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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지갑을 놓고 왔다, "희생자는 어떻게 치유되는가"<아 지갑을 놓고 왔다>(미역의 효능, 2017 5. 31 완결)

[진수미의 문화칼럼] 

모성은 비판하기 어려운 가치이다. 여성은 희생적 여성상을 기반으로 한 어머니 숭배를 통해 성차적 가치를 보장받고, 남성은 외부적 가치와 무관하게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존재이자 인생 여정을 마치고 돌아가야 할 시원적 장소로 어머니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부정하는 시도는 여성과 남성 모두를 적으로 돌리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엄마가 죽었다. 모든 것이 가능해졌다

<아 지갑을 놓고 왔다>, 그림 부분.

신성 비판은 어떠할까. 나는 사회에서 모성이 절대적 가치로 수용되는 방식이 신성 숭배와 유사하다고 느꼈고, “엄마가 죽었다./ 모든 것이 가능해졌다”로 시작되는 시를 쓰기도 했다. 주지하는 것처럼 이는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무신론자 이반에 의해 스메르자꼬프에게 주입된 사상―“신은 죽었다. 모든 일이 가능해졌다”―을 활용한 것이다.

이 작품은 작가 정은영에 의해 <엄마가 죽으면>(2005)이라는 시각예술로 변주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형상화와 공감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는 미지수다.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문구는 널리 회자되지만 신성을 우회로 한 비판이 대사회적인 모성 균열내기로 곧장 연결되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것 같다.

이 한계는 아마도 예술사 속에서 형성된 시, 순수미술과 같은 ‘소위 고급예술’이 사회 구성원과 마주치는 접점이 좁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리라. 오늘날 예술이 사회적 메시지를 대중에게 폭넓게 전달하기 위해서 갖춰야 할 조건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단 작품이 대중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을 갖춰야 하고, 다음으로 작가와 독자, 또 독자 간 의견이 자유롭게 소통될 수 있는 플랫폼이 필요할 것이다. 최근 나는 이를 모두 만족하는 작품을 발견했다. ‘미역의 효능’이 그리고 쓴 웹툰 <아 지갑을 놓고 왔다>(이하 ‘아지갑’)이 그것이다.

<아지갑>은 성폭력 후유증으로 인간이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 병을 앓는 노선희라는 여성을 중심으로, 그녀의 어머니 경자와 딸 노루의 애증을 다루고 있다. 웹툰은 노루가 9살의 나이로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하는 데서 시작한다. 노루는 아픈 엄마가 걱정되어 사후에도 엄마 곁에 머문다. 노루의 사랑은 아이답게 자기중심적이고 배타적이지만, 자신이 죽자 생의 의미를 상실한 엄마를 챙기는 어른스러운 면도 있다. 문제는 엄마들의 모성애이다.

경자는 딸 선희가 사촌오빠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는데도 남편이 가해자 편을 들면서 사건을 덮으려고 하자 이혼을 결심한다. 이후 식당을 차려 홀로 딸을 키우며 살아간다. 녹록치 않은 삶의 무게에 지친 경자는 종교에서 안식을 찾고 선희에게도 신앙을 강요한다. 경자의 모성애는 이혼도 불사할 만큼 지극했지만 한편으로는 손녀에게조차 확산되지 못하는 편협한 것이었다. 사후 혼백 상태가 된 노루는 경자의 꿈에 들어가 경자와 선희의 갈등을 해결하려 하는데, 거기서 감춰진 경자의 무의식을 발견한다. 그리고 경자가 손녀인 자신을 딸의 행복을 가로막는 ‘혹덩이’로 인식, 자신의 죽음을 기뻐했다는 사실을 알고 상처 입는다.

선희에게 딸 노루는 유일하게 인간으로 보이는 존재다. 노루는 선희의 정신적 균형을 유지하게 하는 보루였다. 노루가 죽고, 불안정한 정신으로 현실에 직면하기 어려웠던 선희는 노루의 기억을 지워버린다. 망각의 이면에는 자신을 홀로 남기고 죽은 노루에 대한 증오가 자리하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마지막 인사를 하러 꿈속으로 찾아온 딸의 두 발을 자르는 광기를 보여준다. 꿈은 일상의 구속과 억압에서 벗어나 소망충족의 기능을 한다. 즉, 선희는 꿈을 통해 자신의 적나라한 욕망을 드러낸 것이다.

경자와 선희의 사랑은 병들어 있다. 이들의 감정은 사랑보다 집착에 가깝다. 무관심이 사랑의 반대로 여겨지듯이, 집착은 사랑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집착은 사랑하는 상대의 감정과 선택을 존중하지 않는 종류의 사랑이다. 경자와 선희의 모성애는 딸을 독립된 개체로 인정하고, 딸의 입장에서 상처와 아픔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아지갑>은 모성애 비판을 성폭력과 연계시킴으로써 여전히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의 모순을 적절히 형상화했다. 성폭력 트라우마에서 기인된 선희의 증상-그녀의 눈에 사람 얼굴은 새대가리로 보인다-은 웹툰에서 유머러스하게 다루어졌지만 상처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최근 폭발적 성장세를 보이는 웹툰은 스크롤만 내리면 대중의 피드백을 독자와 작가 모두가 즉각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활발하게 소통이 이루어지는 문화 영역이다.

 

그림=진수미

모녀는 독립적 인격으로

<아지갑> 읽기에서 인상적인 것은 성폭력 피해자의 고백과, 그에 대한 격려와 지지가 만나는 댓글이었다. <살인의 추억>의 저 유명한 대사-“한국은 강간공화국”-를 환기하는 듯, 성폭력 피해자임을 고백하는 독자가 다수라는 점이 놀라웠다. 가부장적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은 피해자가 공개를 꺼리고 가해자가 범죄 사실을 당당하게 고백하는, 납득하기 어려운 전개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처럼 잘못하면 피해 당사자가 사회적으로 비난받게 되는 어둡고도 내밀한 감정과 사건을, 문화 생산물을 매개로 고백함으로써 스스로 치유하고 용기를 얻게 하는 사회적 기능을 <아지갑>과 같은 웹툰과 댓글 창이 수행하는 것이다. 이는 미혼모 선희를 지지하고 격려했던 인물들 같은, 가족을 대신하는 사회적 연대와 유사한 기능이다.

<아지갑>은 2017년 부천만화대상에서 대상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모성애의 광기를 다룬 대중예술은 이전에도 있었다. 그것은 <올가미>나 <마더>처럼 모자 관계가 중심이거나 <마요네즈>처럼 성격이 다른 모녀의 갈등과 화해를 그리는 방식으로 재현되었다. <아지갑>은 이와 다르다. 모녀를 중심으로 모성애의 광기를 비판하면서 화해를 모색하지 않는다. 서로가 별개의 인격체임을 인정하고 독립된 삶을 사는 해법을 보여준다. 또한 성범죄가 만연한 한국 사회의 여성 피해자를 치유하는 형태로 대중과 소통・연대를 이룬 작품이다. 일독을 권한다.


진수미
문화평론가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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