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의 한국불교유신론을 다시 읽는다
상태바
만해의 한국불교유신론을 다시 읽는다
  • 한상봉
  • 승인 2017.10.23 23: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상봉의 [모든 삶은 장엄하다]-25

[한상봉 칼럼] 

어머니가 사십대 중반에 낳은 나는 체질적으로 약골임에 틀림없다. 모두가 배곯던 시절, 어머니는 행상을 하셨고, 그 와중에 늦둥이로 내 육신의 씨앗을 받으셨다. 그 씨앗이 못내 부담스러우셨던지 어머니는 산부인과 병원 앞까지 가셨던 모양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시다가, 어머니는 천주교 신자라는 자의식을 이기지 못해 결국 집으로 되돌아 오셨단다.

그날 밤 아버지는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어, 제 먹을 것 제가 타고 나는 법인데. 또 알어, 그놈이 커서 우리 호강시켜 줄지” 하셨단다. 목수였던 아버지, 그리고 육 남매를 낳으셨던 어머니는 어느 보슬비 내리는 봄날 오전에 나를 낳으셨다. 가족들은 부침개를 부쳐먹고 있었고, 아버지는 동네 선술집에서 막걸리를 걸치고 계셨다고 한다. 갓 태어난 아기는 산모가 제대로 먹질 못한 까닭인지 쭈굴쭈굴하니 비쩍 마른 형상이었고, 숨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였다고 전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찬 윗목에 아기를 놓아 두었는데, 목숨이 본래 모진 탓인지 아기의 숨이 돌아왔고, 쬐그만 게 목소리만 큰 아이로 나는 성장했다.

이야기가 처음부터 장황해졌지만, 요컨대 내가 태생적으로 약골이라는 말을 하고자 함이었다. 그래서 나는 심리적으로 언제나 등산을 어려워했다. 그래서 산에 오르면 주로 산기슭에 자리한 절에 머무는 것을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좋아했다. 어차피 내려올 산인데 뭐하러 용을 쓰고 정상까지 올라가느냐라는 말도 안 되는 사설을 풀면서 말이다.

어려서는 절이 무척 두려운 장소였다. 사천왕상(四天王像)하며 탱화들은 지옥을 연상시켰고, 성당에 오래 다니면서도 내게 떠오르는 지옥이란 그저 그 탱화에서 보았던 광경으로만 연상되었다. 지금 생각건대, 서양화가들이 그렸다는 지옥도(地獄圖)보다는 불교의 지옥 그림이 무서우면서도 자못 해학적이어서 좋다. 우리 나라 도깨비 그림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불교는 이미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특정한 종교라기보다 ‘문화’의 한 부분이다. 불교적 정서는 먼 조상으로부터 친숙해지고, 모태를 통하여 우리 민족의 유전 인자 속에 두루 각인되어 있는 듯하다. 그리고 성당이나 예배당처럼 폐쇄된 이국적 공간이 아니라, 마을 앞에 있는 느티나무 그늘처럼 편안한 열린 공간이라서 더욱 좋았다. 사뭇 신령스런 공간이면서도 언제든지 접근해서 헤집고 다닐 수 있기에 어머니의 품 속 같다.

격식을 갖추고 전례에 참석해야만 뭔가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고 여기던 교회 문화 속에서, 한두 번 미사 참례를 빠지면 죄를 지은 것 같아서 늘 판공 성사의 메뉴에서 빠지지 않던 “○번 미사를 빠졌습니다”라는 구질구질한 ‘자백’을 요구하지 않아서 좋았다. 때때로 절간에 들러 묵은 향 냄새를 맡으며 조용히 법당에 앉아 있는 게 왠지 좋아서 나는 절을 찾았다. 그리고 단 한 번도 법당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을 우상 숭배 또는 죄라고 여긴 적이 내 기억엔 없다. 아마도 불교를 어떤 종교라기 보다, 이 또한 생활 문화의 일부로 단순히 바라보았던 탓일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불심 잃어버린 불교 승려들

숲속 깊이 어머니 자궁처럼 편안하게 들어앉은 절간에도, 항상 고요하게 수행정진(修行精進)하는 스님들만 있다고 믿었던 불교에도 갈등과 반목이 자리 잡고, 이권을 둘러싼 더러운 패싸움이 난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였다. 한국 불교는 세상이 부패한 예토(穢土)일 때 절간만 따로 청정무구한 정토(淨土)일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군사 독재 시절엔, 온갖 권승(權僧)들이 권세를 부리며 치부(致富)하는 데 여념이 없었고, 그 부산물인지 광주 시민을 학살하고 권좌에 올랐던 전두환이 1987년 6월 민중 항쟁에 꺾여 물러난 곳도 설악산 기슭의 백담사라는 절간이었다. 군사 정권의 안녕과 독재자의 장수를 ‘호국 법회’란 이름으로 기원하던 절간에 부처님이 자리 잡을 공간은 없다. 시인 황지우가 ‘화엄’ 광주(華嚴光州)라 칭하던 그 고을의 피투성이 앞에서 권력을 나눠 가진 불교의 모리배들이 승가(僧家)를 농락했었다.

우리 나라의 불교계를 대표하는 조계종이 1994년 서의현 총무원장이 물러나고 개혁 종단이 출범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서의현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 불교도 한참 멀었다 싶다.  

교계 일각에선 불교 승려들의 멤버십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보기도 한다. 승려들을 흔히 사판승(事判僧)과 이판승(理判僧)으로 나누곤 하는데, 사판승은 절의 운영과 사무를 맡아 보는 승려이며, 이판승은 수행에만 전념하는 승려를 일컫는 말이다. 승려들이 천민 대우를 받던 조선 후기에 사찰의 명맥을 잇는다는 현실적인 명분에 따라 생겨난 개념이다. ‘이판사판’이란 말은 이 둘 사이의 경계가 없어져 뒤죽박죽 엉망이 됐다는 뜻이다.

본래 스님들은 세속적 명리를 부끄러워했으며, 절에서 주지나 소임을 맡아 일하다가도 인연이 다하면 곧장 수행자의 본분으로 돌아가곤 했다. 불교계 문제는 기본적으로 사판승의 문제이지만, 최근엔 사판승 이판승 가릴 것 없는 것 같다. 어차피 ‘염불’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많은 승려들이 문제겠다. 

말법 시대의 승려

서산(西山) 대사는 말법 시대에는 승려들에게 여러 가지 이름이 붙는다고 했다. 중도 아닌 체 속인도 아닌 체하는 것을 ‘박쥐중’이라 하고, 설법하지 못하는 것을 ‘벙어리 염소중’이라 하고, 중의 모양에 속인의 마음을 가진 것을 ‘머리 깎은 처사(處士)’라 하고, 죄악이 하도 무거워 움직일 수 없는 것을 ‘지옥찌기’라 하고, 부처님을 팔아서 살아가는 것을 ‘가사(袈裟) 입은 도적’이라며 꾸짖었다.

결국 서산 대사는 “부처님을 판다는 것은 인과(因果)를 믿지 않고 죄와 복도 없다고 여기는 데서 나온다. 신구의(身口意) 세 가지 업을 물 끓듯 지어 가고 사랑과 미움을 쉴새없이 일으키니 참으로 가엾은 일이다” 하며 탄식하셨다.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은 이처럼 서산 대사의 말을 빗대면서, 이미 1980년 11월 17일에 <문예중앙> 겨울호에 실은 「사자후(獅子吼)를 기다리며」라는 글에서 불교 쇄신에 대하여 말했다. 그 말이 지금도 어김없이 소용된다.

"일부의 삿된 무리들이 작란(作亂)하여 승보(僧寶)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고 종단(宗團)의 기강을 어지럽혀 불자(佛子)들을 방황케 하는 것이야 새삼 어제 오늘의 일만이 아니고 중생들이 모여 이루어진 집단에서는 반드시 일어나게 마련인 작태인지라 굳이 놀랄 바 아니나, 요사이 들려 오는 소식으로는 그 작란과 티끌 같은 이해에 얽혀 난마상투(亂麻相鬪)하는 작태가 극에 달하여 마침내 부처님의 바른 법이 땅에 떨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하더니, 아, 놀랍고 슬프게도 사문(沙門)의 다수가 세속의 손에 묶인 바 되었다 하므로, 몇 날을 번민하며 괴로워하던 끝에 평소 마음에 접어 두었던 몇 가지 생각을 펼쳐 큰스님의 봉(棒)을 맞고자 하나이다."

한때 승려였던 김성동은 ‘첫마음’으로 돌아가자는 말로 시작한다. 출가자(出家者)의 본분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불경에선 이렇게 가르친다.

“출가하여 중이 되는 것은 몸이 편안하려는 것도 아니며 명예와 재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고 죽음을 면하려는 것이며 번뇌를 끊으려는 것이요 부처님의 지혜 생명을 얻으려는 것이니, 삼계에 뛰어나서 중생을 건지기 위함이다. 머리와 수염을 깎고 사문이 되어 내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세속의 온갖 재산을 버리고 남에게 빌어 얻는 것으로써 만족하라. 하루 한 끼만 먹고 한 나무 밑에서 하루 이상 머물지 말라. 사람의 마음을 덮어 어리석게 하는 것은 애착과 탐욕이기 때문이다.”

결국 출가(出家)란 단순히 집을 떠나 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불길에 휩싸여 있는 마음의 화택(火宅)에서 벗어나라는 말일 것이다. 그 초심으로 돌아가야 불교가 쇄신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본래 조계종은 참선을 위주로 하는 선종(禪宗)의 계보에 있는 종단이다. 다만 각자의 근기(根機)에 따라서 경(經)을 배우거나 선원(禪院)에서 참선을 할 따름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배우고 부처님의 마음을 배우라는 것이다. 참선이란 화두(話頭)를 붙들고 수행하는 것인데, 경허(鏡虛) 스님의 말씀이 새겨들을 만하다.

“대저 중노릇이란 내 몸에 있는 내 마음을 찾는 일이다. 이 ‘마음’이 무엇인가 의심을 하여 찾아 들어가되 고양이가 쥐 잡듯이, 닭이 알을 품듯이, 목마른 사람이 물 생각하듯이 간절히 간절히 의심해 나아가면…… 산은 깊고 물은 흐르고 각색초목(各色草木)은 휘어져 있고 이상한 새소리는 사방에서 울고 적적하여 세상 사람은 오지 않는데, 고요히 앉아 내 마음을 궁구하니 내게 있는 내 마음이 부처가 아니고 무엇이랴.”

 

사진출처=pixabay.com

지장 보살 지장 보살 지장 보살

참선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편이라면, 중생을 구제하는 것은 깨달음의 목적이다. 그래서 상구보리(上求菩提)함은 중생 제도(衆生濟度)를 위함이라고 한다. 수행자들이 독신으로 고독하게 살며 고행하는 까닭은 보살행(菩薩行)을 위해서라는 말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였던 지장(地藏) 보살은 스승이 이승을 떠난 뒤에 교단의 직무에서 벗어나 그의 발원(發願)대로 지옥 중생의 구제를 위해 투신하였다. 가장 고통이 치열한 지옥으로 가서, 중생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을 교화하다가, 지옥 중생 모두가 성불하여 지옥이 텅 비게 되면, 그제야 마지막으로 성불하겠다고 비장한 서원(誓願)을 하였다.

지장 보살이 말한 지옥이 과연 존재하는지 우린 모른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장 보살이 가장 고통받으며 지옥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인도 사회에서라면 당연히 불가촉 천민들이 살고 있는 격리 지역이었을 것이다. 이 정도의 서원을 하지 못하고 절밥을 얻어먹는 것을 십분 이해하더라도, 이왕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면, 우선 수행 정진하고 손이 닿는 대로 가난한 백성을 돌보려고 애쓰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마땅하지 않은가.

이처럼 불교의 진면목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일찍이 만해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주장하셨다. 그분의 지적에 따르면 ① 교리의 민중화 ② 경전의 민중화 ③ 제도의 민중화 ④ 재산의 민중화를 이뤄야 불법(佛法)이 제대로 선다고 했다. 이른바 민중 불교를 앞서 주장하신 것이다.

무봉탑 무근수

사람
사람
업을 따라
그 몸을 받네.
괴로움과 즐거움은
선함 악함의 인과로다.
사악함 망령됨 따르지 말고
언제나 바르고 참됨을 행하라.
부귀라 하는 것이 쌀겨와 같다면
인의라 하는 것은 갑옷과 투구로다.
하물며 오묘한 이치 깨쳐 참됨 얻으면
저절로 바탕이 바뀌고 정신도 맑아지리.
내 이 몸은 불과 바람, 땅과 흙이 아니며
마음은 인연과 염려, 티끌 먼지 아닐레라.
이어 붙인 자취 없는 탑에 등불은 밤이 없고
뿌리도 없는 나무 위에 꽃이 피니 늘 봄이라.
바람이 밝은 달을 갈 때에 뉘 병 들고 났으며
구름이 청산과 하나되니 옛것과 새것 그 뉘러뇨.
시원스레 뚫린 이 길은 성현들께서 밟아 오신 바이니
온갖 수레바퀴가 같아 예나 지금이나 함께 전진하네.


고려 때 승려 혜심(慧諶)이 지은 「차금성경사록종일지십운」(次錦城慶司祿從一至十韻)이란 아름다운 시다. 불교의 가르침을 혜심은 쉽게 풀어 설명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전생의 업을 받고 태어난다. 현세의 괴로움과 즐거움은 전생의 선악의 업보일 뿐이다. 그러므로 한때의 덧없는 부귀에 얽매여 바른 길에서 벗어나기보다는, 무봉탑(無縫塔)에 등불이 환하고 무근수(無根樹)에 꽃이 핌과 같이 그 마음을 광명대도의 세계에서 노닐게 함이 어떻겠느냐는 내용이다.

여기서 무봉탑과 무근수는 바로 자기 자신이며, 불교 자체의 모습이어야 한다. 항상 부끄럼 없이 세상의 목탁이 되는 불교를 기대하는 민중의 염원이 여기서 이뤄진다. 제 모습을 비추어 볼 잣대가 없는 게 아니다. 잣대는 이미 부처의 설법 안에 온전히 드러나 있으며, 수많은 선사들의 삶이 갈 길을 밝혀 주었다. 그 길을 따라 밟을 용기만 있으면 언제든지 한국 불교는 어두운 밤길을 가는 중생들이 발을 헛딛지 않도록 도와 줄 것이며, 보안등이 없어도 무봉탑의 밝기만으로도 세상을 비추기에 충분하고, 무근수처럼 세상을 아름답게 꽃피워 낼 것이다.

그러면 우리 한국천주교회는 어떠한가? 일반 신자들 사정이야 잠시 접어두더라도, 성직자들의 형편이 어떠한지 묻는다. 염불보다 잿밥에, 성인됨보다 안일무사와 출세에 몸부림 치는 성직자는 없는가? 내 삶을 통해 하느님을 드러내고, 그렇게 복음을 밝히는 사제들이 간절하겠다. 이제 한국천주교유신론이 나올 법하다. 


[출처] <연민>, 삼인, 2000. 이 글은 제가 삽십대 중반 <공동선> 편집장 시절에 쓴 글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20년이 되었군요. 세월이 흘러도 마음과 생각의 갈피는 달라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종이신문 <가톨릭일꾼>(무료) 정기구독 신청하기 
http://www.catholicworker.kr/com/kd.htm

도로시데이영성센터-가톨릭일꾼 후원하기
https://v3.ngocms.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hva82041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