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아무것도 붙잡지 않는다, 심지어 거룩한 위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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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아무것도 붙잡지 않는다, 심지어 거룩한 위치까지
  • 월리암 J. 쇼트
  • 승인 2017.09.04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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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즐거움-4

육화의 겸손함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매일의 경험과 ‘영성’에 대해 듣고 읽는 것을 연결시키는 길들을 찾고 있다. 그들이 받는 영적 가르침은 자주 매일의 관심사와 연결되지 않는 것 같다. 마치도 ‘영적인 상태’를 성취하기위해서는 어떤 특별한 장소에 살고, 특별한 기교를 사용하며, 일상의 일과 가족의 책임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여가와 여유를 가져야 하는 것 같다. 육화를 강조하는 프란치스코회의 전통은 영성에 관한 대안적 관점, 인간생활의 평범한 사건에 굳건히 뿌리를 둔 대안적 관점의 영성을 마련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 글라라와 수세기에 걸친 그들의 형제 자매들에게 육화는 영감과 감탄의 끝없는 원천이 되어왔다. 13세기의 평신도 참회자인 폴리뇨의 안젤라; 시인이고 정치인이며 홀아비인 쟈코포네 다 토디; 바뇨레지오의 보나벤투라 그리고 죤 둔스 스코투스, 신학자들이 있다. 그들의 육화에 관한 저술은 프란치스코회의 전통을 이 육화의 신비에 충실하도록 도움이 되어 왔다.

Canticle of the Creatures - Brother Wind - Piero Casentini

육화한 하느님에 관해 말하기 전에, 우리는 하느님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일반적인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프란치스코 자신의 말에서 우리는 그가 육화에 관해 말할 때 마음속에 어떤 하느님을 그리고 있는지 조금 파악한다. 즉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이 선하시다고 여긴다. 프란치스코는 동료인 레오형제를 위해 직접 쓴 ‘하느님의 찬미’에서 이것을 표현하고 있다:

'당신은 선하십니다. 모두 선하십니다, 가장 높이 선하십니다.’ ‘모든 시간 내내 찬미 받으소서’에서 그는 쓰고 있다: ‘모두 선하시고, 최고로 선하시며, 전적으로 선하십니다, 당신 홀로 선하십니다’; ‘선함으로 가득하시고, 모두 선하시며, 각각 선하시고, 진실하고 최고로 선하십니다. 홀로 선하신 분 입니다.’ ‘선하시고,’ ‘선하시고,’ ‘선하십니다.’ 

하느님은 선하시고, 창조된 모든 것은 그러므로 선하다. ‘평화와 선’은 수세기동안 프란치스코회의 인사였다. 그러나 그 이상이다: 그것은 하느님과 함께 존재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또한 이 선하신 하느님을 삼위일체로 말한다: 창조주, 구속주 그리고 구세주로; 가장 높이 계신 아버지, 사랑받는 아드님, 그리고 진리의 위로자이신 가장 거룩한 성령. 이러한 위격들 사이의 친교의 마음으로부터 말씀이 세상에 보내질 것이다.

‘가장 높으신’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창조가 아드님을 통하여 진행된다. 이미 이곳에서 아드님과 모든 피조물 사이에 강력한 연계가 나타난다. 그리고 이 아드님, 모든 영적 육체적 피조물이 그분을 통하여 존재하게 된 이 아드님은 피조물들 중의 한 피조물로, 나자렛의 예수로 오고 있다.

유일한 아드님은 가난한 아이로 인간이 되어, 숨겨져 살고 있다. 아무런 부나 자리도 없이. 프란치스코는 이 육화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관대함을 알아본다. 하느님은 아무것도 붙잡지 않는다, 심지어 거룩한 위치까지. 인간 존재로 오면서 아드님은 고결한 위치를 버리고 사랑으로 인간적 한계들, 고통, 노동과 죽음까지 포옹한다.

예수님의 삶은 하느님의 생명이 움직이고 있는 그림이다. 첫 번째 훈계에서 프란치스코는 요한복음서(14,6-9)를 이용하여 이를 설명한다: ‘필립보야, 나를 본 사람은 또한 나의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프란치스코는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을 ‘보는 것’을 연습하는 시도를 했다.

프란치스코가 예수님을 주의 깊게 바라볼 때, 그는 하느님의 모상이 의미하는 바를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또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의 의미를 깨닫는다. 왜냐하면 그는 하느님의 모상이기 때문이다. 그는 훈계에서 이 깨달음을 요약한다:

"사람들이여, 주님이신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놀라운 상태를 깨달으십시오. 왜냐하면 그분은 그분의 사랑받는 아드님의 모상에 따라, 당신의 몸으로 그리고 영으로 그분을 닮도록 창조했고 형상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존재 전체가(육체와 정신) ‘사랑받는 아드님’의 모상과 닮음을 드러내고 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을 알게 된 프란치스코는 자신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자신을 알면서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을 알게 되고, 따라서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

이 깨달음은 그러나 내성적인 자기-인식을 훨씬 넘어선다. ‘타인’, 형제, 자매, 이웃은 또한 아드님의 모상을 드러낸다. 그리고 후에 보듯이 ‘형제들과 자매들’은 인간존재이거나, 천국의 존재들, 꽃들과 풀들, 혹은 우주의 네 가지 요소일 수 있다.

유일한 아드님을 통하여 창조된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묵상하면서, 프란치스코회 신학자 에릭 도일은 프란치스코의 그리스도 중심주의가 어떻게 수 세기 동안 프란치스코회의 전통에 큰 영향을 미쳤는지 명료하게 설명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향한 프란치스코의 헌신적인 사랑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되고 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프란치스코는 우리 모두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존엄성을 깨닫도록 상기시켜 준다. 우리의 몸을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아드님의 모상대로 만들어 창조하셨고, 우리의 영혼을 그분께서는 당신과 닮게 만드셨다고 프란치스코는 말한다.

이러한 성찰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저술에서 보이는 가장 심오하고 넓은 성찰들 중의 하나이다. 그는 첫 번째 아담이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상대로 창조 되었다고 확신한다. 육화한 말씀의 몸인 나자렛 예수는 첫 번째 인간 존재들의 육체들을 보여주는 청사진이었다. 프란치스코의 이런 가르침들은 단순하고 명료하므로 풍부한 신학적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은 프란치스코 학파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비전과 죤 둔스 스코투스가 공식화 하고 상세히 논술적으로 정리한 그리스도의 우위성이라는 교의의 씨앗을 품고 있는 가르침이다.

우리는 프란치스코의 이 그리스도 중심적인 비전이 이어지는 세대에 발전한 방식을 더 자세하게 살펴볼 기회를 가질 것이다. 지금은 육화의 경이로움에 몰두하며 프란치스코가 말보다 외적으로 표현한 방식들, 단순한 소품들로 가 보고자 한다.


[원출처] <가난과 즐거움-프란치스코회의 전통>, 월리암 J. 쇼트(프란치스코회)
[출처] <참사람되어> 200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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