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사회화: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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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사회화: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 박기호 신부
  • 승인 2017.10.24 11: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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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사이들과의 율법논쟁(루가 11,37~54)

[박기호 신부 칼럼]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 건설의 천명을 받드시며 가난한 민중들에게 치유와 구마의 은사를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왜 갈릴래아 민중들의 칭송과 선풍적인 인기를 뒤로하고 예루살렘으로 상경하여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셨던 것일까? 갈릴래아에서만도 할 일이 많았는데 꼭 그랬어야만 하는가?

부르심과 응답! 그것은 단 한 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살아계신 분이시고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 운동을 일으키신 분이십니다. 고정된 것은 죽은 것.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생성 변화의 운동을 하지요.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이십니다.”

우리 신부들은 서품 받고 본당사목도 하게 되지만, 이 소임은 규정된 것이 아니라 때로 자신도 예측할 수 없었던 새로운 소명에로 부르심을 받고 응답하게 됩니다. 성령의 바람이 부는대로 새로운 천명을 받들어 삽니다. 제가 아는 골롬반선교회 수녀님은 70세가 되어 생전 처음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 선교로 떠났지요. 부부가 결혼만으로 끝나는 관계가 아니고 삶의 성장과 성숙을 이루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다들 아시지요?

 

예루살렘. 사진=한상봉

예수님의 갈릴래아 삶은 부족한 것 없이 충분히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아버지께서 보내신 사명 자체였습니다. 사람이 자신을 수행하고 가족을 건사하고 이웃과의 친애로운 삶은 얼마나 좋은가? 자신과 이웃을 변화시키는 일은 얼마나 소중한가?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믿음과 소명 운동을 예루살렘에로 확장하고자 하셨습니다. 자신과 가족의 행복을 지선으로 삼는 고정된 소명은 죽은 소명입니다. 신앙도 소명도 생명이 없습니다. 진실한 믿음은 세상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는 운동에로 나아갑니다. 그것을 ‘신앙의 사회화’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날처럼 한국사회의 종교가 세인들에게 빈정거림의 대상이 된 적이 없습니다. 정치 사회의 정의와 평화 인권에 무관심하고 자기 보호에 갇힌 성직자 수행자들이 스스로 쌓은 업보입니다. 말로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가르치면서 수신도 제가도 세상의 평화에도 기여하지 못하고 오로지 자기 안위와 맘몬의 소유욕 명예욕만을 우상하며 정치적 보수의 길을 걸어온 결과입니다.

발 디딜 땅이 없는 것이 존재할 수 없듯이 종교도 평화도 이웃과 세상의 제도 환경에 영향 받습니다. 중앙 예루살렘의 결정이 변방 갈릴래아 민중들의 삶에 끼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은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좌절마저도 마지막 아버지의 부르심으로 받들어 순명하시며 속죄의 제물로 직접 당신 몸을 내어놓으셨습니다. “받아 먹고 마셔라.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하시곤, 말로만이 아니라 진짜로!

요즈음 평일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 바리사이 종교지도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세상 구원에로 확장하는 소명을 외면하고 안위에 갇혀 살다보니 스스로 타락해버렸다고 질타하십니다. 

 

박기호 신부
예수살이 공동체 산 위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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