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고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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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고 살기
  • 월리암 J. 쇼트
  • 승인 2017.10.23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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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즐거움-11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프란치스코회의 전통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데에 가난이 필수요소 라고 가르친다. 

예수님의 특성인 가난은 프란치스코 자신의 영성을 구성하는 원칙들 중의 하나이다. 클라라도 40여 년 동안 끊임없이 자신과 다른 자매들의 삶에서 가난이 최우선임을 주장하였고 다른 이들에게도 열심히 권고하였다. 또한 이어지는 세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주위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난의 영적인 길을 따르기 위하여 애썼다.

프란치스코회 전통에서 가난이 차지하는 중심적 위치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의 모범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이후의 세대가 발전시켜온 전통을 밝혀볼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주님께서 그가 살아야 할 ‘삶의 방식’을 보여주셨다고 주장한다. 이 삶의 방식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아무것도 자신의 것 없이’ 살아가는 것이 포함되었다.

 

사진출처=.wordpress.com

이 ‘소유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기본적으로 그것은 진복팔단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제자로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자신의 것들을 소유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영이 가난한 사람들로서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그들은 ‘성령에 따라’ 살아간다. 이러한 방식의 삶에 반대는 ‘소유하는 것,’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육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이 철저한 무소유의 자세는 인간 삶의 모든 부분을 건드린다. 우리 자신의 의지로부터 선행을 하는데 이르기까지 곳곳에 해당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뜻을 ‘소유’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첫 번째 부모의 죄를 되풀이 하는 것’이다. 형제 중에 아무도 권위의 자리를 ‘소유할 수’ 없다. 거룩한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재물을 축적하기 위하여 그들의 지식을 사용할 수 없다. 어떤 형제도 분노나 혼란을 소유할 수 없으며 잘못하는 것의 스캔들을 소유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소유하기를 거부하는 프란치스코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모든 좋은 것을 ‘말하고 행하는’ 분은 가장 높으신 분이시다. 모든 선한 것은 오로지 가장 높으신 분께만 속하며, 어떤 것을 우리 자신의 소유로 삼는 것은 하느님께 속한 것을 우리 것으로 가로 채는 ‘불경을 저지르는’ 행위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프란치스코에게 모든 것은 선물이었다. 우리가 가진 것 우리 존재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 속한다고, 우리의 소유물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모든 선’이시고 ‘모든 좋은 것을’ 다 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모독이다.

‘모든 선’이신 하느님, 아버지와 아드님과 성령은, 모든 좋은 선물을 혼자서만 움켜쥐는 분이 아니라, 관대하게 주시는 분이시다. 심지어 거룩한 생명까지도 내어주신다.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이 좋으신 하느님을 본다. 요한복음(14,6-9)을 인용하면서 프란치스코는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필립보에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보는 사람은 나의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성찬례를 중심으로 삼으면서, 프란치스코는 ‘매일’ 이 같은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사제의 손으로 ‘내려와’ 우리에게 ‘겸손한 모습’으로 다가오신다고 선언한다. ‘천상의 왕좌에서 내려와 동정녀의 움 속으로 들어가셨던 것처럼.’

성찬례와 마찬가지로, 육화 안에서 프란치스코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그리고 그러므로 ‘가장 거룩하신 아버지’)를 본다. 높은 지위와 권력을 움켜쥐지 않고 이 주님은 ‘내려가기로’ 선택하며 사람들 사이에 ‘겸손한 모습으로’ 존재하신다. 프란치스코에게 가난은 예수님 안에서 보여지는 하느님의 모범으로 시작한다. 프란치스코가 인식했듯이 바오로의 두 서간은 ‘하느님의 가난’을 표현하는데, 하나는 필리피인들에게 보낸 서간이고, 또 다른 것은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두 번째 서간이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필리피 2,5-11)

"...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2코린 8,9)

프란치스코의 가난은 거룩한 위치를 붙잡거나 매달리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 하인이 되기 위하여 그것을 놓아버린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응답이다. 이 예수님은 비천한 처지에서 나시어, 가난한 사람으로 살았고 ‘마지막 과월’인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인 분이시다.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므로, 하느님께 가는 길은 어떤 것도 붙잡거나 소유하지 않고 포기하는 길이다.

이러한 그리스도론적 이해없이, 가난은 그 자체로는 속죄의 실천이 되고, 금욕적인 훈련의 방법이나 도덕적 자기-개선에 그친다. 그리고 가난을 기본적으로 덜 갖는 것, 조금 갖는 것으로 이해하여 영적인 회계사의 눈으로 계산하고 측량하는 것은 프란치스코의 비전을 희화시킨다.

프란치스코는 ‘거룩한 복음에 따라 사는 삶’이 필연적으로 가진 것을 팔고 나누는 것을 포함한다고 보았다. 그것은 인간을 위하여 ‘부유하시지만 가난해지신’ 그리스도의 역동에 구체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다시한번 포기하는 것은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며, 도덕적 미덕을 얻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탄생, 삶, 사명, 죽음과 부활에서 보여지는 하느님의 너그러운 자기-내어줌의 표양을 따라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놓아버리는 행위이다.


[원출처] <가난과 즐거움-프란치스코회의 전통>, 월리암 J. 쇼트(프란치스코회)
[출처] <참사람되어> 200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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