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구유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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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구유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 월리암 J. 쇼트
  • 승인 2017.09.11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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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즐거움-5

그레씨오의 크리스마스

1223년 크리스마스 2주일 전, 프란치스코는 앗씨시 서쪽의 그레씨오 마을에서 멀지않은 언덕배기의 작은 암자에 머물고 있었다. 동료인 첼라노의 토마스 형제에 의하면, 프란치스코는 지오바니라는 친구를 불러 다가오는 축제를 특별히 준비하는 일을 도와달라고 청했다. 그는 동물들과 건초를 암자 가까이 있는 동굴 앞에 가져오라고 요청했다. 거기에서 마을 사람들과 형제들에게 예수 탄생의 물리적 조건을 보여주기 위한 준비를 하자고 말했다.

그는 하느님의 아들이 외양간에서 소와 당나귀에, 짚과 추위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어떤 느낌일까를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게 하였다. 프란치스코의 형제들과 그레씨오 마을 사람들이 성탄절 전야에 동굴 앞에 모여와 횃불을 켜고 성가를 부르며, 구유 위에 설치한 제단에서 사제와 함께 미사를 드린다.

프란치스코는 유다인 랍비처럼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고 감격에 젖어 설교를 한다. 당대 사람인 토마스 첼라노는 마치도 아기 예수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오래 동안 잊혀져 왔다가 그날 밤 살아나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 주위 산의 나무와 돌들 모두에 사람들이 부르는 찬미 노래가 메아리로 울려 퍼졌다.

 

이러한 단순한 예수의 탄생 장면은 다음 세기에 프란치스코 회원들이 앗씨시를 떠나 움직임에 따라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이제는 전 세계에서 크리스마스 기념 때에 익숙한 장면이 되었다. 상업화로 고통받고, 그 중요성이 때때로 맹목적으로 감상에 젖어버리기도 하지만, 본래 예수의 탄생 장면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가난한 이들의 매일 삶에, 창조의 세계에, 짚과 바위의 세계에 들어오심을 강력하게 인정하는 선언이었다.

예수탄생, 성찬례 그리고 동정녀

그리스도의 탄생축일에서 프란치스코가 감명을 받았던 것은 단순함, 겸손함과 가난이었다. 많은 방식으로 성탄은 프란치스코에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개념을 형성하도록 도와주었다. 토마스 형제는 ‘육화의 겸손’에 관해 프란치스코가 깊은 이해를 했다고 말한다.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하늘의 가장 높으신 아버지께서는 아버지의 이 말씀을 선포하셨다. 너무나 소중하고, 너무나 거룩하며 영광스러운 이 말씀은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동정녀 마리아의 태 속에서 인간의 살과 우리의 연약함을 받으셨다. 말씀은 모든 것 위에 가장 풍요로운 존재이시지만, 이 세상에서 그분은 가장 복 받은 동정녀이신 어머니와 함께 가난을 선택하기를 원하셨다.

그레씨오의 크리스마스 전야 축제는 선택에 관하여 말한다. 거룩한 말씀께서 자발적으로, 마리아와 함께 삶의 한 형태로서 가난을 선택한 것이라고. 이 선택의 드라마는 앗씨시 마을 외곽의 한 언덕위에서 춥고 황량한 가운데 오로지 동물들과 사람들이 함께 따스함을 나누는 모습으로 감명을 일으킨다.

프란치스코는 그레씨오 주민들과 그의 형제들이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복음의 설명과 그 상황을, 또한 ‘아기인 예수님의 필요가 거의 채워지지 않는 상황’을 직접 보기를 원했다. ‘그곳에서는 단순함이 명예를 얻고, 가난이 고양되며, 겸손이 격려를 받는다. 그리고 그레씨오는 말하자면 새로운 베들레헴이 되었다.’

단순함, 가난, 그리고 겸손 이 세 가지는 프란치스코에겐 예수님의 전 삶을 보여주는 표징들이었고, 그런 삶을 따르고자 했다. 이 세 가지를 똑같이 기념하는 것이 성찬례의 기념이며, 단지 그레씨오 동굴의 구유뿐만 아니라, 매 성찬례에서 이루어진다. 프란치스코는 미사가 거행될 때마다 마치 주님의 육화가 다시 확인된다고 생각했던 것과 같다. ‘작은 빵 조각’은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바로 그곳이 하느님의 아들이 ‘숨어 계신 자리’이다.

프란치스코는 유한한 것 안에 담겨있는 이 무한함의 역동성을 ‘하느님의 겸손’으로 보고 있으며, 이 겸손은 단지 찬양의 대상만이 아니라, 또한 모방해야 할 대상이다.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은 다시 말하자면, ‘하느님처럼 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의 표현대로 하자면, 마리아는 ‘교회가 된 동정녀’이다. 예수님처럼 마리아도 가난하다. 형제들에게 필요가 있을 때 문전에서 문전으로 탁발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권고하면서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의 모습과 함께 마리아를 겸손과 가난의 모범으로 제시한다. 예수님이 태어난 가난의 상황은 또한 마리아의 삶과 모든 예수님의 제자들의 삶의 상황과 같았다. 이 가난의 상황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로운 선택이고, 고양으로 이끌 삶의 방식을 끌어안는 것이었다.

크리스마스기념, 성찬례기념, 마리아의 모범은 모두 프란치스코에게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가난과 겸손을 가리켜 주고 있다. 하느님의 아들의 육화, 인간이 되고 물질이 되는 육화를 프란치스코학파에서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가난’이라는 말이다.


[원출처] <가난과 즐거움-프란치스코회의 전통>, 월리암 J. 쇼트(프란치스코회)
[출처] <참사람되어> 200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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