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투스 "육화, 자유로운 하느님 사랑의 결승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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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투스 "육화, 자유로운 하느님 사랑의 결승점
  • 월리암 J. 쇼트
  • 승인 2017.10.08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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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즐거움-9

존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1266년~1308년)는 꼴로뉴에서 마흔 네 살에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옥스포드와 파리의 생동감 넘치는 신학 환경 속에서 살았고 가르쳤다. 그의 철학과 신학에 관한 저술들은 영성 저술계에 보통 나타나지 않지만, 그의 저술들이 장기적으로 프란치스코 영성에 수 세기 동안 미친 영향은 꽤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저술들 중에서 육화에 관한 성찰은 프란치스코회의 전통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스코투스에 의하면 육화의 이유는 하느님의 존재 자체에 본래부터 내재되어 있는 사랑이다. 육화는 하느님의 ‘가장 위대한 역사’이므로 바깥의 영향, 어떤 ‘우연적인 것’에 의해 일어난 일로 설명될 수가 없다. 육화의 위대함은 하느님 편에서 나중에 떠오른 생각일 수 없다. 마치도 인간의 죄라는 문제에 대한 응답으로 여겨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식으로 육화를 설명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말씀, 아드님의 육화는 최고로 높은 선이고,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며, 이 사랑은 하느님의 내적인 정체성이다. 육화에서 나타난 무한한 사랑과 비교할 때에, 아담과 이브의 죄의 결과를 수정하는 것은 ‘작은 선’이다. 만일 육화가 인간의 죄악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면, 이 해결책의 웅대함은 문제의 크기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리고 만일 인간 존재들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육화의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스코투스는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자기 나름대로 이유들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나는 그리스도의 육화가 죄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이 계획하신 것으로서 마지막 결승점에 더 가까운 선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마지막’이라는 말의 뜻은 전체 창조를 위한 하느님의 목적이나 결승점이다. 스코투스에 의하면 목적은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는 것이고 이 생명은 너무나 풍요롭기 때문에 끊임없이 표현을 하고자 한다. 마지막 목적은 반드시 삼위일체의 생명을 나누는 것이어야 한다. 삼위일체 안에서 아드님 혹은 말씀은 중심 혹은 심장이며, 삼위일체로 ‘들어가는 길’이다.

하느님의 자기-방사적인 사랑이 창조의 행위로 표현되듯이, 아드님은 하느님이 창조하시는 모든 것의 모상 혹은 형상이다. 이제, 만일 하느님의 창조에 관한 궁극적인 목적이 거룩한 생명 그 자체에 참여하는 것이라면, 아드님의 육화는 목적에 매우 가까운 ‘선’이다(‘마지막에 더 가까운’). 왜 그런가?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창조를 (인간까지 포함하여) 하느님의 내적 생명에 연결시키는 다리요 중간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창조를 위한 궁극적 목표인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가는 필요한 문 혹은 길이 된다.

이전의 신학적 전통을 숙고하면서, 스코투스는 성서학자들과 교부학자들이 육화에 관해 말한 것을 받아들이고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모든 전통은 이렇게 육화에 관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그리스도는 만일 첫 번째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구속주로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육화의 방식은 인간의 죄에 의해 영향을 받았지만 (그리스도는 구속하러 왔다), 그 동기는 자유로운 사랑의 행위였다는 의미이다.

인간은 또 다른 방식으로 구속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그분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그런 방식으로 인간들을 구속하기로 선택했다. 우리는 그분께 큰 빚을 지고 있다... 나는 그분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를 그분의 사랑으로 이끌기 위해서이고 우리가 하느님께 더 가까이 매달리는 것을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스코투스는 오늘날 우리가 보통 영성이라고 말할 수 있도록 이러한 통찰들을 발전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14세기의 프란치스코 학파에 넓게 퍼졌고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의 저술 안에 미완성으로 남아있던 직관들을 신학적 용어로 표현할 수 있도록 프란치스코 영성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직관들은 육화가 사랑의 가장 위대한 표현이며,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 사랑의 마지막 표현이고 자유로운 행위라고 말해준다.
 

[원출처] <가난과 즐거움-프란치스코회의 전통>, 월리암 J. 쇼트(프란치스코회)
[출처] <참사람되어> 200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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