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머튼 "글쓰기는 침묵으로 통하는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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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머튼 "글쓰기는 침묵으로 통하는 입구"
  • 한상봉
  • 승인 2017.10.08 23: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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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Merton, 1915-1968 신비주의와 저항의 미학, 토마스 머튼-2

토마스 머튼은 수도원에서도 평화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혼란스런 세상에서 내가 설 곳은 어디인가? 물었습니다. 그는 26년 동안 수도원에서 침묵 속에 살면서 글을 통해 자기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리포터로 살았을 뿐 아니라 세계를 관찰하는 리포터로 살았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복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다는 점이지요.

내면을 비추는 리포터, 토마스 머튼

그는 수도원에서 쓴 수많은 편지와 일기를 빼고서도 35권 이상의 책을 썼습니다. 일기는 1942년부터 1954년까지 쓴 <요나의 표징>, 그리고 1956년부터 1965까지 쓴 <죄많은 방관자의 억측>이 있는데, <요나의 표징>은 홀로있음에 관한 글이며, <죄많은 방관자의 억측>은 세상과 인간에 대한 연대감에 대해 묵상한 것입니다. 이처럼 머튼은 자신의 고독을 발견하고 나서야 자기 세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었습니다.

<칠층산>을 출간하고나서 갑자기 명성을 얻은 토마스 머튼은 계속 글을 써야 했으며, 누구보다 바쁘고 쉴 틈이 없었고, 소란스런 상황에 접하게 되었다고 해요. 1940년에서 1950년 사이에 수도원의 수도자 수가 몇 배로 불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두고 머튼은 “침묵과 홀로있음을 사랑하는 270명의 수도자들이 70명을 위해 세워진 건물에 처박혔다”고 <요나의 표적>에 적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새로운 훈련과정, 새로운 건물, 새로운 재단 설립, 대화와 논쟁, 토론과 강의, 많은 트랙터와 불도저들, 분주한 수도자들의 들고남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본인이 정말 순수한 관상의 삶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인지 의심했습니다. 그럼에도 수도원장과 영적 멘토는 그에게 더 많은 글을 쓰라고 격려했죠. 이 과정에서 홀로있음에 대한 자신의 갈망이 혹시 자기 편의주의나 자기 본위의 욕망이 아닌지 묻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는 “관상을 위해 사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머튼은 침묵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침묵은 양선함입니다.
마음이 상했지만 답변하지 않았을 때
내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을 때
내 명예에 대한 방어를 온전히 하느님께 내 맡길 때
바로 침묵은 양선함입니다.

침묵은 자비 입니다.
형제들의 탓을 드러내지 않을 때
지난 과거를 들추지 않고 용서할 때
판단하지 않고 용서할 때
바로 침묵은 자비입니다.

침묵은 인내입니다.
불평 없이 고통을 당할 때
인간의 위로를 찾지 않을 때
서두르지 않고
씨가 천천히 싹트는 것을 기다릴 때
바로 침묵은 인내입니다.

침묵은 겸손입니다.
형제들이 유명해지도록 입을 다물 때
하느님의 능력의 선물이 감추어졌을 때
내 행동이 나쁘게 평가되든 어떻든 내버려둘 때
바로 침묵은 겸손입니다.

침묵은 신앙입니다.
그 분이 행하도록 침묵할 때
주님의 현존에 있기 위해 세상 소리와 소음을 피할 때
그 분이 아는 것만으로 충분할 때
인간의 이해를 찾지 않을 때
바로 침묵은 신앙입니다.

침묵은 흠숭입니다.
왜라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옹할 때
바로 침묵은 흠숭입니다.
그 분 만이
내 마음을 이해하시면 족하기에
인간의 이해를 찾지 않고
그 분의 위로를 갈망할 때
십자가의 침묵처럼
잠잠히 그 분의 뜻에 모든 것 을 맡길 때
침묵은 기도입니다.

 

글쓰기, 거룩함으로 들어가는 입구

머튼에게 글쓰기는 거룩함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실상 고독은 그 자신의 마음이 홀로일 수 있다면 소박한 일상에서도 언제든지 가능하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오늘 나는 홀로있음이야말로 나를 향하신 하느님의 뜻이며, 나를 사막으로 부르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확신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러나 이 사막이 꼭 지리적인 좌표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다만 인위적인 기쁨이 소멸되고 하느님 안에서 재탄생하는 마음의 고독이다”(요나의 기적, 59)

그러나 한편으론 여전히 절대 고독에 대한 갈망으로 카르투지오 수도원으로 옮기고 싶은 유혹을 받은 적도 있지요. 그러나 이내 그 생각을 접고, 글쓰기 역시 핸디캡이 아니라 참다운 침묵과 홀로있음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알아듣기 시작했습니다. 글쓰기는 머튼에게 거룩함으로 이르는 유일한 길이 된 것이자요. 그는 “만일 성인이 되려 한다면 나 자신이 무엇이 되었는지 종이에 옮겨야 하고... 완전한 단순성과 성실성으로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숨기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머튼은 글쓰기를 통해 자기 자신의 내밀한 감정과 생각들을 공적인 자산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수도원의 침묵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자신의 내적 삶의 리포터로 삼음으로써, 이렇게 감정과 생각마저 제 소유로 여기지 않고 비워냈을 때, 모든 것이 제게 속한 것임도 깨달았습니다. 공기와 나무, 전 세계가 하느님을 노래하고, 발 아래 땅에서 불과 음악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은 그를 가난하게도 하고 풍요롭게도 했으며, 평화와 행복을 안겨주었습니다.

1951년 5월 학생들을 돌보는 영적 지도자(수련장)가 되면서 머튼은 새로운 사막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자비'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다른 사람들의 삶 속에서 침묵을 느끼고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즉, 침묵을 얻자마자 그것을 다른 이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출처] <그대 아직 갈망하는가>, 한상봉, 이파르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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