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은 높게 흐르지 않는다
상태바
강물은 높게 흐르지 않는다
  • 김유철
  • 승인 2017.10.23 13: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유철의 Heaven's door]

미술평론가보다는 문화재 답사가로 더 많이 알려진 유홍준은 쇠귀 신영복선생의 글씨체를 ‘유배체’라고 불렀다. <진실, 광장에 서다>의 저자 김정남은 선생을 잘 닦여진 ‘하얀 옥’같은 사람이라 표현했다. 과연 20년 20일의 감옥-선생은 국립대학이라 칭했다-생활이 사람의 영혼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선생의 말대로 ‘처음처럼’ 그것을 유지하며 절제된 감정과 몸가짐을 유지할 수 있을까? 결국 선생은 감옥을 수도원삼아 ‘고요한 달관’에 이른 것일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햇빛출판사

하얀 옥 같은 사람, 신영복

18년의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수많은 역작을 남긴 다산 정약용 또한 신산스런 세월을 보냈지만, 정쟁이 난무한 한양을 떠난 자연속의 유배생활과 무지막지한 독재정권이 강제로 가두어 놓은 좁은 감옥생활은 질적으로 다른 법이다. 겨울의 독방보다 여름의 다인방은 말 그대로 징역살이의 표본이다. 갑자기 박근혜가 말했다는 ‘차고 더러운 감방’이 생각나지만 그것은 한줄기 잡스런 생각으로 접어두고 싶다. 신영복 선생이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작은 엽서에 적어 집 안의 계수씨에게 보낸 글의 부분이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여름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도의 열 덩어리로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 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으로 만듭니다.”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관계론’

이런 진솔하고 울림이 있는 글들이 모여 1998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우리에게 전해졌다. 선생은 감옥에서 만난 숱한 수형자들의 사연을 쉽게 흘려듣지 않은 모양이다. 결국 그는 스스로 표현한 ‘찬벽 명상’(새벽에 밭에서 무를 뽑듯이 몸을 일으켜 찬 벽에 붙어서 하는 명상)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가는 모두의 정체성이며 인간의 문명인 ‘관계론’을 후학들에게 글과 글씨로서 표현하고 전했다.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배타적 존재는 없다. 심지어는 현대과학자들 마저 ‘궁극적인 존재성’은 없으며 ‘존재할 수 있는 확률과 가능성’으로 존재함을 입증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선생이 말하는 관계론의 정수이다.

관계론은 선생이 독창적으로 해석한 이론이 아니다. ‘한 처음’의 이름 지어 부를 수 없는 하느님과 ‘공즉시색, 색증시공’을 설한 부처의 가르침도 인간과 세상은 모두 그런 관계 안에 있음을 일찍이 전한 것인데, 인간은 스스로 배타적, 개별적으로 존재하고 그것을 유지하려 부단히 강조하고 강화하는 것을 개인의 살 길로 선택하고 달려간 것은 아닐까? 더욱이 불행하게도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는 그런 선택과 질주를 ‘효율성’과 ‘목표달성’과 ‘세계화’란 유혹의 이름마저 붙인 채 더욱 더 개별성-자기 파이 키우기- 강화에 매진한 모습이다.

결국 그런 일들은 모든 사람의 욕망을 부추기고, 끝내 자신도 원치 않는 욕망에 대한 끝없는 갈증 속에 부자와 1등이 행복의 지름길인양 스스로를 속이며 양극화의 길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야말로 예수가 십자가에서 보던 세상과의 평행이론이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신영복 선생

우리 시대의 진정한 공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관계인 것처럼 기쁨과 고통 역시 관계 안에 있다. 자신의 고통보다 자신으로 인해 타인이 고통을 느낀다면-선생은 그것을 감옥에 들어온 젊은 신랑이 바깥의 새색시가 느낄 고통에 매일 자책하는 것을 보면서 말했다-그것은 자신의 고통보다 몇 배의 아픔을 동반하는 고통이다. 우리는 그런 사회적 관계망 안에 있다. 아마 우리 시대의 진정한 공부라는 것은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이라고 선생은 간곡하게 말한다.

선생은 20년 긴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하나같이 장편소설 같은 삶을 살아온 이들이었을 것이다. 온갖 잡범(?) 가리지 않고 그들에게서 나오는 켜켜이 쌓인 기구한 삶의 질곡들을 선생은 공부의 교본으로 삼았다.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라는 노랫말처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서로의 목발로 삼자고 선생은 낮게 말한다.

세상은 혼자 갈 수 없는 것이고 더욱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멀리 갈 수 없다. 함께 멀리 갈 수 있는 길은 머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있으며 그 가슴에 있는 것이 발로 내려올 때 그것이 진정한 공부라고 선생이 남긴 질박한 글 속에서 말한다. 그 글을 보다가 십자가에 걸린 예수의 발을 문득 쳐다봤다. 숱한 삶의 현장을 찾아다니던 예수의 그 더러운 발.

“captin, my captin”

선생은 독방시절, 하루 두 시간 동쪽에서 서쪽으로 지나가는 햇볕을 잊지 않는다. 당시 그에게 하루는 24시간이 아니라 두 시간의 햇볕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그 두 시간이 주는 위로 역시 그는 평생을 품었다. 큰 아픔에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도처에 있는 작은 기쁨에 인색하지 말라는 선생의 말은 자본주의가 주는 거품과 환상을 벗어나는 길이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단순소박한 것이 영원한 진보라는 화두가 선생의 말과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가 갇혀있는 틀을 깨뜨릴 때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을 선생은 ‘더불어 숲’이 되어 사는 모습이라 했다.

강물은 높게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선생은 낮게 ‘강물처럼’ 흘러서 바다로 가자고 말한다. 강물이 만나는 모든 돌멩이를 쓰다듬듯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소통하는 것이 자비로움의 길인 듯하다. 이제 쇠귀 신영복선생은 이승의 인연을 다하고 사라졌지만 늘 그가 생각날 때면 책상위로 올라서서 외친다. “captin, my captin, Thank U!"

 

김유철
시인. 한국작가회의.
<삶 예술 연구소> 대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