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민주주의’란 말이 통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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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민주주의’란 말이 통할까요?
  • 이은석
  • 승인 2017.11.02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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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석 칼럼]

장면 하나: 숙의 민주주의

숙의민주주의라는 말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위원회 덕분입니다. 공론화 위원회의 결론이 많은 분들이 원했던 방향과는 다르게 나왔지만 그래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숙의민주주의라는 새로운 방향에 대한 동의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평범한 시민들이 모여 공부하고, 토론한 결과를 투표로 드러내는 방식은 매우 신선했습니다. 이전에 협치니, 거버넌스니 하는 말로 다른 입장을 가진 집단이 협력하여 제3의 길을 가야 한다는 말은 많았지만 이번처럼 성공한 사례는 많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갈등이 있는 자리에 잘 활용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장면 둘: 촛불 1주년

촛불 1주년이 되었습니다. 광장의 촛불이 불의한 정권을 끌어 내렸고 새로운 민주정부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 광장의 앞자리에 우리 천주교회가 있었다는 사실이 참 고맙고 자랑스럽습니다. 불의했던 이명박, 박근혜 정권 9년 동안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중심으로 참 많은 시국미사와 거리기도회를 통해 이 땅의 정의와 평화를 외쳤습니다.

제 기억이 정확할지 모르겠지만 2008년 9월 즈음 서울광장에서 열렸던 시국미사는 차벽에 막힌 광장을 여는 감동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이후 교회는 늘 ‘민주주의 회복’을 이야기 했고, 결국 촛불혁명으로 이루어 냈습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장면 셋, 아니면 딴지 하나: "덕망있는 사제?"

<가톨릭뉴스지금여기>에서 '가톨릭 사회복지 법인, 교구와 분리 검토'라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대구희망원이니 청주 성심맹아원이니 교회가 운영하는 사회복지 시설에서 추문이 생기면서 교회 내 사회복지 종사자들 사이에 심각한 토론이 이루어진 모양입니다.

이 기사에서 부산교구 사회사목 국장 김영환 신부는 사회복지 법인과 교구 조직을 완전히 분리할 것을 제안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법인의 인적 구성 개편으로는 교구장 주교가 이사장(대표이사)을 맡지 않아야 하고, 교구 직제에 속하지 않은 덕망 있는 사제를 이사장으로 선출하는 등의 대안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말꼬리를 잡는 것 같아 민망하긴 하지만 ‘덕망 있는 사제’라는 말에 눈이 꽂힙니다. 왜 교구 조직과 완전히 분리된 사회복지 법인의 대표가 ‘덕망 있는 사제’여야 하는지 설명해 주실 분 있으신가요?

교회와 ‘민주’라는 말이 어울릴까요?

꽤 오랜 시간 교회 안에서 이런 저런 활동을 해 왔습니다. 대체로 정의를 말하고 평화를 이야기하고, 평등과 해방 이런 말들을 많이 해 왔습니다. 세상의 아픔과 함께 하겠다고 앞장선 교회 내 단체(교회의 공식적인 인준을 받았든 자발적인 조직이든)의 이름에 정의와 평화라는 말은 들어 있지만 ‘민주’라는 말이 들어 있는 단체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교회 내 가장 큰 공식 조직은 ‘정의평화위원회’이고, 수도단체를 중심으로 많이 이야기하고 있는 개념인 JPIC도 ‘정의, 평화, 창조질서 보존 ’정도로 번역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만들어가는 길에 가장 중요한 가치 중에 ‘민주’라는 가치는 별 필요 없는 것인지, 아니면 너무 중요해서 굳이 밝힐 필요가 없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늘 세상에 대해 ‘민주’를 수호해야 하고 ‘민주질서’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수호해야 하고 회복해야 할 ‘민주’라는 가치가 교회와는 어울리지 않나 봅니다.

일면 변명거리는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철저히 중세 봉건 사회 질서를 중심으로 구조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교종을 중심으로 전 세계가 하나의 믿음을 고백하기에 세상의 질서와 다른 모습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갈려 나간 개신교 형제들이 작은 견해 차이로 수많은 분파를 만들어가는 것을 보면 같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교종을 중심으로 교구장 주교, 각 지역교회의 사제들로 구성된 성직자들이 교회를 이끌고, 평신도들은 목자의 이끄심에 따르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겠다 싶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이라면 ‘민주’라는 말은 교회에는 필요 없는 말입니다. 교회를 이끄는 지도자인 교구장 주교, 본당 신부님의 혜안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겠지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참 답답하긴 합니다. 세상은 범속한 사람들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만들어 가는데 왜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는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결정하는 대로 따라가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천주교, 가톨릭이라는 이름을 가진 조직의 대표는 전문성이나 능력과 관계없이 ‘덕망 있는 사제’여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하늘에서 내리는 은총만 기다리는 천수답 같다고 비유한 어떤 분의 글처럼 우리 교구의 교구장이 혜안이 있고 능력 있는 분이 선임되기를 기다리고, 우리 본당 신부님으로 ‘좋은 분’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우리가 믿고 지켜야할 복음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누군가 설명해 주셨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저 같이 아둔한 머리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 같으니까요.

앞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

<가톨릭일꾼>에 생각을 나누는 글을 좀 써보라는 권유를 받고 몇 차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끄적여 봤습니다. 생각해 보니 내가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위대한 성현의 영성도 아니고 심오한 신학적 진리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고요. 그렇다고 일상의 감동과 감흥을 나누는 글을 쓸 수 있는 재주도 없고, 결국 우리 교회에 대한 투덜거림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몇 차례 교회에 대한 투덜거림은 계속 됩니다. 그 투덜댐 속에서 다른 길을 찾을 수 있다면 더 좋겠지요. 그러길 바라면서요.
 

이은석 베드로
정의․평화․민주 가톨릭행동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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