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교회를 잘 몰라서 비판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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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교회를 잘 몰라서 비판한다고요?
  • 이은석
  • 승인 2017.08.29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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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석 칼럼] 

월요일 아침을 열면서 들은 소식 두가지가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그 하나가 안철수의 국민의 당 대표 수락연설입니다. 안철수는 한명숙 총리의 대법원 판결에 대해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대법원의 정당한 판결에 문제제기하는 여당에 대한 비판이었지요. 한 총리 사건이 얼마나 어이 없는 일이었는지 안철수는 관심이 없겠지요. 그저 자신의 이익, 자신의 자리만 지킬 수 있다면 억울함, 울분을 가슴에 담고 2년의 시간을 견뎌온 분의 명예니 정의니 이런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겠지요. 그런 자가 한 정당의 지도자라고 나서고 있고, 촛불혁명으로 만들어 낸 정권에 비수를 꽃고 있다는 것, 도저히 참을 수 없습니다.

또 하나, 충주성심맹아원에서 벌어진 사건의 진상을 밝혀달라고 일인 시위를 시작하신 김은순 선생님의 글을 읽고 참담했습니다. 교회의 어른이라는 분이 왜 교회의 치부를 드러내려 하느냐고 꾸짖었다고 합니다. 이 신부님의 생각은 어머니이신 교회의 자녀로서 치부를 외부에 드러내기보다는 잘 보듬어 고쳐나가야 한다는 입장일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는 늘 자기 조직을 이어왔습니다. 치부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세상의 다른 조직보다 훨씬 덜한 것 아니냐. 치부라고 하는 일들도 실수일 뿐이지 개인의 욕심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지 않느냐는 입장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부적으로 철저한 통제 시스템이 작동하는 교회가 뭘 그리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겠습니까? 그저 작은 실수를 했을지 모르지요. 하지만 그 작은 실수가 어떤 한 사람에게는 삶을 관통하는 아픔이 되기도 한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같은 논리로 정리해고를 반대하고, 노동자의 해고를 반대하며 정부에 기업에 소리를 내었으니까요. 실수가 있었다면 무엇인지 잘 밝히고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더 조심하겠다고 반성하면 될 것을 왜 자꾸 숨기려고만 하는 것인가요. 그리고 숨기지 말고 잘못했다고 하자. 억울하다는 사람들을 품어주자는 주장에 왜 이리 싸늘하게 굴어야 하는 것인가요.

오랜 기간 교회와 관련된 일을 하다보면 꼭 듣는 말이 있습니다. "그건 당신이 잘 몰라서 그런거야"라는 말입니다. 합리적인 설명보다 당신이 모르는 그런 세상이 있으니 그냥 그러려니 하라는 말이지요. 결국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냥 자기들끼리 결정하고 감싸고 묻으면 끝이 됩니다. 이제는 이런 모습은 좀 버려야 하지 않을까요? 적어도 아프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 아픔을 보듬어 줘야 하지 않을까요?

월요일 아침 분노를 일으켰던 두 가지 모두 이익을 위해 타인의 아픔을 무시하는 행태입니다. 안철수야 그러거나 말거나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어머니이신 교회는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어진 교회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고] 김은순 님의 페북 기사

"자기 부모 형제 자식의 치부를 동네방네 떠들어대는 자가 있는가?"

의지하고 존경했었던 신부님께서 청주교구청 앞 1인시위 기사를 보시고 문자를 보내오셨다. 가슴이 아리다. 다른 사제가 이런 표현을 쓰거나 말을 해도 그다지 아프지 않다. 나를 이만큼 성장하도록 도움을 주신 분이라 만감이 교차한다. 또한 현재 교회의 모습을 대변하는 문자 같아서 씁쓸하다.

"강도 맞은 이웃이 누구인지요? 신부님께 그동안 배운 가르침 대로 행동했을 뿐입니다. 교회가 치부라고 드러내지 않는다면 하느님 정의는 어디 있습니까? 세상의 정의에 대해 말하는 교회가 교회 내부의 정의를 말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존속 이유는 무엇인지요? 예수님은요?" 짤막하게 답글을 드리고 나니 맘이 아리다.

내 맘이 상처받아 아픈 것보다, 답글 보시고 아마도 힘드실 신부님을 생각하니 더 아프다. 그냥 눈물이 난다. 사제 폭행사건 때도 사과하지 않는 미성숙한 교구 모습에 편지로 쓴소리 한 것에 대해 꾸중을 들었지만, 그래도 괜찮았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좀 상황이 다르다. 주희, 사람이 죽었다. 이 사건으로 행복했던 한 가정은 산산조각이 났다. 하루 아침에 교회로부터 강도질을 당해 억울한 죽음을 밝혀달라고 모진 세월을 온 몸으로 맞으며 매일 거리에서 호소하신다.

지금 신부님과의 관계가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처럼 죽음의 경계에서 단절된 느낌이랄까. 차라리 교리서 가르치실 때, 교회 일 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침묵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더라면 맘이 지금처럼 괴롭진 않았을 것이다.

2015년 12월, 새벽미사 가다가 일방적으로 나이트클럽 웨이터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사고를 당했고, 권력의 힘 앞에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어 소송을 당해보고서야 법은 절대 평등하지 않다는 걸 몸소 깨달았다. 그러면서 힘이 없어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눈에 더 들어오기 시작했다. 누구나 피해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있겠지만, 직접 그런 일을 당해보면 가슴으로 아파진다. 그래서 살면서 여러가지 고통도 시련도 모두 유익하다 하나보다. 겪어본 만큼 공감능력을 주시니까.

나도 모르겠다. 가끔은 내가 내가 아닌 것 같다. 길거리에서 시위하는 내모습을 누가 상상이나 했던가. 이제 나도 모르는 사이 길에 서면 내옷 입었을 때처럼 편안한 느낌이다. 행복하다. 그 길이 많은 걸 깨닫게 하고 살아갈 이유가 된다. 그렇게 길에서 예수님을 알아가고, 사랑하고, 닮아가고, 그럼 됐다. 길을 따라 가는 데 억울할 게 무언가. 빛 따라 가면 된다. 잡음은 잡음이다.

사람이 의문을 품고 죽었는데도 말하지 않는 침묵이 소름끼치도록 무서울 따름이다. 대법원의 현명한 판결이 났으면 좋겠다. 억울하게 죽은 주희의 진실이 밝혀져서 주희 뿌린 그곳에 떳떳이 다시 찾아가보고 싶다던 부모님의 소망이 꼭 이루어지길 빈다. 그리고 맹아원 앞에서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글을 써서 1인시위 하고 싶으시다던 엄마의 작은 소망도 이루어지길 빈다. 어머님 인터뷰 보고 내 피켓에 작은 위로라도 받으시라고 성경 말씀을 새겨 넣은 것이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감추인 것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마태 10,26)

오케스트라 같은 귀뚜라미의 합창 소리, 갱년기에 딱 좋은 선선한 바람이 볼을 스치며 벗이 되어주는 밤이다. 나름 분위기 좋고 괜찮다. 무드에 약한데 촛불켜야겠다.

하느님께서는 베드로의 배신, 약점, 한계를 알고 있음에도, 끝까지 신뢰하고 포기하지 않으시고 교회의 반석으로 세워주셨다. 사건과 관련된 모든 분들이 그분께 돌아오시길 빈다. 양심에 비추어 말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길 빈다.


 

 


이은석
정의평화민주가톨릭행동 사무국장

 

*여러분의 후원이 하느님 자비를 실천하는 가톨릭일꾼을 양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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