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앞에서 웃음을 챙긴 교회"… 희망원과 암브로시오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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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앞에서 웃음을 챙긴 교회"… 희망원과 암브로시오의 눈물
  • 유대칠
  • 승인 2017.09.11 12: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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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의 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 14]

항상 힘든 사람은 있다. 어디든 더 힘든 사람은 있다. 과거에도 지금도 항상 힘든 사람은 있었다. 없던 적이 없다. 고대 교회 시대도 다르지 않다. 그들의 시대에도 힘든 이들은 있었다. 인간이지만 인간으로 있지 못한 이들이 그들의 시대에도 있었다. 억울하지만 억울하다는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던 힘든 이들이 있었다. 아예 힘들다는 말 자체가 허락되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어쩌면 지금도 인간 처지의 이러한 비참함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대구 희망원에서 힘들어한 이들의 눈물과 아픔을 그려보자. 장애와 가난으로 힘든 삶을 이어가던 이들이 가톨릭교회에서 운영하는 곳에서 죽었다. 교회가 운영하는 곳에서 이 사회의 약자들, 그 힘없는 이들이 죽었다. 그리고 이어서 들리는 이야기들은 더 충격적이다.

바로 ‘돈’이다. 돈이 있었다. 장애와 가난으로 힘들어하는 이들 앞에서 거래 금액을 되돌려 받는 방식으로 비자금을 만들었다. 이를 폭로하려는 직원에서 입막음용으로 돈을 건넸다. 범죄다. 이 모든 것이 범죄다. 장애와 가난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을 두고 일어난 사악한 짓이다. 그것도 신의 이름으로 사랑을 전한다는 교회가 운영하는 곳에서 일어난 사악한 일이다.

장애와 가난, 힘들다고 외쳐도 크게 울려주지 않는 이 잔인한 사회에서, 너무 억울하고 힘들어도 그 울음소리조차 따뜻이 들어주지 않는 이 잔인한 사회에서, 그저 한 없이 아파만해야 했다. 억울하게 아파하고 있다고 울어도 아파만해야 했다.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이들 조차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은 세상에서 그들은 얼마나 억울하게 아파만해야 했을까?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한다는 이들 조차 그들의 아픔을 안아주지 않으니 말이다.

폭행, 학대, 급식비 횡령, 부당 작업, 감금 ... 등 생각하기도 힘든 일들이 일어났다. 사랑을 실천한다는 곳에서 말이다. 그들은 과연 어디에 희망을 두어야한다고 생각했을까? 절망, 그들의 절망이 그러진다. 희망을 준다는 곳에서 느낀 절망 말이다.

 

Sanctus Ambrosius

절망의 고통, 그 고통을 알아야 한다. 얼마나 아픈지 그 아픔에 공감해야 한다. 암브로시오는 힘든 이의 절망, 그 절망의 고통을 알라 한다. 자기 이익을 위해 타인의 아픔 따위는 무시하는 이기적 신앙을 향해 분노한다. 함께 울어야 한다. 고통에 공감해야 한다.

“생각해봅시다. 자녀 가운데 누구를 먼저 팔아야 할지 선택해야 하는 아비의 마음을 말입니다. 그 아비는 이렇게 말하겠지요. ‘누구를 먼저 팔아야 하는가! 설사 한 아이를 판다해도, 그 돈으로 남은 아이들을 먹여 살리지도 못하는데, 괴로운 근심만이 남았구나, 누구를 팔아야할 것인가! 어찌 돈을 받고 자식을 노예로 팔 수 있으며, 가격을 흥정하겠는가! 두 눈을 뜨고 어찌 이를 보겠는가! 어찌 팔려가는 아이에게 마지막 작별의 입맞춤을 하겠는가!’”(<나봇 이야기 5.22-23>)

가난한 이의 아픔을 남의 아픔으로 두어서는 안 된다. 삶이라곤 고통일 뿐인 사람들, 절망이 일상인 그들의 그 삶에 공감해야 한다. 함께 울어야 한다. 그들의 눈물 앞에서 자기 웃음을 챙긴다면, 그것이 신앙이고 교회인가? 그들의 아픔 앞에서 교회의 기득권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과연 하느님의 뜻인가?

“‘그리도 많이 소유하고도 더 큰 창고를 세워야지’ 말합니다. 이 불쌍한 사람들! 창고 세우는데 돈을 그렇게 낭비하지 말고, 그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야 합니다!”(<나봇 이야기> 7,35)

가난과 장애로 절망의 삶을 사는 이에게 희망을 열어주는 곳이 교회다. 함께 행복하자는 곳이 교회이고 사랑이다. 충분히 화려한 교회를 더 화려하게 올리는 것이 교회가 아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더 많은 창고를 세우는 곳이 교회가 아니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이자놀이 하는 곳이 교회가 아니다. 가난하고 아픈 이의 희망을 절망으로 만드는 곳이 교회가 아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만드는 곳, 소유를 나눔으로 희망을 만드는 곳, 그곳이 교회다. 암브로시오가 말한 교회다.

힘든 삶의 아픔에 공감하지 않는 곳, 힘든 이의 아픔에 눈감고 자기 이기심을 우선시 하는 곳, 힘든 이의 아픔보다 자기 돈이 우선 인 곳, 희망의 이름으로 절망을 낳는 곳, 암브로시오에게 이런 곳은 아무리 화려해도 진짜 교회가 아니다. 교회일 수 없다. 가난한 이를 위해 나누고 다시 나누는 곳이 교회다. 그곳이 진짜 암브로시오가 원하는 진짜 교회다. 욕심으로 신부와 수도자가 구속되고 법정에 서는 지금, 다시금 암브로시오가 원한 그 교회를 생각한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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