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머튼 "하느님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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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머튼 "하느님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 한상봉
  • 승인 2017.10.31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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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Merton, 1915-1968 신비주의와 저항의 미학, 토마스 머튼-5

토마스 머튼은 <칠층산>을 쓴 지 20년이 지난 후 일본어판 서문을 쓰면서, 자신이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동기가 세상에 대한 부정적 감정으로 온통 착색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한 적이 있지요. 그는 죄많은, 자기 중심적인, 돈에 굶주린 세상과 불화를 일으켜 떠난 것입니다. 그러나 수도생활을 통해 머튼은 그들에 대한 연민을 배웠습니다. 문제의 중심에 내가 있음도 발견했습니다. 따라서 머튼은 사랑과 진리에 대한 신뢰를 통해 사회적 정치적 참상에 동참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이 길에서 아시아의 위대한 현인들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장자(莊子)였지요. 장자는 주전 550-250년 사이에 중국에서 활동한 도교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머튼은 장자에게서 “아무 것도 배우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선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깨어나게 해주며 자각하게 해 준다. 선은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가리킬 뿐이다.”(선과 맹금, 49-50)

이것은 새로운 관점이며 경험이었습니다. 머튼은 <장자의 길>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쓴 다른 어떤 책보다도 이 책을 쓸 때 나는 즐거움을 느꼈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까닭은 단순하다. 그가 장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나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그를 좋아하는 까닭을 밝힐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장자의 길, 9-10)

머튼은 이 구절을 읽으면서, 자기의 실존에 대해 방어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자유로움을 얻게 됩니다.

또한 머튼은 기본적으로 기술과 과학에 대해 인색하다고 평가받고 있는데, 하느님에 대한 진술 뿐 아니라 객관적 진리에 대한 염증이라고 할까, 이런 태도는 장자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지요.

“신발이 맞을 때
발은 잊힌다
허리띠가 맞을 때
배는 잊힌다
마음이 바를 때
‘옳음’과 ‘그름’은 잊힌다.”
(장자의 길, 112)

 

머튼은 과연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말과 토론이 우리를 하느님께 가까이 이끌고 있는지 의심했습니다. 구원의 신비에 대한 지성적 분석과 정교한 글들이 우리를 진리의 근원에 가까이 다가서게 하는지 의심했습니다. 머튼은 우리가 언제나 우리의 인식 너머에 계신 하느님을 파악하기 위해 점점 더 복잡한 수단을 절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를 ‘체계적인 절망’이라 부르지요.

장자를 통해 머튼은 비폭력에 대한 영감을 ‘무위(無爲)’의 차원으로 올려놓았습니다. 또한 관상생활에서 관상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반대했습니다.

“우리가 만일 늘 관상, 관상, 하느님과의 합일, 신비적 합일, 하느님과의 친밀 등에 대해 생각한다면, 그것도 괜찮은 일이다. 그러나 도달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그런 것들에 대해 계속해서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우리는 진짜 즐길만한 것, 행복을 누려야 하는 것, 하느님을 위해 찬양해야 하는 일상생활의 본질적이고도 참다운 경험을 놓치게 된다.”(소란한 세상에서의 관상, 351)

그리고 마침내 관상과 행동을 구분하는 일의 피상성을 간파했습니다. “도인(道人)이 추구하는 참된 평정은 무위의 행동 속에 있는 고요함, 달리 말해, 이름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행동과 관상의 구별을 넘어서는 고요함이다”(장자의 길, 26)

장자는 “물고기에게 필요한 것은 물 속에 잠기는 것이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도 안에 잠기는 것”이라고 했는데, 머튼은 하느님이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그 분 안에서 자신을 잊을 수 있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체험 속에서, 모든 게 변하지 않았는데 내가 변함으로써 세상이 달리 보이는 지경에 이릅니다.

“내가 선(禪)을 붙들기 전에 산은 그저 산에 지나지 않았고 강은 그저 강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선에 다가섰을 때 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니었고 강은 더 이상 강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선을 이해했을 때 산은 산이었고 강은 강이었다.”(선과 맹금, 140)

 

토마스 머튼의 <선과 맹금>은 1968년에 출간되었는데, 그 책이 머튼을 방콕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아시아종교의 신비전통을 되짚어보면서 결국 서양 그리스도교의 케노시스(자기 비움) 개념의 참뜻을 깨달았습니다.

행동지향적인 서구인들은 자신의 힘과 영향력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들은 소유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고, 생산력을 따져묻는다고 말하면서, 그런 이들은 자기 자신을 생각의 중심에 놓는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침묵할 때 말을 걸어오시고, 우리가 스스로 비울 때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위한 여백이 없다는 것이지요. 여러가지 일로 바쁜 우리는 초월적인 하느님을 민감하게 느끼는 대신에, 인위적인 자극이 주는 사소하고 변덕스런 감각적 만족에 빠져든다고 말하면서, 토마스 머튼은 관상가들조차 자아의 정신적 만족을 위해 관상하는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비판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환상과 황홀경과 모든 형태의 '특별한 체험'에 대해 그렇게도 적대적이었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선사들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선과 맹금, 76-77)

이런 그가 1968년 12월 10일, 성탄절을 며칠 남겨 두고 53세로 이승을 떠났습니다. 그는 이제 온전히 자신의 몸마저 비어냄으로써 다른 몸으로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출처] <그대 아직 갈망하는가>, 한상봉, 이파르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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