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 모든 성사는 사제 혼자서…평신도는 구경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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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모든 성사는 사제 혼자서…평신도는 구경꾼인가?
  •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7.09.26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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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새로운 창조-9

이 세상에 주님을 보이게 하는 것이 성사성의 핵심이다. 현대 신학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성사, 즉 성부(聖父)의 실체를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교회를 성자(聖子)의 실체를 세상에서 보일 수 있게 하는 그리스도의 성사라고 말한다. 우리는 성령(聖靈)의 실체를 모두가 받을 수 있도록하는 교회의 성사들로서 전통적인 칠성사를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새롭게 말하는 방식은 언제나 교회의 성사들이 가진 지혜였던 육화 신학을 현대적 용어로 적은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화해의 성사 - 혹은 우리가 지금까지 불러왔던 대로 고해성사를 보자. 가톨릭 영성에서는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개인적으로 용서하셔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신만의 길을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충분한 적은 결코 없었다. 여러분은 자신의 죄를 다른 사람과 나누어야 하고, 분별력을 위해서 기도하고, 조언에 귀를 기울이고, 하느님의 용서하심을 아주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며, 개인적 방법으로 받아야한다. 이런 것들이 바오로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개념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도 자주 성사들의 육화적 측면이 제도적인 측면 때문에 흐려져 왔다. 고해성사는 대화이기보다는 하나의 의식이 되었으며,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짐이 되었다. 너무도 자주 성사들의 인간적인 측면이 교리적이고 규율적인 측면을 띄게 되었다. 고해성사는 인간 사이의 만남이 아니라 익명으로 죄를 말하는 것이 되었다. 공동체와 화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제가 하느님을 대신해서 홀로 면죄를 말하는 형식이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의 육화적 의미를 회복하면 성사들은 인간적인 의미를 지니고 살아나게 된다. 생명력이 넘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사람들은 고해성사를 하러 가라는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그들은 공동체에서 불화가 생겼다고 느끼고 그때 필요하다면 공동체의 사제를 통해 서로 화해하려는 노력을 한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영혼에서 어떤 얼룩을 지워 없애려고 세례 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흐르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에 자녀들이 잠겨들게 하기 위해서 세례 시킨다. 사람들은 어떤 의무를 완수하거나 사제가 자신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 미사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다른 지체들과 주님 안에서 충만함을 나누고 자신들의 삶의 의미를 함께 기념하기 위해 미사에 참여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신품성사 같은 것조차도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더욱 중요하고 매력적이 된다. 예를 들면, 뉴 예루살렘 공동체의 많은 젊은이들이 사제직과 수도생활에 대한 소명을 숙고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또한 많은 이들이 소명에 대한 개념의 폭이 넓어져서 선교사나 평신도 선교사가 될 가능성을 고려하게 되었다. 나는 뉴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소명에 대해 한 번도 설교를 한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특별히 우리가 한 떼의 젊은이들을 신학교에 보내서 프란치스코 회원들을 놀라게 했던 한 해를 기억한다. 젊은이들이 일단 그리스도의 몸의 사랑을 경험하면 그들은 자발적으로 다른 이들과 그 복음을 나누고 싶어 한다.

우리 공동체의 젊은 여자들과 남자들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기꺼이 독신으로 살겠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이다. 그들은 성인(成人)의 문턱에서 주님께서 어느 길로 부르시는지 귀를 기울이면서 결혼과 독신을 자유로이 선택한다. 그러한 자유에는 아주 큰 기쁨이 있고 그들은 우리들과 그 자유의 기쁨을 나눈다.

살아 계신 실체이신 그리스도의 몸과 그 몸에 속해서 서로서로 봉사하는 지체들은 우리가 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임무에 대해서도 자각하도록 인도하였다. 과거에 가톨릭교회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수녀들에게 맡기고 그밖에 모든 일은 사제에게 짐 지웠다. 그것은 바오로가 그리스도의 몸을 말하면서 우리에게 주었던 임무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이다. 그가 붙잡고 있던 비전은 한 사람이 혼자 선물을 다 받아서 모든 사람을 위해 모든 일을 다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다른 사람과 여러 가지 은총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의 성령께서 공동체가 해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일을 하시는 것이다:

“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주님을 섬기는 직책은 여러 가지 이지만 우리가 섬기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일의 결과는 여러 가지 이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을 이루어 주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의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1코린 12,4-7)

공동의 이익이란 무엇인가? 이것의 전통적인 이름은 구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구원이 건강이나 치유를 의미하는 라틴어 살루스(salus)에서 온다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린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Extra ecclesiam nulla salus." 라고 했는데 이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뜻으로 자주 번역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여러분이 가톨릭교 신자가 아니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삶이 정말로 치유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그들이 속한 공동체라는 그들의 경험을 표현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들을 사용하면서 서로서로 돕고 사는 사명의 목적은 구원-삶의 치유-이다. 개인의 삶이 치유되면 그 지체 자체가 더 건강해 진다. 그래서 바오로도 선물들의 목표는 몸을 세우는 일이라고 했다:

"우리는 사랑 가운데서 진리대로 살면서 자라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각 부분이 자기 구실을 다 함으로써 각 마디로 서로 연결되고 얽혀서 영양분을 받아 자라납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도 이와 같이 하여 사랑으로 자체를 완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에페소서 4,15-16)

공동체가 세워지면 구성원들이 서로 사랑하고 섬기면서 건강하고 온전하게 성장한다. 사람들이 서로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놓고 서로의 이익을 위해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은총을 사용할 때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몸으로 실재하시며 역사 안에서 육화가 계속된다. 그러면 함께 그리스도가 되는 것에 대한 체험된 실제가 전례에서 기념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다양한 전례 전문가들은 전례가 공동체를 개발하고 우리 가운데 계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경험하도록 하는 자리라고 말했다. 그들은 주일 미사가 본당사람 전체(혹은 적어도 꽤 많은 수)가 다 모여 신앙 공동체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배울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을 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전례 쇄신 운동 초기로부터 그들은 전례를 크게 강조하라고 본당을 격려했고 독서와 찬송에 평신도의 참여를 권장 할 것과 강론을 성서와 일상생활을 연계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적절한 의상이나 장식 등등으로 미사의 상징성을 높일 것을 권고했다.

이제 우리는 가톨릭 교회에서 이러한 접근 방식을 몇 년간 시도했지만 약속되었던 열매를 수확하지 못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분명히 몇몇 본당에서는 열심히 노력하는 전례 위원회에 의해서 꾸며지고, 잘 훈련된 지도자들이 표현하며, 유능한 음악가에 의해서 풍요로워진 전례를 행해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에게 전례는 라틴어로 하는 일요일 쇼를 영어 일요일 쇼로 바꿔 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출석은 했지만 참여하지 않는다. 그들은 낯선 방문자로서, 평화의 인사로 낯선 사람과 악수를 하고 낯선 사람으로 떠난다. 이런 것들은 참 공동체가 아니다. 전례만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교육이 실패했다.

[원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신약>,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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