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만한 인간성의 모상인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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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만한 인간성의 모상인 마리아
  • 월리암 J. 쇼트
  • 승인 2017.10.16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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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즐거움-10

성모무염시태 교의가 1854년 12월8일, 장엄하게 선포되었을 때, 많은 프란치스코 회원들은 이 사건을 단지 마리아에게만 아니라, 둔스 스코투스에게도 명예로운 사건으로 보았다. 죄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육화하신 분이 그리스도를 말했던 스코투스는, 나자렛의 마리아가 죄 없이 수태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마리아를 온전하고 충만한 인간성의 모상으로 생각하는 스코투스의 관점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하고자 한다.

죄 없이 수태된 마리아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무언가 마리아에게 없는 것이 있다고, 다시 말하자면 ‘원죄’가 없다고 자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죄란 무엇인가 결핍된 것이라고, 하느님과 닮지 않은 상태라고 말하기도 한다. 무염시태의 교의는 마리아가 본래 인간의 상태,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기로 창조된 상태, 즉 하느님의 명료한 모상처럼 충만하게 그리고 선명하게 그런 모습임을 기념하고 있다.

왜냐하면 스코투스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먼저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을 육화하신 말씀의 살아있는 모상으로 보았다. 이런 스코투스의 관점에 의하면 (우리는 이러한 관점을 그리스도의 최우선성 혹은 그리스도 중심주의라고 부른다), 창조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모형으로 삼은 것이다. 그 인성이 창조의 목적이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하여, 그 인성을 위하여 그 인성 안에서 만들어진다. 그분이 실제로 아담이고, 첫 번째 아담이다. 창세기의 아담은 그분의 모상일 뿐이다. 창세기의 시작은, 죄 이전에 세상과 인간의 이야기는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모상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의 인간적 모습에 따라 계획하시고 아드님이 ‘여인으로부터 태어나기를’ 의도 하신다. 계획을 세우는 것을 현세적 은유의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아드님이 인간으로 육화될 것이라고 결정한 후, 삼위일체 하느님은 다음으로 하느님과 인간성을 나누는데 초대될 여성을 선택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여성은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 아드님의 가장 선명한 모상이고, 가장 적절한 모상이어야 한다. 그 여성은 온전하고 충만한 인간일 것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이 의도하신 대로, 그 여성은 온전한 인간존재로 살았던 여성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우리는 창세기의 시작으로 옮겨갈 수 있다. 하느님의 논리는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뒤로 거꾸로 움직이는 것 같다. 하느님은 신약과 함께 시작하고 이어 구약의 시작으로 움직인다. 크리스마스는 논리적으로 창조 이전에 온다. 그리스도는 아담에 앞서 있고 마리아는 하와보다 앞서 있다.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먼저 의도했던 것이 완성된 마지막 것이다.’

이 논리를 따라가면, 그리스도가 먼저 오고, 그 다음에 마리아, 이어 아담과 하와가 온다. 창세기 이야기를 읽어감에 따라,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온전한 하느님 모상이 변하는 것을 본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온전한 모상 이외에 다른 것이 되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런 결심은 인간존재인 그들을 실제보다 못한 모습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것은 온전한 인간성의 거부였으나, 그들의 선택이었고 하느님은 그런 그들을 막지 않는다. 그들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그들을 자유로운 아드님의 불완전한 모상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그 선택을 ‘원죄’라고 부른다. 그리고 성경에 따르면 그 선택은 다음 세대에, 카인과 아벨에게, 그리고 이어 계속 다음세대에, 노아에 이어 아브라함에 이어 모세에 이어 다윗에게 솔로몬에게, 우리에까지 그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하느님의 모상은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희미해졌을 뿐이다. 진정한 인간성,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보는 것이 더 힘들어졌으나, 그 모상은 더럽혀진 채 아직 그곳에 남아있다.

마리아의 잉태와 함께, 위대한 계획이, 창세기 이전의 성경이 시작된다. 인간존재가 충만한 인간성으로 잉태된다. 마리아는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다. 자유롭게, 충만하게, 영혼과 육신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인간성이 마리아의 인간성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마리아의 무염시태 교의에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것이 더 낫겠다. 죄 없이 잉태된 마리아의 교의를 오히려 온전한 인간이신 마리아의 교의로 이름 붙일 수 있다. 하느님의 논리 안에서는 바로 이 온전한 인간이 우리 모두가 궁극적으로 갖추어야 할 모습이며,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

마리아는 죄 없이 잉태되었는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북 이태리 벨몬테의 수도원 경당에 거칠게 새겨져있는 글에서 발견한다. 마리아가 그곳에 그려져 있고, 스코투스가 투박한 마리아 모상의 왼편에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오른편에 그려져 있다. 마리아 위에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스코투스의 설명이 서투르게 적혀있다; ‘할 수 있다. 해야만 한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렇게 하셨다.’ 전 세계의 모든 프란치스코회 집에서 토요일 밤에 불러지는 전통적인 성가는 수 세기 동안 스코투스의 메시지를 전달해 오고 있다:

마리아, 당신은 가장 아름다운 분입니다.
시작부터 당신에게는 아무런 흠이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영광이신 분이시여 !
이스라엘의 기쁨이신 분이시여 !
우리 백성들의 자랑이신 분이시여 !
죄인들의 옹호자이신 분이시여 !
오, 마리아, 오 마리아 !
지혜로운 동정녀
자비로운 어머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를 위하여 중재해 주십시오,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원출처] <가난과 즐거움-프란치스코회의 전통>, 월리암 J. 쇼트(프란치스코회)
[출처] <참사람되어> 200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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