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머튼 "무늬만 교회, 평화를 선언하지 못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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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머튼 "무늬만 교회, 평화를 선언하지 못하는"
  • 한상봉
  • 승인 2017.10.23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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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Merton, 1915-1968 신비주의와 저항의 미학, 토마스 머튼-4

토마스 머튼은 1961년부터 가톨릭계 간행물을 통해 군비경쟁과 냉전에 대한 비판적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는 도로시 데이가 피터 모린과 함께 창설한 가톨릭일꾼운동(catholic Worker)의 영향이 컸습니다. 머튼은 <가톨릭일꾼> 신문에 ‘전쟁의 뿌리는 두려움’이라는 연재물을 투고했으며, 도로시 데이와는 죽는 날까지 동지로 지냈습니다.

 

토머스 머튼

1962년에 <포스트 그리스도교 시대의 평화>라는 책을 탈고했는데, 며칠 후 수도원의 돔 가브리엘 총아빠스가 토마스 머튼에게 더 이상 전쟁과 평화에 대한 글을 쓰지 말고 침묵하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수도자가 쓰기에 적합한 주제의 글이 아니라는 이유였지요. 군비경쟁을 반대하는 글이 수도원에 불명예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이는 총아빠스와 머튼 사이에 교회의 정체성에 관한 불화가 잠복되어 있어서 나타난 결과였습니다. 머튼이 이렇게 반박했지요.

“권위주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새로운 차원을 보거나 듣는 게 수도자의 역할이 아니라, 단지 어느 누군가가 규정해 준 만큼, 또한 규정해 주었기 때문에, 기존의 견해를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 수도자의 역할이라고 믿는다. 수도자는 전위부대가 아니라 장교가 시키는 것만을 이행하는 후방의 화물운송부대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역사적 맥락에서 쇄신에 관해서는, 수도자의 역할은 단순히 높은 분들께 무조건 찬성하는 일밖에 없다. 그렇다면 시키는 대로 교회 관료들의 목적과 지향에 맞춰 기도만 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토마스 머튼은 장상에게 순명해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결국 순명하지 않으면 득보다 해가 더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입장을 더 들어보자면 이렇습니다.

“제가 속해 있는 곳이 바로 저 자신입니다. 이 길을 제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했고, 그 길을 바꿀 기회가 왔을 때에도 이 길을 계속 걷겠다고 자유롭게 선택했습니다. 제가 눈엣가시라면 어쩔 수 없습니다. 굳이 그렇게 되려고 해서가 아니라 제 양심이 시키는 대로 말하고, 제 자신의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장상들이 제게 가하는 제약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러한 제약을 가하는 표면상의 이유에 제가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런 일을 통해 어떤 일을 이루시려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좌파신문’이라는 혐의를 받고 있던 <가톨릭일꾼> 신문에 머튼이 글을 실었기 때문에 집필금지 명령이 내려진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포스트모던 그리스도교 시대의 평화>라는 이 책은 정식 출판되지 못하고 등사본으로 인쇄되어 알음알이로 주변에 회람되었습니다. 책을 받은 사람 중에는 훗날 바오로 6세 교황이 된 몬티니 추기경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머튼은 1962년부터 열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의제 안에 전쟁과 평화 부분과 관련해 영향을 미치고 싶어했습니다. 다행히 1963년에 요한 23세 교황이 발표한 회칙 <지상의 평화>에는 머튼의 주장과 유사한 대목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 또한 1965년에 인준된 <사목헌장>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목헌장>에서는 머튼의 주장과 동일하게 “자연법의 보편적 원리를 거스르는 명령은 죄악”이며, “맹목적인 복종도 그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들을 사면할 수 없”으며, “이런 범죄를 명령하는 자들에게 공공연히 저항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저 사람들의 정신은 최상의 찬사를 받아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토마스 머튼의 평화론이 당시 교회에 충격이 되었던 것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교회관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당대 교회를 포스트모던 시대의 교회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현대세계에서 그리스도교적 이상과 태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그리스도교적 외양은 거의 속빈 강정과 같은 것이며, 과거에 '그리스도교 사회'라고 불리던 사회조차 오늘날에는 무늬만 그리스도교이고 사실은 완전히 유물론적인 이교도의 영향아래 놓여 있다. ... 비그리스도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까지 비폭력과 사랑에 관한 복음의 윤리를 '감상적'이라고 비하하곤 한다.”

 

[출처] <그대 아직 갈망하는가>, 한상봉, 이파르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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