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 "나는 라틴어와 그리스말을 공부했지만 이 농부의 알파벳은 전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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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 "나는 라틴어와 그리스말을 공부했지만 이 농부의 알파벳은 전혀 모릅니다"
  • 죠안 치티스터
  • 승인 2017.10.15 18: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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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아르세니우스 원장이 한 에집트 노인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보고 원장에게 말했다: “아르세니우스 원장님, 당신과 같은 사람이,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조예가 깊은 당신이 하찮은 농부에게 당신 생각을 묻다니요?” 그러자 아르세니우스 원장이 말했다, “그래요, 나는 라틴어와 그리스말을 공부했지만 이 농부의 알파벳은 전혀 모릅니다.”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꾸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우리 모두는 늘 그런 태도 바꾸기를 하고 있다. 겉모습을 바꾸려고 우리는 단식을 한다. 일상생활을 바꾸기 위해서 스키를 타거나 낚시 혹은 볼링도 한다. 또 떠들썩한 환경에서 벗어나려고 시골로 이사를 간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자리, 사는 집, 관계, 생활방식을 바꾸고 또 바꾼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대부분 매우 피상적인 변화일 뿐이다. 진정한 변화는 그런 것보다 훨씬 더 깊은 것이다.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 바로 회심인 것이다.

메타노이아, 회심은 수도회의 세계관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오래된 개념이다. 초기의 탐구자들은 도시의 영적인 무미건조함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하여, 하느님의 것들에 집중하기 위하여 사막으로 갔다. “세계로부터의 탈주”, 곧 주변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 체제와 오염된 가치관으로부터 떨어짐이 참다운 관상가의 표지였다.

물질주의에 물들고 그것 때문에 질식상태에 있는 세계 안에서 관상가가 되기 위해서 회심은 근본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에 관한 회심인가? 사막으로? 아니다. 목적은 마음의 순결함, 올곧은 추구, 삶에 대한 집중이었다. 수세기 동안, 베네딕또회의 규칙이 나타나고 수도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더욱 더 분명해 졌다. 즉 회심은 지리적인 것이 아니라는 대답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비상은 한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옮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관상가가 되기 위하여 있는 자리에서 떠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나병환자와 아이들, 병자와 제자들 그리고 호기심에 가득 찬 군중들과 따르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던 먼지투성이 갈릴래아 거리를 헤매었던 예수는 관상가가 아니었다.

치유자, 예언자, 설교가, 교사였던 예수는 그런 역할들 때문에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던 것이 아니었다. “세계로부터의 비상”은 그저 어떤 한 종류의 태도를 벗는 것이며 하나의 의식을 또 다른 의식으로 바꾸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오히려 정반대로 우리는 지금 있는 상태에 다른 마음의 자세로 그냥 머물러야 한다. 우리는 전 세계의 선을 생각하면서 일자리에 있어야 한다. 마음 속에 대중을 생각하면서 이 사회에 있어야 한다. 지배보다는 발전을 지향하는 방식으로 집에 있어야 한다. 베네딕또가 원했던 것은 마음의 회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회심이란 어떤 것에 대한 회심인가?

대답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모든 위대한 종교적 전통을 볼 때 개념은 명료하다: 즉 관상가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를 우주와 하나되게 하고 하느님의 전 우주적 목소리와 조화를 이루게 만드는 의식을 향해 회심해야 한다. 우리는 삶의 모든 작은 조각 하나 하나에서 거룩함을 알아보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빈약하고 조작적인 세계에 아름다움을 탄생시켜야 한다. 우리는 인간적 공동체를 회복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과 일치하며 성장해야 한다. 우리는 잔혹한 사회 속에서 치유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관상의 기반, 관상의 열매, 관상의 목적이 다 되어야 한다.

관상적 삶이란 늘 한결같이 더 관상적이 되어가는 삶이다. 그것은 세상 속에서 다르게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 안의 어떤 것이 변화되어야 할 것인가? 우리를 우리자신의 유일한 중심이 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은 다 변화되어야 한다. 우리는 단순히 발전 되어가는 한 작업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우리의 모든 단계들, 위치들, 성취들 그리고 권력이란 모든 곳, 모든 사람 안에 하느님으로 충만되어있는 세계가 우리에게 가르쳐야 할 지혜를 대체할 수 없으며 그런 생각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드는 모든 것들은 다 바뀌어야한다. 우리 안의 하느님의 목소리를 죽이는 모든 것들은 다 내버려야 한다.

관상가가 되기 위해서는 종교적 예식과 실천을 매일 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우리는 삶을 살기 시작해야 하며 사람들과 함께하고 상황을 받아들이며 하느님의 현존의 소리가 매 순간 살아있게 하는 방식으로 악에 선을 가져와야 한다.


[원출처] <Illuminated Life, Monastic Wisdom for Seeker of Light>, Joan Chittister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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