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매일 우리는 영혼들을 새롭게 다시 만든다
상태바
성장: 매일 우리는 영혼들을 새롭게 다시 만든다
  • 죠안 치티스터
  • 승인 2017.09.04 13: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빛을 찾는 이들을 위한 지혜-8

한 군인이 미오스 원장에게 하느님이 죄인을 용서하시는 가에 대해서 물었다. 미오스는 한동안 군인을 가르친 후 물었다: “젊은 친구 나에게 말해 주게나, 당신의 외투가 떨어지면 그것을 내 버리겠는가?” “아니요,” 군인이 대답했다. “난 외투를 수선해서 다시 입을 겁니다.” 그러자 원장이 그에게 말했다: “자네가 외투를 그만큼 아낀다면, 하느님은 당신 피조물을 더 아끼시리라고 생각되지 않나?”

 

사진출처=pixabay.com

깨우침은 영혼을 열어 모든 곳에서 하느님의 생명을 자각하고, 삶의 거룩함, 우주의 상호연결, 창조된 만물의 하나됨을 깨닫게 한다. 도덕과 성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의식이지만, 이 의식은 도덕도 성숙함도 아니다.

하느님과의 일치는 모든 곳에서, 내 안에서 내 주변에서 내 위와 아래에서 살아있는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는 것이다.

아일랜드의 신비가가 말했듯이, “내 앞에서 뒤에서, 나의 오른쪽과 왼쪽에서” 현존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과의 일치는 정체된 것이 아니어서 일단 성취되면 영혼을 그런 일치의 상태에 고정시키지 않으며, 일생에 걸쳐 끝나지 않는 황홀한 순간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삶은 삶일 뿐이다. 삶은 그 어떤 때와 어떤 조건에서도 냉각되지 않는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어떻든지간에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우리는 삶과 함께 있다. 우리는 계속 삶과 실갱이를 한다. 우리의 자각도 계속 커져간다. 우리는 지금 얻고있는 자각에 합당한 사람이 되려고 계속 씨름한다. 그리고 우리는 자주 실패한다.

삶은 단순히 완전함에 대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완전함은 삶이 제공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육체는 어떤 궁극적인 상태까지 발달하고 그때에 영원한 형태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다. 과학자들은 우리 신체들의 단백질 분자가 6개월마다 변화한다고 말한다. 6개월마다 우리는 다시 새롭게 만들어지고 표면상으로 다르지 않지만 아마도 그러나 새로운 모습이 된다.

우리의 영혼도 고정적인 상태에 도달하지 않는다. 매일 우리는 영혼들을 새롭게 다시 만든다. 매일 우리는 옛 결정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새로운 결정들을 한다. 우리는 기를 쓰고 싸우며 끊임없이 왜곡하고 참회한다. 매일 우리들의 삶은 하느님에게로 조금 더 자라든가 자아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간다.

관상이란 우리가 성장하기 위하여 선택한 방법들을 갖고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아를 만족시키는 일에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놓을 수 있다. 우리는 기를 쓰고 저장하며 축적하고 우리의 폐가 안에서 신음으로 쑤실 때까지 그리고 우리의 가슴이 텅빈 모습을 밖으로 내보일 때까지 나머지 세계로부터 끊임없이 경의를 요구할 수 있다.

우리는 선택한다면 자아를 영원히 숭배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저 우리자신에만 몰두하면서 다른 주제들을 무시해 버릴 수 있다. 서구문화는 자아에만 몰두하도록 지지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조장한다. 자아를 꼭 붙잡고 영원히 간직하는 것은 우리가 금세기 내내 늘 들고 행진했던 깃발이다. 그러나 또다른 선택도 있다.

우리는 오늘날 우상들의 신전인 자아를 넘어 성장하기로 선택 할 수 있다. 우리는 사이비 우월성의 이름으로 우리의 영혼을 질식시키는 규범들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투쟁 할 수 있다. 그 사이비 우월성의 내용은 여성들이란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고 남성들이 우월하다는 것, 외국인들은 우리경제를 좀먹는 사람들이라는 것, 자연은 우리의 만족만을 위해 있다는 것, 인간 존재로서 우리는 나머지 우주 위에 있으며 우주의 제약과 한계를 넘어 있다는 것 등이다.

다른 한편 우리는 스스로를 우리자신의 신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주는 것을 의미하는 삶, 성자의 선물인 삶, 바로 그 선물을 잃게된다. 관상가는 우주와 일치 속에서 성장하기 위하여 살아간다.

관상가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과 일치하고, 나머지 인류와 동조하며 우리 영혼의 약함과 만나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 이러한 자리들은 하느님의 사랑이 뚫고 들어와 우리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으로 채워진다.

성장은 단순히 죄를 피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인생을 한 단계 한 단계 살아가면서 죄라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을 피하는 것이 아니다. 죄는 실상 바로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장 분노할 때 나는 내가 평화를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함을 안다. 내가 가장 호전적일 때, 나는 나의 허세가 얼마나 가소로운지 안다. 내가 가장 양보를 하지 않을 때 나의 힘이 얼마나 나를 고립시키는지 안다.

아니다, 성장-참다운 성장-이란 하느님이 대기하고 있으며 나를 감싸주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만일 그리고 우리자신이 모든 순간, 모든 사람, 모든 사건 그리고 우리자신의 모든 체험들을 소모시키는 것을 그만둘 때에 하느님은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를 차지하실 수 있다.

관상가가 되기 위하여는 너무나 내 안에 크게 계시는 침묵의 하느님을 그 전날보다 더 의식하며 그분께로 들어가면서 매일 아침을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

 

[원출처] <Illuminated Life, Monastic Wisdom for Seeker of Light>, Joan Chittister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11월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