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묵시록, 가혹한 박해에도 멈추지 않는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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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묵시록, 가혹한 박해에도 멈추지 않는 희망
  •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7.10.08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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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 새 예루살렘

전통적으로 성서를 끝내는 책을 묵시록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현대적 번역은 그것을 ‘계시록’이라고 부른다. 초기의 명칭은 그리스어에서 유래했고 두 번째 것은 라틴어에서 왔으나 둘 모두 뜻은 같다: 숨겨진 것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묵시록은 숨겨진 무엇을 드러내는 것인데 작가는 그것을 일련의 극적이고 강력한 형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성서의 그 어느 책도 요한 계시록보다 더 많이 해석된 적이 없다. 수세기에 걸쳐 많은 작가들이 계시록의 신비스런 표상을 설명하려고 했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드디어 숨겨진 뜻을 풀 수 있는 열쇠를 찾았다고 주장했다. 보통 계시록은 각각의 표상이나 일련의 표상들을 역사상의 실제 인물이나 사건과 연결시켜서 매우 문학적인 의미로 해석되어 왔다. 오늘날까지도 이 책을 읽음으로써 세상이 끝날 때 무엇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현대의 성서학자들은 이와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그들은 지금 우리가 우리와는 아주 다른 정신구조와 다른 형태의 문학을 다루고 있는데에 이 책의 생소함 자체가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 책은 마치 판독을 해야 할 비밀 기호 같은 복잡한 상징 뒤에 자세한 내용을 숨기기를 원했을지도 모르는 현대작가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작가가 때때로 환상적인 형상과 상징주의를 사용해서 간단한 주제를 표현하는 아주 오래된 집필 형식이다.

 

우리가 묵시록의 주제를 단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박해가 진행되는 와중에 흔들림 없는 믿음은 미래의 영광에 대한 확실한 희망이 있을 때 가능하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대립이 아무리 악화되더라도 선의가 결국에는 악을 이겨 승리 할 것이다. 신학적 표현을 빌리면: 사탄이 지금은 이기는 것 같이 보이지만 하느님의 사랑과 권능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다.

이 책은 네로 황제와 도미티안 황제에 의한 그리스도인들 박해 후인 1세기 말 즈음에 쓰여졌다. 그리고 그 당시는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아직도 불법이었고, 극심한 박해의 중간 중간에 소강상태도 있었지만 대립이 끝날 것 같은 조짐은 없었다. 기상청은 하늘이 개이기 전에 폭풍우가 더 할 것이라고 예보한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폭풍우가 과연 지나갈 것인지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묵시록 저자는 의심치 않았다.

묵시록 저자는 자신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한 그리스도교인 예언자지만, 독특한 문체로 미루어 보아 그가 제 4복음서의 저자인 요한과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이 책은 사도 요한이나 그의 제자 중에 한 사람에 의해서 쓰여 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지금 형태의 책은 어느 “학파”(즉, 몇 명의 저자)에 의해서 쓰여졌는데, 이 책을 요한의 예언적인 비전에 근거해서 썼기 때문에 성 요한의 업적으로 돌린 것일 수도 있다. 작가는 자기가 소아시아 서부해안에 있는 파트모스섬에 갇혀있을 때 하느님께로부터 이 비전을 받았다고 말한다(묵시 1,9).

제2장, 제3장에서 요한은 최근에 있었던 박해 때 같이 고통을 당했던 소아시아 서부 끝에 있는 일곱 개의 교회에 예언을 한다. 그리스도교 신앙 초창기의 흥분은 마른 가지에 불붙듯이 퍼져 나갔으나 침체되었다. 첫 세대 그리스도교인들 생전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처음의 희망이 희미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이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진다고 믿었던 이들은 아직도 아버지가 그분의 아들의 정당함을 밝혀 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묵시록은 투쟁이 한창일 때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그 투쟁의 의미와 결과에 대해서 말하려고 쓰여진 것이다. 책 전체를 통해서 악과 선 사이에 전쟁이 계속된다. 그들 주변은 온통 전쟁이다. 그래서 저자가 전쟁을 묘사하기 위해서 쓴 상징은 거창했다. 천사와 용이 하늘에서 전투를 벌인다. 폭풍이 노도와 같이 하늘을 가로질러 간다. 별들은 떨어지고 산들은 산산조각이 난다. 전쟁, 재난, 기근이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는 등 지구에게 상처를 준다. 이런 대 우주적인 드라마는 일어나고 있거나 일어날지도 모르는 최악의 상태를 상징한다.

만일 바오로가 이런 교회들에게 썼다면 그는 아마도 다음과 같이 썼을 것이다: 부활에 대한 희망 안에서 예수님께서 겪은 고통을 감내하며 그리스도의 몸은 세상에서 십자가에 못박혔다. 요한도 같은 비전을 가지고 있었으나 훨씬 더 고대 중동식으로 환상적이고 변화무쌍한 비유를 들어가면서 묘사한다. 그는 예수님께 일어났던 일이 육화한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요한은 예언자적인 통찰력으로 수난 뒤에 부활이 온다는 것을 본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일으키셨기 때문에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람들도 똑같이 구원하실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요한은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과 아주 비슷하다. 그들처럼 요한은 과거, 현재, 미래를 하나의 통찰의 빛으로 바라본다. 그는 과거를 들여다보고 하느님의 활동 양식을 본다. 그는 현재를 보고 과거에 하느님께서 하신 똑같은 방식으로 일하고 계심을 안다. 그는 미래를 들여다보고 하느님의 방식이 계속되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나서 그는 하느님께서 과거에 하셨던 것을 하느님께서 지금 하고 계시며 앞으로 계속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현재를 향해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변하시지 않는다; 변하는 것은 우리일 뿐이다. 하느님께서는 약속을 끝까지 지키신다. 그분은 예수님을 일으켜 세우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이미 완성하시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확실히 올 구원을 위해서 하느님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원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신약>,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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