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마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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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마술이 아니다
  • 죠안 치티스터
  • 승인 2017.08.29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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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찾는 이들을 위한 지혜-7

베사리온 원장의 제자인 둘라스 원장이 말했다: 어느날 바닷가를 함께 걷고 있었을 때 목이 말라서 나는 베사리온 원장에게 말했다, “원장님, 저는 목이 마릅니다.” 그러자 원장님은 잠시 기도한 후 나에게 말했다; “그러면 바다에 가서 마십시오”. 내가 바닷물을 마셨더니 단 맛이 났다. 그래서 나는 바닷물을 물병에 담았다. 후에 갈증이 나면 마실 것이었다. 이것을 보고 원장님이 물었다,“왜 물을 담습니까?” 나는 “후에 다시 목마르지 않기 위해서지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원장님은 말했다, “하느님은 이곳에 계시고 모든 곳에 계십니다.”

 

믿음은 관상적 삶의 문이며, 목표이고 기반이다. 믿음은 종파가 없다. 믿음은 볼 수 없지만 우리 안에서 생명의 힘을 느끼고 동시에 우리 자신의 작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의심할 바 없이 그 존재함을 알고 있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이다. 모든 곳에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깨달음에 몰두하고 죽음에 의해 강조되는 의식 속에서 살아가려는 노력에 압도되며, 관상가는 삶의 과정에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관상적 믿음은 위대한 꼭두각시 조정가에 대한 신뢰나 마술에 근거하지 않는다. 관상가는 단지 생명을 주신 하느님이 그 생명을 유지시키고 가능하게 하며 우리가 깊은 의미와 끝없는 중요성을 부여하면서 삶을 다루도록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다. 관상가는 하느님의 움에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관상가는, 베네딕도회의 규칙이 말하기를, “항상 기도하며”, 그 생명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하느님과 늘 만나는 사람이다.

믿음은 어떤 종파가 요구하는 순결 그 이상을 의미하며, 종교적 헌신 그 이상이고 소위 성인적인 엄격함 그 이상이다. 믿음은 하느님의 팔 안에 쉬는 것이며 오늘을 신뢰하고 내일을 받아들이는데, 어떤 날이든지간에 하느님이 늘 그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성이 없는 어떤 가능성이 있을 때 믿음은 그 가능성을 확신한다. 보증이 없는 불확실함이 있을 때 믿음은 그것을 견디어낸다. 명쾌하지 못하지만 삶에 목적이 있다는 신뢰가 있을 때, 믿음은 그런 신뢰의 기반이 된다. 믿음은 하느님이신 신비 속에 살아가며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믿음은 오늘의 도덕적 리트머스 시험지에 근거하여 내세에 대한 신뢰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관상가에게 “나쁜 것”과 “좋은 것”은 아무런 차이를 만들지 않는다. 나쁜 것과 좋은 것은 서로 상대가 되려는 역량을 갖고 있다. 나쁜 것으로부터 좋은 것이 온다. 우리 자신을 드러내고 성장에 길을 열어주는 것은  죄 때문이기도 하다. 성숙된 덕은 계속 만들어가는 덕이며 전혀 공격을 받지 않는 덕이 아니다. 다른 한편, 위대한 선은 그 긍정적인 영향이 어떻든지간에 자주 호전적으로 변질되며 자신의 의로움을 손상시키는 독선으로 빠진다. 그러나 나쁜 것과 좋은 것 모두는 하느님의 빛 속에 머물며 희망하고, 그것들을 초월하는 생명의 면전에서 작은 것들로 축소되는 것이다.

삶은 우리가 이기는 게임이 아니며, 하느님은 우리가 마땅히 가질 권리가 있는 트로피가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느님에게 충분히 선할 수가 없다. 다른 한편, 우리가 아무리 “악하다”고 해도 우리는 하느님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우리는 다만 매순간 그 어떤 다른 작은 신들도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을 수 없으며 그 어떤 경박하고 자기중심적인 신들도 삶의 충만함인 온전한 자각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의식에 다다르기를 희망할 뿐이다. 전체성에 이르는 것, 모든 목적들을 넘어 하느님이 주신 목적에 대한 체험, 존재하는 모든 것과의 일치가 바로 삶의 의미이다.

관상가는 삶이 과정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다고 삶의 모든 요소들이 -그것들이 아무리 세속적인 것이라 해도- 상관없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관상가에게는 모든 것이 문제가 된다. 모든 것은 하느님에 대해 말하고,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문제가 된다. 모든 것은 하느님에 대해 말하고,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 그리고 모든 것을 넘어 존재하신다.

한번에 삶의 한 조각씩만 취하는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그 안의 어떤 것이 지금 나에게 여기에서, 이 순간에 하느님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 있다는 지식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행복의 정수이다. 그것은 하느님이 온갖 시험과 시련과 내기들로 가득찬 알 수 없는 상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삶이란 우리와 함께 걸어가시는 하느님께 다다르는 길에 있어 한 걸음 한 걸음이라는 뜻이다. 그 걸음이 아무리 멀고 아무리 위험하다 하더라도.

우주공간에서 소용돌이치는 한 작은 위성에서의 삶을 생각해보면 절망하기 쉽다. 혼자 떨어져 나와서 아무런 의미도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은 인간에게 불안과 초조함을 일으킨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바로 이러한 믿음의 신비가 삶의 종말이 아니라 시작인, 영혼의 가장자리로 우리를 밀어내며 하느님, 우주 공간의 에너지인 하느님이 우리가 웃기를 기다리고 있는 우리 영혼의 중심 속으로 내려가도록 해준다.

관상가에게, 믿음은 우리가 횡단보도에 도착했을 때 녹색 신호불이 켜지는 것이 아니며 명령에 따라 암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믿음은 우리가 보잘 것 없는 초상 속의 존재로 작게 만들어버린 살아계신 하느님의 감실이 바로 삶임을 아는 것이다. 관상가에게 삶의 모든 다양한 형태들은 제각기 그것들의 바탕인 생명을 드러내준다. 관상가는 앞으로 다가올 삶은, 그것을 이미 살아왔기에 좋을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관상가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매일의 의문에 대해 마술적인 해결책을 요구하는 믿음 그 이상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자연질서를 과장시킨다는 그런 하느님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우리의 영혼이 멀리 더 자유롭게 비상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믿음은 빛인 어둠을, 부서질 것 같이 약한 세계의 경직된 부분들, 그래서 오히려 편하게 만들고 싶은 그 각각의 고통들을 우리가 기꺼이 신뢰할 때에 비로서 온다.


[원출처] <Illuminated Life, Monastic Wisdom for Seeker of Light>, Joan Chittister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11월호

 

*여러분의 후원이 하느님 자비를 실천하는 가톨릭일꾼을 양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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