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다 외로워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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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다 외로워서 그래"
  • 진수미
  • 승인 2017.09.19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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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 있는 그녀>(JTBC 드라마, 2017. 8.19 종영)

[진수미의 문화칼럼]

가까운 언니의 휴대폰에 남편 번호는 ‘내 편’이라고 저장되어 있다. 사네 못 사네 지지고 볶았던 가정사의 내막을 웬만큼 아는 터라, ‘잠정적 내 편’ 혹은 ‘제도적 내 편’이 맞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렇게 여기고 사는 것이 그녀의 선택이고 삶이니 제삼자가 왈가왈부할 바가 아니다.

인생에 영원한 편은 없다. 지구의 시간을 빌려 사는 인간이 세속에서 맺는 인연은 잠정적이고 일시적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이러한 현실이 견디기 어려울 때 종교가 힘이 되어줄 것이나 세속의 현실을 견디는 쪽에 나는 관심이 더 있다.

 

인생은 길고 외로움은 커지고

평생을 불편부당, 독야청정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인생은 길고 기력은 쇠약해지고 그에 반비례해 외로움은 커진다. 그래서 탄생과 함께 가족 혹은 대안가족이라는 공동체에 소속되는 우리는 보통 그 끈이 느슨해질 무렵 -대개 가임 연령을 전후로- 국가가 제도로써 결속을 보장해주는 결혼을 선택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꾸리는 것이 아닐까.

경험상 삶의 막막함을 호소하면 돌아오는 말이 으레 “그럼 결혼해”였으므로 아주 틀린 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결혼하면 정말 외로움이 덜해지고 내 편이라고 믿을 만한 사람이 생기는 건가요? 여전히 고양이와 둘이 사는 삶이 좋은 나는 이런 의문에서 해소될 길이 요원하다.

최근 종영한 JTBC의 드라마 <품위 있는 그녀>는 결혼 제도가 맺어주는 공동체의 허울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드라마는 ‘흙수저’ 박복자(김선아 분)가 이상적인 ‘금수저’ 여성이라 생각한 우아진(김희선 분)이 소유한 품위와 부유한 생활을 욕망하다가 살해당하는 비극을 그리고 있다.

드라마 속 여성들은 결혼을 계급상승 욕망의 실천 도구로 활용한다. 그 중심에 놓인 복자의 서사는 빈민 여성의 신데렐라 스토리로 익숙한 데 반해, 아진이 친교를 나누는 강남구 부유층들의 결혼 생활은 이색적인 것이어서 신선하게 다가왔다.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 ‘원 소스 멀티 유즈’처럼 출연 배우들이 예능에 섭외되는데, 강남 부잣집 사모님을 연기했던 유서진, 이희진, 정다혜의 얼굴이 토크 프로그램에서 자주 비쳐지는 걸 보면, 나만의 감상은 아닌 듯하다.

강남 부잣집 사모님

차기옥(유서진 분)은 남편을 사랑하지만 정작 남편 마음은 콩밭에 가 있다. 그는 아내의 정기적인 브런치 모임의 구성원인 오경희(정다혜 분)와 불륜 행각 중이다. 경희는 ‘가식이 몸에 밴 상여우’지만 남편에게 맞고 사는 불행한 사생활을 가지고 있다. 파워 블로거로 알려진 김효주(이희진 분)는 남편 소유의 호텔에서 정기적으로 연하 애인과 밀회를 한다. 이들은 모두 ‘본 투 비 부유층’ 행세를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고 남편의 경제력에 기대어 현재의 품위를 유지하고 있다.

아진의 남편 안재석(정상훈 분)은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고 싶으면서 자신의 욕망에 이기적인 캐릭터이다. 그는 딸에게 좋은 아빠, 아진에게 좋은 남편, 딸의 미술교사이자 작가인 윤성희(이태임 분)에게는 좋은 애인이 되고 싶다. 그러나 성희와의 관계가 들통 나면서 이기적인 본색이 가시화된다. 그는 아진과 성희를 모두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한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아진에게 심지어 자신과 성희의 “관계를 쿨하게 인정하라”고 충고까지 한다.

'쿨한' 위기의 여자

재석의 태도에서 떠오르는 것이 시몬느 보부아르의 <위기의 여자>이다. 이 소설에서 44세의 모니크는 남편 모리스와 두 딸을 키우며 전업주부로 20여 년을 살아왔다. 그러나 남편에게 젊고 사회적 능력이 있는 애인이 생기자 그녀의 삶은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총명하고 지적이라는 과거 평판을 의식하면서 그녀는 남편의 혼외정사를 용인하고, ‘쿨하다’는 주위 시선에 일시적으로 만족감을 느낀다.

관계가 이러한 방식으로 고착화되자 남편은 애인과 지내는 시간을 늘려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하게 되지만 모니크는 그것을 참아낼 수가 없다. 그녀의 쿨함은 대외용이었을 뿐이다. 그에게 헌신했던 시간이 아까워 남편을 떠날 수 없는 그녀는 방황을 계속하고 소설은 미래의 문 앞에 선 모니크의 두려움을 조명하며 끝난다. 다시 말해 <품위 있는 그녀>에서 재석이 아진에게 요구하는 쿨함은 상대가 겪는 고통에 무지한, 한없이 이기적인 발상인 것이다.

아진 역시 모니크처럼 재석과 결혼, 성공적인 커리어를 버리고 전업주부가 된다. 타고난 미모와 능력으로 시아버지인 대성펄프 회장 안태동(김용건 분)의 신임을 얻으며 가족 내에서 자기 성취를 부분적으로 이룬다. 그런데 남편이 바람을 피우면서 이 모든 것이 흔들리게 된다. 모니크와 달리 아진은 남편에 대한 미련에 끝까지 매달리지 않는다. 아진의 선택이 드라마에서 긍정적으로 그려진 것은 3쌍 중 1쌍이 이혼하는 한국의 현실을 반영한 것일 터이다.

그런데 <품위 있는 그녀>에 그려진 커플 중 이혼이 현실화된 것은 아진뿐이다. 드라마 여성들은 이혼하지 않는 이유로 경제력과 아이를 꼽는다. 효주가 혼자서는 먹고 살기 힘들어 이혼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경희는 “보편적이고 심플한 이유”라며 수긍하고, 경희는 아이 때문에 이혼하지 못한다고 말하자 효주는 “인간적이고 이해가 가는” 이유라며 상호 납득해 주는 것이다.

 

외로움에 대처하는 부적절한 방법

히로인인 복자도 태동을 떠나지 않는다. 태동도 복자가 대성펄프 주식을 사모펀드에 매각하고 사라지자, 의식불명 상태를 가장하면서 그녀를 기다린다. 드라마에서 매우 희소한, 사랑에 입각한 부부 관계가, 노년의 회장과 계획 결혼의 주모자 복자 사이에 설정되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점이다. 마치 세상의 모든 도덕을 의심하라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명제가 실현된 듯하다. 뒤라스는 ‘소파 승진’을 목적으로 한 사랑 또한 사랑이라고 말함으로써 낭만성에 입각한 사랑에 대한 관념을 되돌아보게 하기도 했다.

<품위 있는 그녀>는 복자가 모 재벌가의 실제 스토리의 히로인을, 재석이 아이의 가정교사와 불륜에 빠졌다는 국내 굴지의 재벌가의 이혼 스토리를, 경희가 엘리베이터에서 아내를 폭행하며 질질 끌고 갔던 어느 연예인의 사건 같은 실화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화제를 불러 왔다. 내게 이 드라마는 인간 실존의 외로움에 대처하는 부적절한 방법에 대한 이야기였다. 경희는 바람피운 이유가 외로워서였다고 말한다. 끊임없이 애인 사이를 떠도는 효주도 그렇게 보인다. 이들의 OST 테마는 “그게 다 외로워서 그래”이다.

누구나 외롭다. 결혼해도 그렇고 아니어도 그렇다. 결국 인생사 인연이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니 우리 모두, 자신의 외로움을 긍정하며 각자의 시간을 씩씩하게 채워나가는 수밖에.

 

진수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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