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죽음 너머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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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죽음 너머를 생각하다
  • 이은석
  • 승인 2017.09.17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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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석 칼럼]

날이 선선해지면 간혹 우울감에 빠지곤 합니다. 가을을 탄다고나 할까요. 맑은 하늘을 보면 더 스산한 마음이 들고 불안감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기도 합니다. 이런 증상을 처음 느꼈던 것이 중학교 시절이니 꽤 오래 된 이야기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런 증상의 시작은 다가올 시간에 대한 불안감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었습니다.

사철이 명확한 이 땅에서 가을은 수확의 시간이고, 이 수확은 다가올 겨울이라는 고난의 준비이자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인생사를 한 해로 축소하자면 가을은 삶의 성과를 수확하고 거룩한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선선한 가을바람에 마음이 조급해짐은 해 온 일에 대한 불만이고, 끝을 제대로 맞이할 수 있을지 불안하기 때문이겠지요.

아직은 한창일 나이지만 삶의 끝에 대한 두려움은 점점 커집니다. 이룬 일이 없기에 더 하겠지만 끝자락에 기억될 내 실체의 모호함에 증상은 더 심해집니다. 삶 이후의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약한 믿음은 충분한 위로를 주진 못합니다. 그저 두렵습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믿었던 첫 마음의 끝을 본 사람들

인간이 알고 있는 가장 명확한 지식은 ‘모든 생명은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종교가 죽음 너머의 세상을 이야기하지만 실상 아무도 그 세상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알지 못하는 세상이기에 마음껏 상상하고 희망의 자락을 만들지만 이웃이나 내 죽음에 직면하면 슬픔이고 암흑입니다. 풀 수 없는 문제 앞에 작아짐이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에 이 두려움을 이용해 사람을 등치는 사기도 흔합니다.

그런데 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들이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이유로 죽음을 선선히 받아들였던 사람들, 순교자들입니다. 왜 이분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을까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믿었던 첫 마음의 끝을 봤기 때문일 겁니다. 이제까지 살아왔던 세상과는 다른 세상을 만났기에 현세의 죽음이 하나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럼 순교자들이 만났던 첫 마음의 끝은 어떤 것일까요?

복자 황일광 시몬(1757~1802)의 일화는 이 물음의 실마리입니다. 복자는 두 개의 천국을 이야기합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과 세상에서 만난 천국입니다. 천한 신분으로 밑바닥에서 체념하며 살았던 삶이 복음을 만나면서 새로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 세상은 바로 천국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복음 그 말 자체로 기쁨이고 기쁨의 세상을 살고 있는데, 믿음을 막는 자들, 참 세상을 막는 자들이 휘두르는 칼이 뭐 그리 두려웠겠습니까!

궁극을 맛보는 기회, 죽음 너머의 세계를 만나는 기회는 쉽게 얻을 수 없다고 합니다. 선택된 사람들만 맛볼 수 있는 은총이라고도 합니다. 그렇기에 죽음을 넘어서는 믿음을 보여주는 순교도 자비로운 하느님의 은총의 결과라고 합니다. 그러면 저처럼 범속한 인간에게는 그런 은총의 기회가 없는 것이 아닐까요? 그저 일상을 꾸역꾸역 살아가면서 은총을 갈구하며 짬을 내 시간을 희생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내가 따르고자 했던 스승 예수의 삶은 적어도 나라는 개인의 삶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승 예수는 교회라는 휘황찬란한 조직에 갇혀 박제로 남아 있게 될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세상에 박물관인 교회만 남아 있을 것입니다.

교회도 희망을 주지 못하고 

희망의 단초는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에서 찾아야 합니다. 나날을 살아가는 장삼이사들이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세상과 비교되는 ‘교회’라는 공동체가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복자의 체험도 그 ‘교회’였습니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함께 어울려 다른 세상을 이야기 했던 그 ‘교회’말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가면서도 막막함이 사그라지지는 않습니다. 가을날 이룬 것이 없어서 우울한 내 처지마냥 우리가 모여 있는 ‘교회’도 그리 큰 희망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리 저리 들리는 추문들 속에서도 휘황찬란하게 올라가는 거대한 건물을 보면 무지렁이 평신도는 한껏 움츠려듭니다. 젊은 시절부터 끊임없이 외쳤던 쇄신이니 복음이니 하는 말들도 생경해지기도하고요.

이게 위안이 될지 모르겠지만, 순교자들이 품었던 희망, 죽음 그 너머에서 찾은 희망을 오늘 이 시간에 저 자신도 찾고 싶습니다. 세상 살기 힘들기 때문에 가슴에 품은 답답함을 벗어버리고 가진 것이 없어도 기쁠 수 있는 그런 다른 세상을 만나고 싶습니다.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없겠고, 남아 있는 힘도 별로 없지만 그런 다른 세상이 내가 믿었던 신앙 공동체인 ‘교회’였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보여주고 싶습니다.

순교할 수 있는 용기가 하느님의 은총이었듯, 그런 마음을 잊지 않는 길도 은총이지 싶습니다. 하느님께 그 은총을 내려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래야만 이 가을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이은석 베드로
정의․평화․민주 가톨릭행동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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