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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그 사람을 가졌는가

[김유철의 Heaven's door]

바보새 함석헌(1901-1989)의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석헌 선생이 1947년에 쓴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의 육필 초고가 지난 2001년 탄신100주년에 발굴되어 함석헌기념사업회에서는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 이 시를 새긴 함석헌시비를 건립했다. 선생은 동시대인들과 후학들에게 사상가이며 민중운동가· 한학자· 역사학자· 신앙인으로 새겨졌지만 그는 시인이기도 했다. 시집 <수평선너머>에는 서정시인으로서 그의 마음이 오롯이 담겨져 있다. 함석헌이 말한 ‘그대’를 생각하면 예수가 가파르나움에서 마주친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 네 사람이 시나브로 떠오른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어

"며칠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파르나움으로 들어가시니, 그분이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문 앞에도 빈자리가 없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설교하셨다. 이 때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떠메고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분 가까이 데려갈 수 없어서, 그분이 계신 처소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가 누워 있는 침상을 달아내려 보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아들이여, 그대의 죄는 용서받았소”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2.1-5: 200주년 성서)

예수께서는 중풍 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중풍병자를 예수 앞으로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일으켜 세우셨다.

인생길은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여정이다. 내 인생은 내가 살아야 하지 그 누구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그러나 좋은 친구와 이웃을 가진 사람은 인생여정이 외롭지 않다. 어깨동무 하고 함께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나를 대신해서 병을 앓아주지 않는다. 내 병은 내가 앓아야 한다. 그러나 좋은 친구와 이웃들은 나의 고통을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좋은 친구와 이웃은 안전한 피난처요, 보화요, 생명의 신비한 약이다.

德不孤必有隣

집회서에 이런 말씀이 있다. “성실한 친구는 안전한 피난처요, 그런 친구를 가진 것은 보화를 지닌 것과 같다. 성실한 친구는 무엇과도 비길 수 없으며 그 우정을 값으로 따질 수 없다. 성실한 친구는 생명의 신비한 약인데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만이 이런 친구를 얻을 수 있다”(집회 6,14-16: 공동번역)

중풍병자는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좋은 친구들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 발로 예수 앞으로 걸어 나갈 수 없었지만, 친구들이 그를 예수 앞으로 인도했다. 그들의 믿음은 예수를 감동시켰고 예수는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웠다.

공자는 ‘덕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으니 언제나 좋은 이웃들이 있기 때문이다.(德不孤必有隣 덕불고필유린)’고 했다. 인생길을 걸으면서 덕스러운 삶으로 좋은 친구와 이웃을 만들어야 한다. 그들은 내가 궁지에 빠졌을 때 손을 내밀어 나를 도와줄 것이다. 그러나 이기적이고 옹졸한 삶으로 적과 원수를 만들게 되면, 그들은 내가 궁지에 빠졌을 때 고소해하면서 외면하며 돌아설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벗과 이웃을 만드는 사람이어야지 적과 원수를 만드는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벗’을 원한다면 ‘벗’이 되어야

예수가 말씀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마태 6.3)는 말은 스스로 한 일에 대한 자랑질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하라는 뜻이 숨어 있을 것이다. 암튼 그 말씀은 자신의 공로에서 머물지 않는 일이며 주고받음의 행위가 아니라 단지 드림이 이루어진 일에 불과 한 것뿐이다. 벗과 이웃은 나의 드림에서 비롯된다.

모양과 값으로 이루어진 물질의 드림보다 모양도, 값도 없는 자신의 온기가 담긴 드림은 'dream'이며 예수가 바라본 하느님나라의 현존태이다. 함석헌 선생이 ‘그 사람’이라 부른 한사람이든,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명의 ‘그들’이든 삶을 살아가는데엔 벗들이 필요하다. 그것은 밥이나 물처럼 우리를 살게 하는 일이다.

단순한 스침의 인연이 아니라 소울메이트라고 불릴 벗들이 곁에 있어야 한다. 마음과 마음, 신뢰와 신뢰가 우선되지 않는다면, 행여나 이해타산이나 순간의 사탕발림에 머물러 있다면 그런 벗과 도모하는 일은 사상누각이 되기 십상이다.

함석헌이 말한 ‘그 사람’을 원하는가? 나를 들쳐 업고 예수 앞으로 데려갈 친구들을 원하는가? 그러면 먼저 ‘한밤중에 찾아오는 벗’(루카 11.5)을 맞아들이고, ‘잠든 친구를 찾아가 깨우고’(요한11.11), ‘친구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며’(요한15.13), ‘세리와 죄인들에게 다가가는’(마태11.19) 그런 사람이 되는 날 예수는 나를 ‘친구라 부르며’(요한15.15) 사람들 사이에 벗들이 생길 것이다. 하느님나라는 함께 만들며 맞이할 지금 여기의 세상이다.

 

김유철
시인. 한국작가회의.
<삶 예술 연구소> 대표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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