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복팔단] 호흡처럼 바치는 예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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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 호흡처럼 바치는 예수 기도
  • 짐 포레스트
  • 승인 2017.09.26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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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의 사다리-20] 복되다, 마음이 순수한 사람들

마음의 정화는 보다 더 하느님 중심의 삶을 추구하는 끝없는 투쟁을 의미한다. 매 순간 순간 하느님의 현존에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고 훈련하므로 마음은 우리자신의 걱정이나 야망 혹은 외모에 마음이 사로잡히지 않는다. 기도는 이런 노력에 있어 기본적인 것이다. 기도는 우리가 외워서 하는 기도이든 자발적인 기도이든 독서, 음악듣기 혹은 거룩한 것에 대한 자각을 높여주는 모든 수단들을 이용해서 하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의 주의를 하느님께로 향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

많은 성인들처럼, 세라핌의 삶에서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은 마음의 기도라고도 알려진 예수 기도였다. 세라핌은 수련자들을 이렇게 가르쳤다. “오든 가든, 앉아있든 서있든, 일하든 교회에 있든, 이 기도가 항상 여러분의 입술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기도의 모든 표현이 그곳에 다 있다. 마음속에 이 기도로써 여러분은 내적인 평화 그리고 신체와 영혼의 절제를 발견할 것이다.”

마음의 기도에는 여러 변형이 있다. 때때로 “죄인”이 빠진다. 어떤 때에는 더 짧게 한다: “주님 예수, 저에게 자비를 가지소서,” 아니면 “예수, 자비”의 두 마디만으로 기도한다. 어떤 형태이든지 간에, 이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을 점점 더 깊게 그리스도의 자비 속으로 이끌어 간다. 나는 때때로 다른 이들을 위하여 이 기도를 한다: “주님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아니면 어떤 사람, 그룹 등).” 수도원의 문학과 실천은 이 기도의 완전한 형태를 “전체 복음이 한 문장 안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진=한상봉

의식의 중심이 머리에서 마음으로 옮겨가도록

어떤 사람들은 이 기도를 너무나 항구하게 하므로 가슴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처럼 기도가 삶 속에 완전히 통합되기도 한다. 이 기도를 사용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4세기 사막교부들의 시대이후로 수도생활에 있어 기본적인 요소가 되어온 것 같다. 19세기의 고전, 순례의 길은 어떤 방랑하는 러시아인이 수도승의 격려와 지도를 받으며 어떻게 끊임없이 예수 기도를 하는가를 묘사한다. 나는 모스크바의 한 수도원 가게에서 예수 기도를 속삭이면서 나에게 줄 거스름돈을 세고 있던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항상 기도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예수 기도는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는데, 걸으면서 기다리면서 분노를 누르면서 혹은 절망했을 때, 침상에 누워 잠들 수 없을 때 조용히 암송할 수 있다. 처음에는 꾸미는 것 같고 산만한 것 같지만, 내적인 침묵을 이끌어주는 안내자가 될 수 있고 더 주의를 집중시키는 길이 되기도 한다.

"늘 당신의 정신을 마음속에 모으라”고 기도의 위대한 스승인 은둔자 성 테오판이 가르쳤다. 예수기도는 영적 생활의 한가지 전통으로, 의식의 중심이 머리에서 마음으로 옮겨가도록 도와준다. 여기에서 머리와 마음은 단순히 신체적인 의미로만 이해되어선 안 된다. 머리, 정신은 의식의 분석적이고 조직적인 측면을 나타내고, 자아의 부분인 마음, 가슴은 하느님의 현존에 가장 민감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확실히 체험할 수 있게 한다.

마음의 잔혹감을 넘어서기 위하여

예수기도는 우리의 영혼을 실제이건 상상으로 생각한 것이든 간에 다른 사람들의 잘못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이끌어 주는 한가지 단순한 방법이다. “모든 사람들을 좋게 보고 어떤 창조된 피조물도 자기에게 불순하거나 더럽혀진 존재로 보여지지 않을 때 그 사람은 마음이 참으로 순수한 것이다”라고 시리아의 성 이사악(또한 니느웨의 이사악이라고도 알려짐)이 썼다.

사막의 교부들 이야기는 대부분이 수도승들의 이야기인데 그들의 가장 어려운 전투는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단죄하게 만드는 마음의 잔혹함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두 명의 에집트 수도승들이 개울의 건너편에서 물이 너무 깊어 건너오지 못해 곤경에 빠져있는 한 여인을 보게 되었다. 수도승 중 한 사람이 그 여인을 들어 다른 쪽에 안전하게 옮겨주었다. 이 행동이 다른 수도승에게 스캔들이 되었다. 마침내 오랫동안 말을 안하고 걷고 있었던 그 수도승은 여인을 만짐으로써 정결의 서원을 깨뜨렸다고 화가 나서 그의 형제를 비난하였다. 그러자 다른 수도승이 응답했다, “난 그 여인을 강 건너로 옮겨 놓았지만, 당신은 아직도 그 여인을 붙잡고 있네요.”

순수한 마음이란 그 마음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가 다른 이들에게로 흘러드는 것이다. 이것을 말해주는 에집트 사막의 또다른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4세기 혹은 5세기 초의 이야기이다:

한 젊은 형제가 나이든 형제를 찾아가 자신이 끊임없이 성적인 환상들에 의해 시달리고 있다고 고백했다. 나이든 수도승은 자신이 그러한 유혹을 겪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젊은이에게 수도생활이 맞지 않는다고 충고했다. 자격이 없다는 사실에 동의하면서 젊은이는 세상에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하느님의 섭리로 아폴로 원장이 젊은이에게 다가와 실망한 그를 보고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시오. 나의 아들이여, 실망하지 마시오. 나도 지금 나이에 그리고 이런 수도생활에서는 그런 생각들 때문에 힘들게 지낼 때가 있습니다.” 하고 아폴로 원장이 고백했다. “그러므로 그런 유혹을 받을 때 포기하지 마시오. 치유책은 우리의 걱정스러운 생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연민에 있습니다.” 젊은 수도승은 그 말을 마음에 새겼고 다시 수도생활로 돌아갔다.

이야기는 더 이어진다. 아폴로 원장은 연민이 너무나 부족했던 나이든 수도승의 방으로 곧장 걸어가서 처소 바깥에 조용히 섰다. 그리고 그 나이든 형제가 젊은 수도승이 겪었던 같은 유혹과 마주치기를 기도했다. 그의 기도가 너무나 빨리 들어졌고 그래서 얼마 안 지나 그 나이든 수도승은 방에서 달아났고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걸으며 젊은이가 갔던 길을 걸어내려 가면서 자신이 더 이상 수도승이 될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아폴로 원장이 그를 멈추게 하고 말한다, “방으로 돌아가시오. 당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당신 자신을 바라보시오. 지금까지 악마가 당신을 잊었던가 혹은 당신을 경멸해서 싸울만한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전투라고 말했나요? 당신은 그런 공격을 단 하루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유혹이 당신에게 닥친 것은 그 젊은이가 당신에게 우리가 겪는 공통의 적에 대해 도움을 청하러 왔을 때 위로의 말을 전하는 대신 그를 절망 속에 그대로 내쳤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더 순수할수록, 그 마음은 창조 속에서 창조주를 더 알아본다고 비잔틴 시기의 위대한 성인인 시리아의 성 이사악이 가르쳤다. 그는 고행의 생활에 큰 무게를 두었다 ­기도, 단식, 자발적 가난, 가난한 이들에게 관대함­ 이것들은 마음을 정화시키는 길이었다. 세계의 욕망에 대항하는 전사, 7세기의 이 주교는 창조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진 인간뿐만 아니라 하느님이 생명의 은총을 준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이었다. 

[원출처] <진복의 사다리>, 짐 포레스트, The Ladder of the Beatitudes, Orbis, 1999
[출처] <참사람되어> 2002년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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