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 이 세상은 사랑으로 창조한 하느님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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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 이 세상은 사랑으로 창조한 하느님의 작품
  •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7.10.24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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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 새 예루살렘-3

요한은 <묵시록>에서 1세기 그리스도교 선구자들을 위해서 나름대로 멋있는 구식 서부 개척사 같을 것을 쓰고 있다. 그는 아무리 많은 원주민들이나 악당들이 그들의 마차를 공격하더라도 결국 기병대가 나타나서 그들을 구해 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수없이 많은 폭풍과 가뭄을 견디며 여행을 하더라도 그들은 분명히 평화와 풍요의 땅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들에게는 엄청난 믿음과 희망이 필요하다.

그는 소아시아의 몇몇 그리스도인들이 의심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렇게 쓴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위험을 인식하지 못하고, 어떤 어려움도 예상치 못한 채 믿음의 여정을 떠났을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그들에게 위험한 여정이 요구하는 더 깊은 믿음을 그들에게 보여 준다. 그는 그들에게 어둠을 뚫어 보고 바람 속에서 흔들리지 말고 걸으라고 격려한다. 그는 일들이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에 상관없이, 하느님께서 일들의 실제를 예수님 안에서 보여주셨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킨다.

이런 점에서 요한은 돈키호테가 「라 만차의 사람」에서 알돈자를 위해 한 일을 자신의 공동체를 위해서 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무가치한 창녀라고 했으나 그는 그런 고정관념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했다. 날마다 그는 그녀를 순수한 이상적인 여인 둘시네아라고 부르며 그녀야말로 아름답고 가치 있는 여인이라고 주장한다. 드디어 그의 긍정적인 힘이 그녀의 불신을 극복하여 그녀는 그가 그녀 안에서 정말로 본 사람이 된다.

 

사진출처=pixabay.com

요한의 위대한 작품을 하느님께로부터 영감을 받은 말씀이라고 초기 교회가 인정함으로써 요한의 비전은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유효하다고 인정을 받게 되었다. 하느님 말씀의 권능은 우리 주위의 세상이 실제와는 매우 다르게 보일 때라도 우리에게 그 실제가 무엇인가를 보여 주신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인정하지 못하고있는 우리자신에 대한 진실을 그 권능이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치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소중하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우리가 내버려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자녀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우리가 아무 목적지 없이 가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눈을 떠서 보기만 한다면 우리가 꿈꾸어 왔던 모든 것이 이미 우리의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게 거짓을 말하는 사람은 우리자신 뿐만이 아니다. 우리문화도 우리에게 우리자신이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 말하며, 만일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인정받지 못하면 우리가 실패자임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종교까지도 종종 우리가 스스로 노력해서 구원을 얻거나, 아니면 결과로 고통받아야 하는 죄인이라고 말하면서 우리를 비난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구속(救贖)의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고 하시며, 그리스도의 모습대로 다시 창조되라고 부르신다.

창조에서 재창조까지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의 작품이다. 창조 때에 세상은 하느님 손에 있는 찰흙 같았고 그것이 하느님의 선하신 모습을 자연스러운 형태로 만들어졌다. 인간의 재창조는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와 예수님의 형제와 자매로 만드는 성령을 따라 우리 영(靈)을 다시 만드는 것이다. 그곳은 이 세상과 우리가 향해가고 있는 곳이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래서 묵시록은 하느님의 영원한 창조와 재창조되는 사랑의 거대한 끝을 묘사한다:

그 뒤에 나는 새 하늘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 전의 하늘과 이 전의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맞을 신부가 단장한 것처럼 차리고, 하느님께서 계시는 하늘로부터 마치 신랑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는 신부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나는 옥좌로부터 울려 나오는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때 옥좌에 앉으신 분이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묵시록 21,1-5a)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예언자가 미래의 비젼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느님의 안목으로는 미래도 과거도 없다; 영원은 영원히 현재, 바로 지금, 여기이다. 하느님의 방식은 항상 똑같으며, 하느님의 사랑은 항상 실제적이며, 하느님의 말씀은 항상 진실이다. 그래서 요한은 계속한다:

그리고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기록하여라, 이 말씀은 확실하고 참된 말이다. 이제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 와 오메가, 곧 처음과 마지막이다.” (묵시록 21,5b-6)

이처럼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구속하시는 사랑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둘러 쌓여 있는, 역사의 중심으로 선포된다. 주님은 이미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주님의 사랑은 바로 우리가 있는 이 자리에서 우리에게 늘 주어지기 때문에 그것을 찾으러 어딘가로 갈 필요가 없다. 하느님께서는 창조된 존재를 사랑하시며,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의 능력에 마음의 문을 연 이들을 재창조하신다.

그러한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랑으로 충만함은 역사의 중심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랑으로 충만함은 하느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며,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고 세상이 얼마나 멋있게 되어 가는 지를 보는 것이다.

때로는, 이런 것을 보는 이들은 예언자들이나 시인들뿐이다. 만일 그들이 우리를 위해서 자기들의 비전을 묘사한다면 우리도 그들의 계시를 받아들일 것이다. 그들의 통찰은 무엇이 정말 진짜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우리 스스로가 볼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킨다. 예언자 요한은 그 당시의 교회를 위해서 그렇게 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시대의 교회와 그의 비젼을 공유하게 되었다. 시인 제라드 맨리 홉킨스는 그의 시대에 있었던 똑같은 실제를 “하느님의 위대하심”에서 잘 묘사하여 우리로 하여금 현재 우리 주변에 있는 영광을 보도록 초대하고 있다:

세상은 하느님의 장엄하심으로 충만해 있다.
반짝이는 금속 조각처럼 그 장엄하심은 불길처럼 터져 나온다.
부서지고 조여져서 떨어지는 기름 방울이 그렇듯이,
그 장엄하심은 위대함을 이룬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지금 그분의 권능에 마음을 두지 않는가?

세대는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온갖 풍상에 시들고 더럽혀지며 상흔을 남긴다.
흙은 사람들의 땀과 냄새를 담고 있다.
이제 자연은 알몸이다. 사람들의 발은 자연을 느낄 수 없고
오직 맨발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결코 소모되지 않는다;
가장 사랑스러운 생명의 에너지는 여전히 깊숙한 자연 속에서
꿈틀거림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하여 검은 서구의 마지막 빛이 스러졌다 해도
아, 아침은 동쪽의 누런 벼랑끝에서 다시 새롭게 솟아오른다!
당신의 따스한 가슴으로, 빛나는 날개로
노약한 세상을 끌어안는 성령이 계시기에.

신앙의 비전을 갖는다는 것은 일상이 실제로는 특별한 것이고 세속적인 것이 거룩한 것이며, 세상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바로 세상 한 가운데에 계시다는 것을 알아보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체험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아는 것이다.


[원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신약>,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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