘브란트 자화상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는 1606년 네덜란드의 레이든에서 방앗간을 운영하던 하르만 판 레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레이든 라틴어학교를 졸업하고 레이든 대학에 진학했지만, 그림을 그리려고 중퇴하고, 반 스바넨부르와 피터 라스트만에게서 도제생활을 하다가 화가로 독립했다.

렘브란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다만 어림짐작으로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는 몇몇 단편적인 글을 빼고는 자신의 삶에 대한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렘브란트는 삶의 일정한 단계에 이를 때마다 자화상을 그렸고, 이것을 통해서만 그를 가늠해 볼 따름이다. 발터 니그는 <렘브란트, 영원의 화가>에서 렘브란트가 자화상에 집중한 것은 “자신의 얼굴을 찾기 위한 노력에서 나왔다”고 적었다.

“렘브란트는 자신에 대해 알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며, 하느님을 더 깊이 알려면 먼저 자기를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그리스도인이다.”(발터 니그)

그러나 렘브란트가 처음부터 종교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화가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성공 가도를 달리던 때에 그린 첫 자화상은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그는 암스테르담으로 이사 와서 세상을 향해 마음을 활짝 열고 있었으며, 이교도적일 만큼 쾌락을 즐겼다. 활력이 넘쳤고, 동물적 애정으로 삶을 가득 채웠다. 게중에는 용병의 모습을 한 자화상도 있었다.

 

젊은 시절의 렘브란트 자화상

이 연장선에서 평민 출신이던 렘브란트는 시장의 딸 프리슬란트 태생 사스키아 판 오이렌부르흐와 결혼했다. 렘브란트는 사스키아와 아가서의 시편처럼 달콤한 사랑놀이에 흠뻑 빠져 들었다. 그리고 귀티 나는 아들 티투스를 얻었다. 렘브란트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주와 보석, 금과 금속이 발산하는 찬란하고 눈부신 광채들을 지칠 줄 모르고 쳐다보았다. 그는 값비싼 동판화, 오래된 무기, 동양의복, 박제동물, 아라비아 양탄자를 사들였고, 그의 집은 당시 고물가게를 연상케 했다.

그러나 귀족사회의 일원으로서 잘 나가는 초상화가였던 렘브란트는 1642년 사스키아가 티투스를 남기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으면서 불행이 찾아왔다. 그의 작품 <야간순찰>이 반품되면서 모욕감을 느꼈으며, 이 때부터 늘 삶의 양지만을 선택했던 귀족화가 루벤스와 완전히 반대되는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된다.

 

선술집의 방탕아. 렘브란트, 렘브란트는 이 그림에서 아내 사스키아를 모델로 하고, 자신을 우스광스럽게 그렸다.

 

헨드리키에 스토펠스를 모델로 그린 '목욕하는 여인.

렘브란트의 삶의 전환기에 만난 사람이 헨드리키에 스토펠스였다. 그녀는 공부를 하지 못한 농부의 딸로, 이 집에 하녀로 들어와 일을 하고 있었다. 헨드리키에는 집 안을 청소하고 음식을 장만했으며. 친엄마처럼 티투스를 돌봐 주었다. 오래동안 아무도 돌보지 않아 썰렁해진 집안 분위기를 다시 따뜻하게 만들었다.

이제 렘브란트는 고상한 귀족의 딸이 아니라 땀 냄새 나는 하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격노한 암스테르담의 칼뱅파 성직자들이 책임을 묻게 되고, 그녀의 성찬 참여도 금지시켰다. 렘브란트의 불행을 기회로 경제관념이 없던 렘브란트는 금융가들에 의해 파산했다. 재산을 몽당 압류당한 렘브란트는 침묵했다. 상류사회에서 밀려난 그에게 사람들은 등을 돌렸고,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 외곽으로 거처를 옮겨 헨드리키에와 갓 성인이 된 티투스와 함께 골동품 가게를 하며 생계를 겨우 이어갔다.

이제는 멸시의 대상이 된 렘브란트는 가난한 이들과 가까워졌다. 상류사회에서 추방된 그 자신 역시 가난한 사람으로 살아갔다. 이때 그가 남긴 한마디가 있다.

“내 영혼이 한없이 펼치고 싶을 때 나는 명예가 아니라 자유를 찾는다.”

 

제우크시스의 모습을 한 렘브란트

렘브란트는 외적으로 몰락했지만 원망을 일삼지 않았고, 인간을 증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위대하다. 그는 여전히 유머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인생 후반에 그려진 그의 자화상을 보면, 그가 흔들지 않는 사명감으로 내면을 행해 가고 잇는 모습을 보여준다. 발터 니그는 그의 마지막 자화상에서 “하느님 앞에서 완전히 투명해진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잔잔한 평화가 넘쳐 흐른다”고 했다. “고통을 통해 하느님에게 이끌린 그리스도교적 얼굴”이라는 것이다.

헨드리키에는 1663년에 세상을 떠났고, 1년 뒤에 아들 티투스마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렘브란트는 완전히 혼자인 채로 삶의 모든 가혹함을 견뎌 내야 했다. 1669년 10월 4일, 렘브란트는 방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 당시 공증인은 “옷 한 벌, 손수건 여덟 장, 동전 열 개, 화구 하나, 그리고 성경 한 권”이 그가 남긴 물건 전부라고 기록했다. 이미 동시대인들은 렘브란트를 없는 사람 취급하였기 때문에 렘브란트의 장례는 아무런 미사여구도 없이 초라하게 치러졌고, 그의 무덤을 기억하는 사람도 없었다.

키르케고르는 “사람은 자기가 사람들에게 외적으로 거부당하고 밑으로 내려갈 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위로 올라간다.”고 했다. 그의 불행은 그를 피상적인 삶에서 건져 올렸고, 외적으로 가장 낮은 곳에서 내적으로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이를 두고 발터 니그는 “렘브란트의 삶은 하느님의 섭리이지 운명의 장난이 아니었다”고 썼다.


[참조]
<렘브란트의 하느님>, 안재경 지음, 홍성사, 2014
<렘브란트, 영원의 화가>, 발터 니그, 분도출판사, 2008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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