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유신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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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유신론'을 기다린다
  • 한상봉
  • 승인 2017.10.30 03: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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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모든 삶은 장엄하다]-26

한국 천주교회는 지금 조계종이 안고 있는 어둠을 나누어 갖고 있지 않은가 반문할 차례이다. 조계종은 그 산중의 거칠음의 정서 때문인지, 자신의 밝음과 어둠을 백일하에 내어 놓고 차라리 공개적으로 대중의 심판을 받고자 하는지도 모른다. 항상 가장 냄새 나는 고름은 은밀한 데서 자라나게 마련이다. 아예 우리 천주교회도 조계종처럼 자신의 문제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판단받으려는 자세를 취한다면 어떨까?

 

지금 명동성당 앞마당에는 '바보 예수상'이 사라진지 오래이다. 그나마 교회에 신선한 자극을 주던 이 예수상이 사라진 뒤 주일이면 성당 앞마당은 늘 장터바닥처럼 붐빈다. 사진=한상봉

천주교회의 손님과 불청객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한 가지 경험을 나누고자 한다. 십수년 전 뜨거운 여름날, 지하철공사 노동조합의 노동자들이 서울 명동성당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노동자들은 명동성당에서 찬밥 신세를 경험해야 하였다. 결국 이들은 명동성당에서 쫓겨나 조계사로 농성 장소를 옮겼다. 며칠 뒤 일간 신문에는 조계사의 농성장 천막 바닥에 스님들과 노동자들이 함께 마주 앉아서 파안대소(破顔大笑)하며 수박을 쪼개어 먹고 있는 사진이 실렸다. 당시 가톨릭노동사목협의회 간사로 일하던 나는 무척 당황스럽고 창피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고심했다.

어머니이신 교회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이 조계사에서 환대받는 현실을 예수님께서 보신다면 뭐라 말씀하실까? 스님들이 어리석기 때문에 무도(無道)한 자들을 환대한 것일까, 아니면 명동성당측이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겠다고 선포하셨던 예수님의 뜻을 거스른 것일까? 나는 「손님과 불청객」이라는 제목으로 원고지 8매 분량의 짧은 글 한 편을 써서 사방에 팩스로 보냈다. 물론 명동성당에도 보냈다. 명동에서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 조계사에서 손님으로 둔갑한 곡절을 따져 묻는 내용이었다. 당시 노동자들의 처지를 두고서, 복음서를 잣대로 대조해 보아도, 교황님들의 사회 교리를 가져다 대조해 보아도 교회가 취한 태도는 옳지 않았다.

이를 두고 명예 훼손이라고 생각했던 탓일까? 퇴근해서 집에 와 있는데,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다. 명동성당의 모 신부님이 나를 찾는다고 하는 것이다. 전화 연락을 드렸더니, 그분은 화를 삭이지 못하고 계셨다. 수승화강(水昇火降)이라는데, 그분은 화를 키우고 계셨던 것이다. 첫마디가 “당신 천주교 신자 맞아?”였다. 그러곤 명동성당과 추기경 님에 대한 나의 언급의 무례함에 대하여 마구 하대(下待)하며 힐난하기 시작했다.

내 입장을 말씀 드리려고 하자, 말을 끊으며 신부님은 자신이 말을 하려고 전화를 걸었지, 내 말을 듣고 싶어서 전화한 게 아니니 그저 듣기나 하라는 식이다. 그러곤 “다음부터 글을 쓸 때는 신부 허락 받고 쓰라”는 말을 끝으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참으로 건방지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이 신부님과 전화 통화 후 나는 살 떨리게 곤혹스런 존재로 교회가 다가옴을 느꼈다. 황당하고도 무서운 일이다. 온갖 교양 있는 체하던 자들이 먼저 상투를 풀어 헤치고 나서는 격이 아닌가.

됫박으로 덮어 놓은 등불

그러나 이 얼마나 흐뭇한 일인가? 당시 삼십대의 일개 평신도가 쓴 글을 두고 존엄하다는 명동대성당의 사제가 직접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 후로도 나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교회 쇄신’에 관한 이런저런 글을 발표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 후로 내 글에 대해서 구체적인 반발을 보인 사제들은 별로 없었다. 조목조목 따져 가며 반박하는 사람이 있다면 좋겠다. 그래야 서로 오해가 있다면 풀고, 이른바 변증법적으로 합리적 대안을 찾아갈 것이 아닌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사람은 ‘교회’를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전형적인 태도는 ‘무관심’이다.

요즘은 우리 교회 안에서 ‘교회 쇄신’에 관하여 말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보기 드물다. 주교님들을 비롯하여 모든 성직자들이 걸핏하면 ‘교회 쇄신’을 들먹이기는 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교회 쇄신을 위한 대안이 제출되면, 그 문서는 그저 사문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천주교 전래 200주년 기념으로 1984년에 다양한 절차와 협의를 거쳐 작성한 ‘사목회의의안’조차도 끝에 가서는 공식적으로 채택되지 못한 채 참고 자료로만 회람된 적이 있지 않은가. 몇몇 교구에서 지금이라도 그 문헌을 다시 들먹이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나마 반가운 일일 텐데, 그런 태도야말로 그 동안 됫박으로 덮어 놓았던 등불을 들추어 내는 일일 텐데. 

사자후를 기다리며

1998년에 정양모, 서공석, 이제민 신부의 강연 내용과 글에 대한 교황청의 제동 때문에 천주교회 안에서도 제법 잡음이 많았던 적이 있다. 그분들의 글은 대부분 로마 중심의 중앙 집권적 교회와 가부장적 성직주의 등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교회를 비롯해 만사만인을 새롭게 하는 성령에 의존해야 할 교회가 제도 안에서 경직된 삶을 살아가는 현실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 문제는 교황청의 언질이 빌미를 주고 한국주교회의가 경솔하게 반응함으로써 항간에 제도 교회의 권위주의를 드러내는 사건으로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이 사건은 결코 공론화되지 못했다. 모든 게 은밀하게 진행되었고, 가톨릭 언론 매체에서도 단신으로 처리되었을 뿐, 그 사건의 전모에 대해서는 공개하지 않았다. 결국 천주교중앙협의회와 당사자인 사제들 주변에서만 알음알이로 알려졌다.

이 사건이 왜 공개적으로 여론을 타지 못하였는지는 천주교 식자(識者)라면 누구든지 잘 알 것이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천주교회의 비공개주의, 마녀 재판식의 밀실주의와 상관있다고 본다. 그 과정에서 희생자는 여전히 외롭고 가해자의 품위는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 이 정직하지 못한 태도가 ‘교회 쇄신’이라는 중대한 과제를 질질 끌며 내일의 과제로, 또 내일의 과제로 미루게 만드는 것 같다.

차라리 우리 교회가 조계종처럼 한 차례 피 터지게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진실 앞에 당당히 나선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정양모 신부의 후일담은 더욱 가슴을 친다. “저는 여러 심포지엄에서 교회 문제들을 거론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교회 현실에 실망한 까닭에 교회 쇄신을 거론하고 싶지 않거든요.”

'한국천주교유신론'을 쓰실 어른 어디에?

그래도 남은 기대가 있다면, 누군가 ‘한국천주교유신론’(韓國天主敎維新論)을 사자후를 토해내었으면 좋겠다. 천지를 개벽하는 이런 공덕(功德)을 쌓을 어른을 기다린다.

조선 불교를 파괴한 죄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질 것이라고 조선총독 남차랑(南次郞)을 크게 꾸짖었던 만공(滿空) 스님이 만해(萬海)를 찾아갔다.
“호령만 하지 말고 스님이 가지고 계신 주장자로 한 대 갈길 것이지.”
“곰은 막대기 싸움을 하지만, 사자는 호령만 하는 법이지.”
“새끼 사자는 호령만 하지만, 큰 사자는 그림자만 보이는 법이지.”

훗날 만해가 입적한 뒤로, 만공 스님은 이제 서울에는 사람이 없다 하여 다시는 서울에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어른이 우리 천주교회에는 없습니까? 묻고 또 묻고 싶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출처] <연민>, 삼인, 2000. 이 글은 제가 삽십대 중반 <공동선> 편집장 시절에 쓴 글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20년이 되었군요. 세월이 흘러도 마음과 생각의 갈피는 달라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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