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이 얇은 자의 시린 마음 잊지 않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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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이 얇은 자의 시린 마음 잊지 않아야
  • 최충언
  • 승인 2017.09.25 00: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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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우리들의 천국에서 여전히 배제되고...

[최충언 칼럼]

엠마우스 공동체를 만든 피에르 신부는 신자라고 불리는 사람과 타인이나 스스로 비신자라고 부르는 사람 사이에 근본적인 구분이 없다고 말했다. 굳이 구분이 있다면 ‘자신을 숭배하는 자’와 ‘타인과 공감하는 자’ 사이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또한 남의 고통 앞에서 ‘고개를 돌리는 자’와 남들을 고통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싸우는 자’ 사이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나는 이 구분에 동의한다.

"봄볕은 며느리를 쬐이고 가을볕은 딸을 쬐인다"는 옛말이 있지만, 이상기후 탓인지 요즘 가을볕이 더 따갑게 느껴진다. 가을 땡볕에 부산에서 서울로 국토대장정에 나선 이들이 있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이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토대장정에 나섰다. 지금 그들은 부산형제복지원 터에서 출발하여 청와대까지 가는 22일간의 여정 막바지를 진행 중이다.

나는 이런저런 인연으로 형제복지원의 피해생존자들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국토대장정에 나선 피해생존자들이 페이스북에 실시간으로 글을 올리고 있다. 그 중 일부는 나와 호형호제하는 동생들이다. 형제복지원에 수용되면서 받은 고문과 폭행으로 성치 않은 몸으로 먼 길을 나섰으니 걱정이 앞선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 군사독재의 같은 희생자

택시 운전을 하던 대우 동생은 휴직을 하고 특별법 제정과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글이 씌어진 조끼를 입고 땡볕에서 고생을 한다. 얼굴이 많이 그을렸고 입술은 부르텄다. 발에는 물집이 잡히고 다리는 천근만근의 무게로 다가오겠지. 다행히 청년한의사회에서 침도 놓아주고 도움을 주는 모양이라 한결 마음이 놓이긴 한다.

국토대장정 8일째 이른 아침에 페이스북으로 메시지가 왔다. 강용주 선생이었다. 무슨 일일까? 열어보니 이런 내용이었다.

"후원해 주세요. 형제복지원 국토대장정 중인데 돈이 없나 봐요. 국토대장정에 비용이 생각보다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부디 돈이 없어서 밥을 못 먹거나 돈이 없어서 파스를 못 사거나 돈이 없어서 차량에 주유를 못하거나 하는 일이 없도록 여러분의 정성어린 후원금을 감히 부탁드립니다."

강용주 선생이 누구인가? 그와 나는 동갑내기다.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나는 그의 소식을 간간히 듣곤 했다. 광주민중항쟁 당시 19살 고교생 신분으로 시민군으로 참여해 항쟁의 마지막 날 새벽까지 도청을 지켰던 그다. 1985년 9월 안기부가 발표한 이른바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국가보안법 위반(국가기밀누설죄)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무기징역을 받고 수감 중에 준법서약서를 쓰면 풀어주겠다는 당국의 회유를 거절한 그다. 양심의 자유를 지켰던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14년간 옥고를 치렀다. 지금은 전남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페친이 된 지 한 달도 되지 않는 그가 나에게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한 것이다. 최연소 비전향 장기수로 국가폭력에 지금도 고통을 받고 있는 그가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을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선 것이다. 영문도 모르게 끌려가 학업의 기회를 놓치고 고문과 폭력으로 비참한 생활을 했던 형제복지원 피해자들도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이다. 강 선생과 주고받은 문자에 공감하는 말을 소개한다.

"제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자면, 독재의 최대 희생자인 서민의 밑바닥에서 희생양이 되어버린 ‘부랑자’ - 형제 복지원. 민중을 얘기하던 민주인사들은 이 밑바닥 인생과는 다른 ‘당신들의 천국’에 사는 것 같아요. 6월 항쟁 30년. 형제복지원 30년. 군사독재의 같은 희생인데도 그 결말이 너무 다르네요. 민주화 30년 세월동안 ‘구조된 자’ 중에서 여전히 ‘가라앉아 자’로 존재하는 형제복지원 생존자들입니다. 그들이 ‘가라앉은 자’로 있는 한, 우리 모두는 결코 ‘구조된 자’가 될 수 없지요. 서서히 ‘가라앉은 자’로 온 사회가 빠져들 밖에요."

그 날은 쉬는 날이라 늦잠을 자려고 했던 나는 그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보다가 이부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들의 천국. 구조된 자. 가라앉은 자. 나는 민주화운동의 보상으로 거액의 보상금을 받은 몇몇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들의 행태를 알기에 강 선생의 말이 아프게 다가왔다. 형제복지원사건 특별법 제정이 19대 국회에서 좌초되었을 때 실망감을 곁에서 지켜보았기에 더욱 공감할 수 있었다. 과거를 팔아먹는 사람들 치고 제대로 된 인간을 아직 보지 못했다.

가축처럼 새겨진 수용번호, 82-4714

형제복지원피해생존자들 중 한 명인 이향직 선생의 페이스북을 잠시 들여다본다.

"9월 21일 목요일 16일차. 가축처럼 새겨진 수용번호를 지워내고자 시작한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의 국토대장정. 오늘도 힘찬 구호와 함께 출발합니다. 오늘은 공주시 정안면사무소에서 천안 선문대학교까지 22.19km를 행진하는 구간입니다. 본대가 지나는 자리 걸음걸음 마다 시민 여러분들과 페친님들의 열렬한 환호와 응원 부탁드립니다. 형제복지원 특별법을 제정하고 진상을 규명하라!!"

‘가축처럼 새겨진 수용번호.’ 82-4714. 입소 연도에 이어지는 일련번호는 수용된 모든 이에게 부여된 번호다. 나는 이 말에 그동안 그가 겪어 왔던 신산한 삶의 고통에 가슴이 아려왔다. 낙인이 찍힌 삶을 살아 왔구나. 특정인이 좋지 않은 과거 행적으로 누군가를 사회적으로 낙인을 찍을 때 흔히 듣게 되는 말인 주홍글씨를 가슴에 새기며 살아왔구나.

스티그마 효과(stigma effect)라는 말이 있다. 과거의 좋지 않은 경력이 현재의 인물 평가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 또는 한번 나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행동하는 현상을 이르는 말이다.

몇 년 전 드라마 <추노>의 OST였던 임재범이 부른 <낙인>이라는 노래의 후렴구가 생각났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애절한 선율을 따라 불러본다.

“가슴을 데인 것처럼
눈물에 베인 것처럼
지워지지 않는 상처들이 괴롭다
내가 사는 것인지
세상이 나를 버린 건 지
하루가 일 년처럼 길구나
그 언제나 아침이 올까”

이불이 얇은 자의 시린 마음을 잊지 않게 하시고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에 공감을 하고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준 강용주 선생에게 고맙다. 살다보면 실수도 많고 누군가에게 상처도 입히는 게 우리네 삶이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인지도 모른다. 대놓고 비난하는 사람보다 냉소적 미소를 띠고 얼굴을 돌려버리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더 큰 모욕감을 느낀다. 굳어진 가슴과 냉담과 무감각이 악의 뿌리라는 말도 있다. 작은 연대의 손길에서 희망을 본다.

“가난해지셨고 항상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과 가까이 계셨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신앙이야말로 사회로부터 가장 무시 받는 구성원들의 통합적 발전에 관한 우리 관심의 근거입니다.”(복음의 기쁨, 186항)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 말씀에서 힘을 얻는다. 그 희망은 바로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루카, 4.18-19)” 하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준 희망이기 때문이다.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분다. 머지않아 추운 겨울이 올 것이다. 마종기 시인의 <겨울기도>라는 시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이불이 얇은 자의 시린 마음을 잊지 않게 하시고...” 우리가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의 소망인 특별법제정과 진상을 규명하는 일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진다면 그들이 포근한 이불을 덮고 추운 겨울을 날 수 있으리라.

국토대장정에 나선 그들에게 한 끼 밥을 대접하고, 지친 다리의 근육통을 해소하는 파스를 전해주고, 가을 땡볕을 걸어 목마른 그들에게 생수를 주고, 그들을 인도하는 차량에 기름을 넣어드리는 일이 연대의 작은 손길이자 이불이 얇은 자들의 시린 마음을 잊지 않는 선한 마음 아니겠는가.

무탈하게 22일간의 국토대장정이 마무리되기를 빕니다.

 

최충언 플라치도
외과의사.
<달동네 병원에는 바다가 있다>,<단팥빵-어느 외과의사의 하루>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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