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 우주에서 역사를, 영원에서 오늘을 보는 묵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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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 우주에서 역사를, 영원에서 오늘을 보는 묵시문학
  •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7.10.16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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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 새 예루살렘-2
사진출처=pixabay.com

엄격히 말하면, 계시록은 구약성서의 예언서적인 형식의 기준으로 쓰여진 예언서가 아니다. 이 책은 구체적인 예언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예언적인 언급을 적게 담고 있다. 이 책은 “묵시적”이라고 하는 아주 특별한 문체로 쓰였다. 계시록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잘못 해석하지 않으려면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묵시적 형식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마치 우리가 하늘에서 펼쳐지는 광대한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묘사한다. 우리에게는 ‘영원’이라는 관점으로부터의 비젼이 주어진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가 당장 당면한 문제에 고심하고 있을 때 종종 필요하다. 작가는 우리들에게 있는 어떤 문제 보다 하느님께서 더 크다는 것을 보여주시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더 큰 비전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이러한 일을 하기 위해 작가가 사용한 문학적 기법(이러한 기법은 묵시적 문학에서 아주 흔하다)은 전체 이야기를 과거시제로 쓰는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났다, 그런 다음 이런 일이 일어났다, 또 그런 다음 이런 일이 일어났다 등등 마치 묘사된 모든 일이 이미 일어난 것처럼 지나간 역사의 형태를 띈다.

우리는 구약의 예언자들의 비전에서도 이와 똑같은 것을 본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멸망과 귀양살이로부터의 귀환(그들이 언제 썼느냐에 따라)을 마치 그런 일들이 이미 일어난 것처럼 확실하게 보았다. 이런 종말론적인 관점은 하느님께서 영원이라는 관점으로 미래 사건을 다 보시고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다 아신다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일이 이미 다 결정되었고 사건의 진행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저자의 의도가 아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요한은 여기서 박해시대의 종말과 하느님의 승리가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확실히 본다. 요한이 이렇게 한 것은 사람들이 운명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굴복하지 않게 하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용기 있는 믿음을 주어 악의 힘을 물리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묵시적인 문학 형태는 우주적인 규모로 인간 드라마를 묘사하기 때문에 역사의 의미를 전달하는데 아주 적합하다. 인류는 평화와 행복을 얻으려고 엄청난 사건들 한가운데서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들은 엄청난 곤란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데 그 와중에서 마치 인간의 발전이 두 걸음 전진하고 세 걸음 후퇴하는 것 같이 보이게 하는 좌절을 만나게된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역사의 주님이시며 육화한 주님의 권능은 정복될 수 없기 때문에 인류의 구원으로 향한 전진은 확실시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는 이미 얻어진 것이고 이 승리의 표징이 부활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과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성서의 맨 처음 부분에서부터 우리는 자신의 사악함에 빠지고, 자만심으로 착각을 하며 불화로 속을 끓이고, 하늘을 정복하여 자신이 신이 되려고 하려다 실패한 사건으로 혼란스러워진 인류가 혼동 속에 있음을 볼 수 있다. 실락원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은 인간으로 하여금 수 세대에 걸쳐 질서 있는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을 하도록 촉구한다. 그러나 인류가 어떤 진전을 할 수 있는 것은 늘 하느님의 힘에 의해서이다. 이스라엘 왕궁에서, 하느님의 권능은 한 도시를 세우는데 성공했다. 다윗은 이 도시 이름을 “평화의 도시”라는 의미를 가진 예루살렘이라고 불렀다.

비록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서 세워졌지만 주님을 버리고 인간의 힘에 의존할 때 세속적인 예루살렘은 파괴된다. 하느님의 용서하심을 통해서 재건되었으나 인류가 추구하던 평화의 낙원은 결코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예루살렘은 희망의 상징, 즉 인류가 고지식하게 허우적거리며 목표로 삼고 나아가는 상징으로 남는다.

이렇게, 묵시록 마지막 장에서 예루살렘이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손으로 세워진 도시가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하느님의 도시이며 인간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평화의 선물이다. 이것은 인류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 진 것이다. 하느님의 성공은 절대적인 은총이다. 하느님의 평화는 영원한 사랑이라는 선물이다. 낙원은 애초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과 아주 똑같은 방식, 즉 선물로서 우리에게 다시 주어졌다.

새로운 예루살렘은 하느님과 인간이 올바른 관계를 맺고있는 완벽하게 질서 있는 사회를 상징한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통치하시고 사람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사는 하느님의 나라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마침내 지상 위에서 온전히 육화되는, 평화의 도시다. 그곳은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몸이 쉬는 안식처이다. 하늘에서 큰 소리로 말한다: “세상 나라는 우리 주님과 그분이 세우신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고 그리스도께서 영원무궁토록 군림하실 것이다”(묵시록 11,15).

그러나 그것은 오직 상징주의로 가득찬 책의 마지막 상징일 뿐이다. 고대인들에게 거룩한 의미를 주고있는 7이란 숫자가 하늘과 땅의 일치를 상징하며, 자주 등장한다: 지상의 일곱 개의 도시, 일곱 개의 봉인된 두루마리, 일곱 개의 나팔소리와 일곱 번의 재앙 등이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아들, 하느님의 어린 양, 왕 중의 왕, 교회의 신랑으로 묘사된다. 인류는 땅의 백성과 나라들로, 어린양에게 충실한 천사들로, 하느님 찬미의 노래를 부르는 천상의 성인(聖人)들로, 그리고 그리스도를 세상에 오게 한 여인으로 묘사된다. 제 12장에서 그녀의 아이는 하늘로 불려 가고, 거기로부터 여인과 그녀의 다른 자녀들을 공격하는 악마와 대항해서 끊임없이 전쟁을 한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상징을 사용할 때 상징의 정확한 의미를 정착시키는 것이 항상 가능하지는 않다. 어떤 때는 상징하는 여인이 마리아이고, 어떤 경우에는 박해받는 교회이다. 때때로 그리스도가 예수님인가 하면 어떤 때는 승리를 거둔 교회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악에 대한 상징도 천상과 지상의 파괴적인 힘을 나타내면서 서로서로 얽혀들어 간다. 매춘부의 도시 바빌론은 로마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매춘, 타락, 우상숭배가 일어나는 모든 장소를 의미하며 이러한 곳들은 결국 바다로 던져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 온 지구를 덮을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으로 대체될 것이다.

비록 책 전체에서 전쟁이 줄이어 일어나고 있고, 기근과 유행병이 만연하며, 죽음과 파괴가 창궐하나, 종말이 온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느님 편에서 볼 때 이런 것들은 모두 다 과거시제이다. 이미 승리는 성취되었다: 단지 완전한 모습으로 드러내 보일 필요만 있을 뿐이다. 이처럼 선과 악의 상반되는 진영은 결코 동등하지 않다. 그러므로 사탄이 승리하고 그리스도가 패배한다는, 아무리 무섭고 압도적인 박해가 있더라도 위험은 절대로 없다. 묵시 문학이 불가능의 시대에 위로하고 희망을 주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원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신약>,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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