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당 보리당 보리 보리 당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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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당 보리당 보리 보리 당당
  • 한상봉
  • 승인 2017.09.18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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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모든 삶은 장엄하다]-20

<정글>이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업튼 싱클레어가 쓴 <힘의 예술>(종로서적, 1979)의 「민중당원 회의」라는 글에서 붉은 영웅들과 그리스도교적 순교자들이 모두 예언자적 전통 위에 서 있음을 풍자적으로 잘 보여준다.

그들은 살아서 철모르는 바보로 취급받았으며, 죽어서 경축되거나 저주받았다. 그러나 이와 상관없이 민중의 역사가 그들의 제단 위에서 진보하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신문 기사처럼 씌어 있는 이 글을 우리 사정에 맞추어 적절하게 손질해 보았다.

2019년 9월 1일, 무주 구천동 발신, 『개벽일보』(開闢日報)

무주 구천동에서 소동이 벌어지다. 소란한 괴짜들 집회. 남방(南方) 풀밭의 야생의 바보들, 다수 득표를 얻어 다음 12월에 지복년(至福年)이 오리.

원단(原緞) 그리스도교 광신자들이 무주 구천동(無主九泉洞)에서 어처구니없는 정당 발기 대회를 열었다. 서울, 대구, 부산, 광주, 목포, 전주, 대전, 청주, 원주, 춘천, 안동에서 도시 탈출을 감행한 무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상주, 함창, 여주, 이천, 해남, 함평, 김제, 영광, 단양, 사북, 변산, 당진, 감곡, 괴산 등지에서도 시골뜨기 광신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화폐 기피증이 돋은 사람들인데 세종(稅從)이며 이황(吏皇)이며 이이(利利)의 얼굴만 봐도 사방팔방 구역질을 해대는 종자들이었다.

거리엔 그들이 타고 온 자전거와 스쿠터, 경운기 소리로 왁자하고, 그들이 북적거리는 산장(山莊) 복도는 온통 욕지기로 혼을 빼놓을 지경이었다. 아홉 곳에서 샘이 솟는다는 구천동(九泉洞), 땅 임자가 따로 없어 자리 잡고 먼저 천장을 올리면 하룻밤 노숙을 면할 수 있다는 고장인지라 떠돌이, 굼벵이, 뭐든 새로운 것이라면 마다 않는 각종 매니아들까지 꽉 들어찼다. 게다가 정치 웅변가와 연설광, 돌팔이 의사와 동성애자, 머리가 긴 사내들과 머리 짧은 계집애들, 빈털터리와 땅과 사랑의 자유를 부르짖는 빨치산들로 난장판을 이루었다.

몇 년 동안이나 그네들은 이 대회를 기다려 왔는데, 이 집회야말로 금권 재벌 정치가들의 손아귀에서 정권을 탈취할 수 있는 영웅적인 회의가 될 것이었다. 오늘 이 무주 구천동에 오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이는 저 금융가 서울 명동ㆍ종로 거리의 광신자가 그를 붙잡아서 정신 병원의 한 방에다 가두고 잠궈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본회의는 내일 아침 10시에 열리게 되어서, 오늘밤엔 모든 연설가들이 자신들의 정당을 만들기 전에 그 국민에게 호소하고 지원을 요청할 수 있는 마지막 절호의 기회였던 까닭에, 대기실에선 청중도 아랑곳없이 모든 사람이 걸상 위에 올라가 일제히 떠들기 시작했다.

맨발인 예레미야(隸愛美耶)는 내일 회의에서 지명 연설을 하도록 내정되어 있었다. 넥타이도 없이 대충 걸쳐 입은 남방은 옷깃이 제 맘대로 꾸깃꾸깃 구겨져 있었다. 그는 밀밭 때문에 부르짖었다. 우리 농촌의 밀밭을 뿌리 뽑고 외국에서 수입한 농약 대량 투입형 밀가루를 죄다 큰돈 주고 사먹는 현실을 개탄하려는 것이었다.

또 한편에서는 강진(岡眞)에서 올라온 ‘슬픔의 이사야(異思也)’가 있었는데, 그는 끔찍하리만큼 처절한 모습이었다. 턱수염은 허리와 바지, 심지어는 발끝에까지 닿을 듯이 헐떡거린다. 가죽만 덧씌워진 메마른 팔뚝을 휘저으며, 그의 별명처럼 “슬프도다, 슬프도다, 슬프도다. 여기에도 슬픔, 저기에도 슬픔. 슬프도다 저들, 부정한 법령을 공포하여 빈민을 감옥에 집어넣는 자들. 그들은 군대와 경찰과 구사대에게 완장을 채우고, 가난하고 별볼일없는 이들에게는 수갑을 채우는구나. 고아는 복지원에 넘겨지고, 과부들은 희생당하며,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빼앗기는구나.…… 눈물 훔칠 자리조차 죄다 솎아 가는 비정한 자들아, 이젠 너희가 걸림돌이 되리라.”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청중이 그의 머리 둘레에 후광으로 보일 만큼 많은 풀씨와 옥수수 먼지를 뿌려 댔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하느님의 영감을 얻었다고 단언하고서는 청중에게 선포하였다. “주님께서 기름 부으시어 나를 깨끗하게 함은 겸손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케 하려 함이며, 주님이 나를 보내심은 상한 영혼을 위로케 하고 감옥에 갇힌 자들을 놓아 주려는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보리당 보리당 보리 보리 당당

천둥 같은 목소리라는 점에서, 상주 함창(含娼)에서 올라온 예언자 미가(彌家)말고는 이사야에 버금 가는 사람은 없었다. 미가는 ‘애통하는 미가’라고 해서, 서울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곡소리로 독설을 퍼붓는 무뢰한으로 통했다. 이마가 훤히 벗겨진 이 늙은이가 사과 궤짝 위에 올라서자 본 통신원은 그의 말을 밟아 가듯 적어 보았다.

“그들은 서울공화국을 피로써 건설하였고, 지천으로 솟구친 마천루는 부정 행위로 세웠다. 그래서 장관은 촌지가 있고 없음에 따라서 결재하며, 순검은 노점상의 푼돈을 뒤지며, 교사는 품삯 때문에 가르치며, 예언자는 그러한 까닭으로 돈을 위해 예언한다. 따라서 이젠 공화국 수도를 갈아엎어 논밭으로 만들어야 하겠고, 마천루는 잿더미로 만들어야 하겠다. 돈 세던 엄지손가락에 쟁기를 들리고, 방아쇠를 당기던 검지손가락에 똥통을 들려야 하겠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이처럼 불쌍한 통곡인(痛哭人)이거나 새로운 세상을 바라는 혁명아들이었다. 그 자리에는 유명한 광주 망월동에서 예까지 맨발로 걸어왔다는 ‘귀신 같은 엘리야(蘖理也)’도 있었고, 재야 인사로 이름난 ‘분노한 아모스(暗號數)’도 있었다. 그리고 죄인들을 간단히 계곡물에 적셔서 거듭나게 한다는 자칭 세례자라는 ‘요한’(凹恨)도 있었다.

세례는 특히 찌는 듯이 더운 날씨에 몇 사람에게서 그 효험이 나타난 적이 있기는 하다. 세례를 베푸는 예언자는 강원도 골짜기의 옥수수밭을 망치는 메뚜기를 잡거나, 아카시아 나무숲에 있는 벌들이 공급하는 야생의 벌꿀을 먹으며 살아간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예언자가 식량 주머니를 차고 다니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점이다. 현지 조달을 생명으로 하는 원단 행려자였다.

그가 산장 마루바닥에 앉아 어수룩한 멍청이 청년들과 더불어 꽈배기 과자를 안주 삼아 쐬주를 마시고 있다. 그 밖에도 호세아(好世牙), 하바꾹(河亞國), 욥(葉) 등 여러 명 있어, 내일 본회의에서는 모두 아홉 명의 예언자가 연설하기로 되어 있었다.

무주 구천동에서는 내일 새로운 정당을 발족시킬 예정이다. 보리당(菩提黨)이 바로 그것이다. 사전에 배포된 보도 자료에 따르면, 이 정당은 예언자들에 의해 운영되며, 수행자 가운데 직원을 천거하여 무보수로 일한다. 그렇다면 이 정당의 정강은 무엇인가? 경향 각지는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고, 부족한 물산(物産)은 사용 가치에 따라 서로 교환해야 한다. 그러나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고, 남겨진 것으론 다른 나라 백성을 무조건 돕는 게 당연하다.

모든 마을마다 자전거를 달리게 하고 시내에선 자동차를 타지 못하게 하며, 공공 요금은 공무원들이 메뚜기와 푸성귀로 살아가게 되는 한이 있다 해도 값싸야 한다. 모든 금전에 대한 이자는 금지되어야 하며, 하느님의 예언자는 이를 어기는 사람을 ‘고리대금업자’라고 부르며 천민 대우를 할 수 있다. 그들의 정강 가운데 위에 해당하는 세부 항목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다.

"만일 그대의 형제가 가난해져서 그대와 더불어 쇠퇴하게 된다면 그대는 그를 구하지 않을 수 없다. 두말 할 것도 없이, 그가 비록 이방인이거나 불법 체류자이거나 간에 그대와 함께 살아야 할 것이다. 그대는 그에게서 어떠한 이득이나 그 밖의 것을 취하거나 늘리지 말아야 하며, 형제와 더불어 함께 살도록 하신 그대의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대는 어떠한 돈이라도 빈자에게 비싼 이자를 받고 꾸어 주지 말며, 그대의 양식을 이용하여 이윤을 챙기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이 거저 주신 것은 필요한 이에게 거저 주어야 한다."

보리당의 보도 자료에는 자신들이 생산한 모든 물건이 자신의 노동력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선물로 주신 하늘의 빛, 땅의 거름, 바람, 비 그리고 공기 사이에서 이뤄지는 우주적 춤의 결과임을 잊지 말라고 굵은 펜으로 밑줄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만일 이렇게 하고도 부족하다면, 어떤 형태의 계약에 의한 것이든, 노예 제도는 법률로써 금지되어야 하며, 1999년에 시작하여 매 50년마다 모든 빚은 탕감되고 모든 사람은 새출발을 하여야 한다.

이 모든 정강들이 회의에서 통과될 때마다 참석한 괴짜들은 동의하는 뜻으로 “보리당 보리당 보리 보리 당당”(菩提黨 菩提黨 菩提 菩提 黨黨)이라고 연호할 예정이다. 아마도 이 정강 정책이 수정 없이 언론에 발표된다면, 현재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보신당(保身黨)의 총재(銃在)는 도대체 이 과격 분자들의 몸가짐이나 광신적인 태도에 대해서 어떻게 논평하고 대응할지 주목된다. 그들은 아마 이렇게 서로 물으며 날을 샐지도 모른다.

“무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소?”


[출처] <연민>, 삼인, 2000. 이 글은 제가 삽십대 중반 <공동선> 편집장 시절에 쓴 글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20년이 되었군요. 세월이 흘러도 마음과 생각의 갈피는 달라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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