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트 휘트먼 "학교, 교회, 책에서 배운 모든 것을 의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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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트 휘트먼 "학교, 교회, 책에서 배운 모든 것을 의심하라"
  • 한상봉
  • 승인 2017.10.02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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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모든 삶은 장엄하다]-22

미국은 가장 야만적인 개척 정신을 가장 천박한 자본주의로 발전시킨 짐승들과 20세기의 가장 아름다운 영혼을 낳은 희한한 나라이다. 시인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은 <풀잎>(Leaves of Grass)이라는 시집을 자기 재산으로 출판하였는데, 평론가들은 휘트먼을 “예술에 대해서는 마치 돼지가 수학을 모르는 것만큼이나 모른다”고 평했으며, 그에게 “공개 사형 집행인의 채찍을 맞을 만한 사람”이라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휘트먼은 롱 아일랜드의 외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목수였으며, 휘트먼은 열 두 살에 어느 사무소의 사환으로 일하기 시작한 뒤로, 인쇄술을 배우고, 교사가 되었으며, 어떤 의미로 보면 설교자도 되었다. 그는 노예 폐지론자이자 금주론자인 괴짜였다. 느린 몸놀림, 센 고집으로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여러 계층의 사람을 만났으며, 흥미를 가지고 인생을 관찰하면서 성공에는 마음 쓰지 않았다.

그는 신문 편집이라는 좋은 일자리를 얻은 적도 있었지만, 노예 제도에 대해서 생각을 달리하였기에 신문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 후로 휘트먼은 새로운 생활 양식을 살기 시작했는데, 생계 유지를 위해 손노동을 하고 남는 시간에 문학과 인생을 공부했다. 집안 사람들은 그를 사랑했지만 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가 한가롭게 자신의 영혼을 불러일으킬 때마다 그를 게으르다고 여겼다.

휘트먼은 삶의 다양한 모습을 알고 싶어했다. 그들과 더불어 공감하고 이야기 나누기를 바랐다. 그는 거룻배를 타는 노동자들과 함께 일했고, 버스 운전사들과 친구가 되었으며, 아메리카를 알려고 뉴올리언즈까지 천천히 여행을 하기도 했다. 그는 신중하게 독서를 했는데,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작품을 통해서도 배울 것을 찾았다. 이를테면 지루할 따름인 그리스도교의 ‘호교론’을 읽고서 오히려 합리주의자가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휘트먼은 교양 있는 소수의 엘리트와 구분된 민중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그는 이들 속에서 궁핍한 생활이 주는 지혜와 경륜의 힘을 느꼈다.

그는 시인이자 예언자이며 신비주의자였는데, 상하귀천 없이 모든 삶이 거룩한 것이며, 한 분이신 하느님께만 속하는 형제 자매임을 깨달았다. 인종과 상관없이 만인이 평등한 형제임을 1900년 동안 예언자들이 밝혀 왔으며 예수가 이를 공언했지만,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이 이 뜻을 욕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시집 <풀잎>에서 보듯이, 가장 흔하며 가장 작은 것들이 가장 위대한 인간 정신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 시집에 서문으로 이런 시를 썼다.  

땅과 태양과 동물들을 사랑하라. 부를 경멸하라.
필요한 모든 이에에 자선을 베풀라.

어리석거나 제 정신이 아닌 일이면 맞서라.
당신의 수입과 노동을 다른 사람을 위한 일에 돌려라.

신에 대해 논쟁하지 말라.
사람들에게는 참고 너그럽게 대하라.

당신이 모르는 것, 알 수 없는 것 또는
사람 수가 많든 적든 그들에게 머리를 숙여라.

아는 것은 적어도 당신을 감동시키는 사람들.
젊은이들, 가족의 어머니들과 함께 가라.

자유롭게 살면서 당신 생애의 모든 해, 모든 계절,
산과 들에 있는 이 나뭇잎들을 음미하라.

학교, 교회, 책에서 배운 모든 것을 의심하라.
당신의 영혼을 모욕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멀리하라.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라.

휘트먼은 자신 역시 그 풀잎들 중 하나로 여겼다. 그는 시집을 낼 때, 고상한 신사들을 야유하듯이, 이 시의 위대성을 스스로 격찬하고, 넥타이도 매지 않은 작업복 차림으로 찍은 자기 사진을 실었다. 따라서 평론가들은 휘트먼을 건달로 치부했고, 때로는 경찰을 불러 괴롭히기도 했다.

 

성(性)에 대한 문제에서도, 무시무시할 정도로 침묵을 지키면서 슬쩍슬쩍 훔쳐보곤 하던 앵글로 색슨 족 신사들의 치졸한 성적 관행을 무시하고, 휘트먼은 누구보다도 성을 솔직 담백하게 생활의 일부로 묘사했다. 이 시집이 보내진 콜럼비아의 각 대학에서는 책의 이 부분이 손때가 많이 묻어 너덜너덜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신사’들은 이 책을 비난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휘트먼은 금욕주의적 절제력을 갖춘 높은 도덕성을 스스로 입증하였다.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자원 간호사가 되어 워싱턴으로 갔다. 그는 병원을 찾아다니며 고통받고 무시당하는 병사들을 위로하고 친절을 보여주었다. 그의 천재성은 우정을 위한 것이며, 가련한 민중은 그를 사랑했다.

그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으며, 중풍으로 발을 절룩거리면서도 자신의 삶과 글을 통하여 미국 노동 운동 지도자들에게도 영감을 던져 주었다. 그는 “내 외침은 싸움을 부르는 외침이다. 나는 활발한 반항을 기른다”(휘트먼, 「한길에 서서」)고 말했는데, 예수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니체와 톨스토이처럼 비극적 운명을 살았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출처] <연민>, 삼인, 2000. 이 글은 제가 삽십대 중반 <공동선> 편집장 시절에 쓴 글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20년이 되었군요. 세월이 흘러도 마음과 생각의 갈피는 달라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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