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계 병원과 학교마저 '강도의 소굴'이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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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계 병원과 학교마저 '강도의 소굴'이 될 수는 없다
  • 김경집
  • 승인 2017.10.23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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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집 칼럼]

누구를 위한 병원이고 학교인가?

교회는 병원, 학교, 고아원, 양로원 등을 운영한다.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다. 복음을 실천하고 전파하는 동시에 신자들에게 양질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교회가 그런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에 대해 많은 신자들이 자부심을 느낀다. 그런 실천을 위해 수많은 신자들이 나름대로 사정에 맞춰 헌금하고 봉헌했다. 그것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 교회의 사회적 역할의 대표적 사례며 마땅한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나 처음에는 분명 좋은 뜻으로 시작한 이런 시설들이 시간이 흐르고 타성(?)에 빠지면서 부작용들이 나타난다. 사람 사는 곳이고 그런 이들이 모여 함께 있는 곳이니 당연히 그런 일 생긴다. 그러나 그런 자잘한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과연 지금 이런 다양한 시설들이 제대로 그리고 복음적 가치를 실현하고 있는지 거듭 물어야 할 시점이다.

거의 모든 곳에 예외 없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다. 경영합리화, 물론 필요하다. 그런 핑계로, 그리고 사회적 흐름 운운하면서 청소나 경비 등은 거의 예외 없이 용역으로 아웃소싱한다. 그러나 그것은 경영합리화를 내세운 꼼수에 불과하다. 언제나 대가는 약자들의 몫이다. 불필요한 예산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그러나 그 첫 대상이 약자들이 아니라 강자들이어야 하고 굳이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면 강자들이 그것을 맡아야 한다. 그들은 조금 줄여도 사는 데에 큰 지장이 없다. 그러나 약자들에게 절감 요인을 전적으로 떠넘겨 그 비용을 수입에서 줄이면 그들에게는 당장 생계 자체의 위험에 직면한다.

과연 교회가 운영하는 병원이나 학교가 이른바 경영합리화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고 복음적으로 대처하고 있는지 먼저 물어야 한다. 물론 학교나 병원이 자선단체는 아니다. 많은 돈이 필요하고 지속적으로 운영 비용이 든다. 그러나 그 절감의 몫을 거의 전적으로 그리고 우선적으로 약자에게 떠넘기는 것은 그 자체로 반복음적이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교회는 차라리 학교나 병원에서 손을 떼는 게 옳다.

불편한 진실은 외면한다고 해서 지워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냉정하게 인식하고 복음적으로 대처해서 교회답게 행동해야 한다. 그런데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생존권을 위해 권리를 요구하면 자신들은 모르는 일이니 용역회사에서 따지라거나 미운 털이 박히면 아예 그들을 주저 없이 해고하고 다른 이들과 계약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다른 병원이나 학교가 다 그런데 교회에서 운영하는 곳이라고 해서 외면할 수 없다는 말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이다. 그러려면 때려치우는 게 차라리 낫다. 아무리 더 큰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게 약자의 불행을 담보로 이뤄져서는 안 된다. 그게 최소한의 양심이고 정의다. 그게 복음정신이다.

교회에서 출자하고 운영하는 병원이나 학교도 시간이 지나면 별도의 법인으로 독립하는 까닭에 교회에서 일일이 간섭할 수 없다고 변명하는 것도 옳지 않다. 세상이 그런 걸 교회인들 어쩌겠느냐고 투정할 게 아니다. 그러려면 재단에 교회의 인원을 파견하고 직원을 채용할 것도 없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착취당하고 비인격적 대우를 받으며 불안한 삶을 사는데도 무관심 무반응이라면 성서에 나오는 악인과 무엇이 다른가. 과연 누구를 위한 병원이고 학교인가?

 

사진출처=pixabay.com

교회는 사회의 모범이어야 한다

정말 교회인들 어쩌겠느냐는 반문이 타당하기는 한 것인가? 도대체 그럴 거면 왜 교회에서 그걸 운영하는지를 먼저 되물어야 한다. 물론 그런 단체나 기관도 경영을 외면할 수 없다. 현실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 말 못할 어려운 점이 있을 것이다. 독립한 법인이니 교회와 신자들이 계속해서 지원할 수도 없다. 심지어 때로는 아니 할 말로 ‘본때를 보여주고’ 싶지만 종교라는 배경 때문에 눈치가 보여 참고 있다고 항변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합당한 변명일 수 없다. 오히려 제대로 경영하고 비합리적인 요소들을 솎아내며 상대적으로 강자 지위의 사람들이 조금씩 양보해서 그 사람들을 정규직으로 고용할 수 있다는, 혹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고용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는 가치와 신념을 마련해야 한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어렵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나라가 구제하지 못하면 교회가 그것을 해야 한다는 말도 성립한다. 그게 적극적인 ‘복음 실천의 사회화’다. 교회가 운영하는 병원이나 학교가 불필요한 예산을 줄이고 강자가 조금씩 양보해서 비정규직을 정식 직원으로 채용하는 모범을 보임으로써, ‘이걸 봐라. 의지와 노력만 있다면 못할 일도 아니다. 당신들도 의지를 갖고 노력해보라’며 이 모진 사회에 죽비를 내리치고 희망의 등대 불을 밝혀야 한다. 그것은 기회지 부담이 아니다. 어쩌면 그게 바로 오늘 우리의 교회가 운영하는 병원이나 학교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난 1997년 IMF사태 이전만 해도 학교나 병원의 청소미화, 경비, 영선 등을 담당하는 노동자들은 직접 고용한 정식 직원이었다. 물론 저임금이었지만 그들은 노동조합의 정식 조합원이었고 박봉이지만 승진과 임금 인상의 기회가 보장되었다. 그러던 게 외환위기 이후 이른바 구조조정을 통해 급작스럽게 아웃소싱이 만연하면서 슬그머니 혹은 불가피하게 따르게 되었던 점을 기억해야 한다. 처음부터 그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아니었다.

솔직히 이 나라 사회에서 97년 위기를 겪은 것은 노동자들이 게으르거나 서민들이 낭비한 결과가 아니다. 이른바 사회지도층들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겪은, 자초한 위기였다. 그러나 그들은 책임지지 않았고 고통은 노동자 서민들에게 떠넘겼다. 그리고 위기를 넘기고 이익이 커진 것은 모두 제 입으로만 털어넣었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원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 그동안 그 약자들이 겪었던 고통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이고 의무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서 설립한 삼육대학교는 매우 모범적인 사례다. 그 대학의 청소미화원과 경비원은 모두 정식 직원으로 신분이 보장되고 합리적인 급여를 받는다. 불가능한 일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고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그걸 본받아야지 탐욕적인 시장의 논리만 내세우며 비인격적인 일들을 태연하게 자행하는지 모르겠다. 그런 모범적 사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면하면서 돈 버는 병원이나 등록금으로 장사하려는 대학교 똑같은 짓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교회와 신자 모두 자문해야 한다. 교회가 복음적이지 못한 방식으로 병원이나 학교를 운영하면서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옳고 좋은 일을 한다고 자랑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자문해야 한다. 그건 자랑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정의의 실천이 복음의 못자리다

교회가 건강한 시장의 기능을 수행할 때 비로소 사회도 건강해지고 도덕적으로 진화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사랑의 실천이고 바람직한 사회적 책무다. 그런 시장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는 게 교회여야 한다. 교회는 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하는 곳이기에 ‘빛과 소금’이다. 그런데 약자의 등에 서린 ‘소금꽃’을 외면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를 스스로 양산하고 있다면 그건 이미 교회가 아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가장 먼저 어디로 갈 것인가? 교회? 대형병원? 학교? 천만에! 나는 예수님은 바로 해고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달동네에 재림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베들레헴의 가장 누추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처럼 말이다. 더 이상 부끄러움도 모르는 뻔뻔한 교회가 되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과 기능을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 처음에는 좋은 뜻으로 시작했던 것이 인간의 욕망과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려 삿된 일이 행해지는 교회는 더 이상 존재의 의미가 없다. 교회가 운영하는 병원이나 학교에서 그런 일이 자행된다면 그것은 득이 아니라 독이다. 해독제도 없는 독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자신들은 여전히 빛과 소금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양의 탈을 쓴 늑대보다 더 위험하고 무서운 건 바로 자신이 양인 줄 착각하는 늑대다. 불행히도 지금 우리 사회의 많은 교회와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교회가 운영하는 병원과 학교에 그런 이들이 제법 있는 것 같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상인들을 책망하고 쫓아낸 것은 성스러운 성전에서 ‘장사를 했다고’ 막무가내로 화를 내며 야단치고 엎어버린 게 아니다. 순례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시작한 시장이었다. 그러니 처음에는 좋은 뜻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갈수록 탐욕의 눈을 뜨자 그게 큰 이권 사업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책망한 것이다.

“성서에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구나!”(마르 11, 17)는 예수님의 나무람은 지금 우리에게 고스란히 적용된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은 모든 이들에게 똑같이 열려있는 집이다. 우리의 삶도 기도다. 따라서 생계도 기도의 삶이다. 그런데 약자의 팔목은 가볍게 비틀며 강자의 이익만 꾀하는 점이 조금이라도 삿되게 깃든 곳이라면 그게 병원이건 학교건 ‘강도의 소굴’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제발 우리 모두 심장의 굳은살을 잘라내자. 복음서 줄줄 꿰고 매일 미사 참례한다 한들 그런 어리석고 못된 짓 비난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 성전에서 쫓겨난 장사꾼과 다르지 않게 될 것이다.

 

김경집 바오로
인문학자,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생각을 걷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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