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는 노예의 윤리를 가르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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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는 노예의 윤리를 가르치지 않는다
  • 유형선
  • 승인 2017.09.25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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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선 칼럼]

“모든 것의 정답은 하느님인가요? 다른 것은 없는지요?” 초등학교 주일학교를 다니며 이런 의문을 품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학교 수업이 교과서의 논리를 충실히 익혀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면, 주일학교 수업은 ‘모든 정답은 결국 하느님이에요!’를 큰 소리로 말하면 선생님께 칭찬과 함께 사탕이나 초콜릿을 받는, 일종의 놀이 같습니다.

교회에선 이성의 등불을 잠시 꺼두어야 하나?

중고등학교를 거치며 배웠습니다. 중세에서 근대로 시대가 변하며 인류는 더 이상 비이성적인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물론 지금도 연일 벌어지는 세상사는 비이성적 권위가 늘 활개치지만, 최소한 교과서에서는 이성적 과학이 비이성적 교회의 권위를 무력화 시켰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천동설을 가르치는 교회가 틀렸고 지동설을 추론하고 관찰과 실험으로 논증해낸 과학이 옳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현대, 즉 이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하느님과 교회를 생각할 때만은 내 안에서 타오르고 있는 이성의 등불을 잠시 꺼두어야 하는 건지요? 하느님을 생각할 때면 의심하고 질문하며 토론하는 이성의 스위치를 잠시 내려놓아야 하는 건지요? 글쎄요. 이쯤 되면 딴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는 게 스트레스 받지 않고 살아가는 현명한 처사일 듯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 아픈 일이 가득한 세상인데, 성당에서만큼은 잠시 ‘세상 걱정 회로’의 스위치를 잠시 내려 놓고 침묵 속에서 하느님 만나는 시간이 좋지 않냐고 대답하고 싶어집니다. 결코 틀린 말이 아닙니다. 저 역시도 ‘세상 걱정 회로’의 스위치를 잠시 내려 놓는 맛에 성당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질문합니다. 신앙과 이성은 함께 할 수 없는 것일까요? 진정 올바른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성을 잠시 꺼두는 게 아니라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요? 결코 아닐 겁니다. 이성을 온전히 도려낸 채 믿음만으로 신앙생활을 하자는 데에 찬성하는 신앙인이 이 시대에 과연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믿을 만해야 믿어진다고 고백하는 게 과연 신앙이 약해서만 일까요? 의심하고 질문하고 토론하여 합리적인 결론에 다다르는 과정을 신앙의 영역에서만큼은 배척해야 하는 것일까요?

 

사진출처=pixabay.com

성서 속 영웅들, 하느님께 반항하고 저항하다

제가 이 글을 통해 소개하려는 <구약성서로 철학하기>(요람 하조니 지음, 김구원 옮김, 홍성사, 2016)라는, 사뭇 도전적인 제목을 가진 책은 이성과 신앙이 결코 대척점일 수 없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펼치고 있습니다. 구약성서가 기록하여 전하는 신앙의 조상들은 “정답은 하느님!”이라고 세뇌되지 않았으며 맹목적으로 순종하도록 프로그래밍된 로봇도 아니었습니다.

성서 속의 많은 영웅들은 필요하다면 하느님께 반항도 하고 저항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올바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이성을 포기하라는 사고방식은 결코 성서적일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요컨대 성서에서 반복하여 보여주는 진리관은 인간 이성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중요시하는 현대적 보편 가치관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의 도움, 혹은 하느님의 권위로 말하는 사람들의 도움 없이 자신의 이성과 판단력을 활용해 행동한 개인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먼저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을 통해 농부의 의미와 대립하는 양치기의 의미부터 짚어보겠습니다.

아벨은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창세기에서 하와는 카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고 카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었습니다. 카인은 땅에서 난 곡식을 하느님께 예물로 드렸고 아벨도 양떼 가운데 맏배를 하느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형 아벨의 제물은 거절하셨습니다. 여기서부터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성서 속 카인은 분명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벨보다 먼저 하느님께 감사예물을 드릴 생각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너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 먹으리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정확히 이행한 사람이 카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명령이 저주와 고통일지라도 복종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명령에 복종한 카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아벨은 하느님의 명령에 따르지 않습니다. 땅의 저주를 피할 방법을 발견하여 농부의 삶을 따르지 않고 양치기의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복종과는 정반대의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지혜롭고 용기롭게 반항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즉, 반항과 창조의 삶, 하느님의 단순 명령이 아닌 참된 뜻으로 생각되는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사는 인물의 상징이 곧 아벨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이라 여기는 것을 행하는 것에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카인의 경우에서처럼 이 모든 것은 한쪽으로 치우치면 짐승적인 삶의 일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인류의 참된 선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일에 유용되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p140)

도시와 제국의 대척점에 선 유목민

<구약성서로 철학하기>(요람 하조니 지음, 김구원 옮김, 홍성사, 2016)

살인자 카인의 뒷이야기도 중요합니다. 동생을 살인하고 심판을 받은 후 하느님 앞에서 물러나와 놋이라는 도시를 세웁니다. 저자 요람 하조니는 이 부분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함축한다고 강조합니다. 카인과 연관된 농경 생활의 종착점은 부와 권력의 축적물인 도시라는 겁니다. 즉, 도시와 국가 생활은 농부의 윤리학이 자연스럽게 확장된 것입니다.

카인의 모든 덕목 - 신이 선포한 말씀에 복종하기, 경건한 제사, 지난 세대의 전통에 준수하기 등은 대도시와 그 제국에서 완전한 형태를 갖춥니다. 반면 아벨의 모든 덕목 – 절대적이라는 신의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기, 전통적으로 권위가 있다고 여기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기, 더 나은 상태를 위한 혁신에 깊은 관심을 가지기 등은 도시와 제국을 다스리는 신성한 왕들의 세상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결국 유목민들은 문명 바깥에 존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유목민은 산에 서서 도시와 국가가 하는 일을 내려다보며 광야를 통한 자신만의 독자적인 길을 계획한다. 도시생활의 화려함과 거짓말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그 거짓말을 믿고 매일 힘들게 들에서 노동하는 농부들의 짐승 같은 삶은 더욱 그렇다. 양치기들은 그 어떤 것보다도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가지고 있다. 즉 그들은 자유롭다. 그들에게는 정치적 독립이 있다.

그들은 유목민으로 살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다른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으며, 누구도 그들의 행위를 규제하거나 그들의 노동이나 재산에 세금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들은 또한 윤리적으로도 독립적이다. 그들의 ‘문명 밖’ 관점과 그들이 하는 일의 자유와 존엄이 그들로 하여금 정말 중요한 것(모든 인간이 직면한 위험, 죽음들 그리고 그들 스스로 참된 도를 발견하고 그것에 따라 살 때 감당해야 하는 책임)에 집중하게 한다. (p142)

어떻습니까? 지금껏 무심코 지나쳤던 카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창세기의 작가들이 고이 배치한 가치체계가 모습을 드러내는 게 보이지 않으십니까?

개인의 주체적인 진리추구 옹호하는 구약성서

근대를 시작한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기독교의 가치체계에서 빠져 나와 그리스 문명의 가치체계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려 했습니다. 덕분에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인간상을 그려내는 데에 구약성서를 뒤적인 철학자나 사상가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적 전통은 구약성서를 잘못 보고 있다고 이 책은 단언합니다. 구약성서는 그리스의 어떤 고전보다도 민주적 통치를 지지함에 있어 진보적입니다. 또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유롭고도 주체적인 개인을 소중하게 묘사합니다.

<구약성서로 철학하기>는 제법 두툼하지만 흥미진진하기에 빠르게 읽힙니다. 저자는 아벨에 이어 아브라함, 요셉, 야곱, 모세로 이어지는 양치기들의 계보학에서 구약성서의 핵심적인 윤리관과 진리관을 말 그대로 논리적이며 이성적으로 풀어헤쳐 설명합니다. 바로 이 책을 끝까지 손 놓지 못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구약성서의 저자들은 개인의 주체적인 진리추구를 일관되게 호의적으로 서술합니다. 개인이 어디서든 어떤 방법으로든 참된 것에 관한 지식을 얻으려 노력하는 사람들을 지지합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직접적으로 나타나 개입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개입 역시 인간의 독립적인 추론과 그에 근거한 행동의 궤적 안에서 움직입니다.

하느님도 진리를 탐구하신다

모세의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모세가 태어나 살아남고 어른으로 성장한 것은 하느님의 직접적인 명령이 없었지만 스스로 판단하여 행동한 자율적인 인간 덕분이었습니다. 히브리의 갓난아이들을 모두 죽이라는 에집트 왕의 명령이 옳지 못하다고 순전히 자기 스스로 판단하여 행동한 산파들 (시브라, 부아) 덕분이었습니다. 갓난아이를 살리기 위해 아이를 바구니에 넣어 나일강에 띄운 모세의 어머니와 바구니를 따라간 모세의 누이도 온전히 그들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왕실에서 커가던 모세가 에집트인이 히브리인을 때리는 것을 보고 그를 죽여 모래 속에 묻어 버립니다. 이런 행동 역시 계시에 따른 행동이 아닙니다. 온전히 자기자신의 생각이었습니다. 순종적 인간이 아닌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주체적인 인간상을 구약성서는 한결같이 지지합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대목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고정된 명제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성서 속 하느님께서는 진리를 구하는 사람에게 나타나십니다. 심지어 하느님께서 인간의 질문과 탐구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하느님의 명령에 질문을 제기하고 하느님과 논쟁하고 때때로 하느님의 마음까지 바꾸게 한 인물들이 성서에 꾸준히 등장합니다.

소돔의 멸망 앞에서 하느님과 논쟁하는 아브라함, 하느님과 밤새도록 씨름하여 새 이름 ‘이스라엘’을 받은 야곱, 불 붙은 떨기나무가 타지 않자 왜 그런지 알아보겠다고 다가간 모세가 그러합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에게 나타나신 하느님의 첫 말씀은 명령이 아닌 질문이었습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은 한결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시는 삶이 이성에 위배되는 교리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진리로 보이는 것 일지라도 묻고 따지기 전에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니체는 그리스도교가 노예의 윤리를 가르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결코 노예의 윤리학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질문하고 비판하고 토론하며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인물들을 성서는 소중하게 기록하였습니다. 근현대 어느 사상보다도 더욱 진보적이며 이성적이고 도전적인 구약성서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유형선 아오스딩
<가족에게 권하는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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