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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전사戰士들이다<영적 전투 배우기>, 피델리 루페르트, 분도출판사, 2017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군역)이 아닌가?”(욥 7,1)

삶이 전쟁터 같다는 말다는 말은 이미 자본주의를 사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말이다. 이 말은 단지 고단한 하루를 마감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어느 슬픈 가장의 뒷모습에서만 터져 나오는 말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좋든 싫든 씨름하고 맞서 싸워야 할 도전이 늘 있기 마련인 탓이다. 독일 뮌스터슈바르차흐 수도원 아빠스를 지냈던 피델리스 루페르트는 <영적 전투 배우기>라는 책에서 “삶이 조금이라도 진척되려면 우리는 이 도전들에 응해야 한다. 회피만 하는 사람은 언젠가 그대로 무덤에 이를 것”이라고 했다.

‘영적 전투’란 무엇인가?

교회 안에서 ‘전투’라는 표현은 자칫 자기 능력으로 명성을 얻으려는 조급한 공격성으로 오해받을 수 있지만, 성경과 초기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영적 전투’라는 용어를 많이 써 왔다. 물론 ‘영적’ 전투는 세속적 의미의 쟁탈전을 염두에 둔 말이 아니다. 티모테오 2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훌륭한 군사”(2티모 2,3)답게 살라고 격려한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의 길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 곧 유혹과 죄악, 악령과 인간의 내적 악의에 맞서 싸우라는 말이다. 영적 성장을 위한 불가피한 투쟁이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거스르는 불의한 세계와 언제나 내면을 엄습하는 악의 권세에 맞서 한결같이 ‘믿음의 전투’를 하도록 부름 받았다. 인문주의자인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는 <그리스도인 전사의 편람>에서 ‘욥’을 전사로 칭한다. 그는 일찍이 그 누구보다 가혹한 시련을 겪었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루페르트는 “하느님은 물론 인간들과 맞서 싸운 욥, 자신의 재앙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끝내 찾아내서 자신의 하느님을 완전히 새롭고 압도적인 방식으로 만나 뵐 때까지 안식을 누리지 못한 늙은 욥, 이런 전사 욥이 여기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생생한 본보기로 제시된다.”고 했다.

영적 전투(pugna spiritalis)는 “하느님의 영에 힘입은 내적 전투”이기 때문에 여기서 내 영혼 안에서 실제로 싸우는 전사는 하느님 또는 예수님이다.

이를 두고 성 베네딕도는 “수도승은 잠에서 깨어나야 하고, 결국 일어나야 하며, 매일 큰소리로 외치시는 하느님의 음성에 놀라 일어서야 하고, 아직 시간이 있을 동안 달려가야 하며, 나그네나 전사처럼 허리를 동여매고 거룩한 장막에 이르는 길을 선행을 실천하며 앞장서서 가야 한다.”(성규 머리말 8-22)고 말한다. 베네딕도는 이 말을 수도승들에게 말하고 있지만 정작 수행(영적 전투)을 해야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해당된다.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에페 6,10-11)

예컨대 골리앗은 온갖 무기를 갖추었지만, 다윗은 이렇게 말한다. “너는 칼과 표창과 창을 들고 나왔지만, 나는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1사무 17,45)

주님의 이름과 그분의 현존이 영적 전사에게 요구되는, 또한 그가 승리하게 도와주는 무장이고 보호이다.

은수자 안토니우스는 “그러므로 (악령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호흡하고 그분을 믿으시오.” 그분은 인간 안에 끊임없이 새 거처를 정하시고, 우리가 숨 쉴 때마다 새 생명력을 선사하시며, 그렇게 우리 안에서 활동하신다. 세례를 통해 그분은 우리 안에 사시고, 우리 몸 자체가 그분의 성전이며, 우리는 그분에게서 힘을 얻는다.

그러나 그분이 내 안에 머무신다고 해서 전투가 결판이 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옛 아담’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얻은 은총과 아직 해결하지 못한 장애물 앞에 서 있다. 그래서 성 체칠리아가 순교하면서 한 말을 기억해야 한다. “보시오, 그대들 그리스도의 기사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으십시오.” 전사들은 잠자리에서도 이 갑옷을 벗지 않는다.

 

사진출처=pixabay.com

영적 전투의 목표

영적 전투의 목표는 악습(vitium)에서 벗어나 ‘하느님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악습이란 사람이 종종 저지르는 잘못이 아니라, 습관적인 잘못이다. 이를 6세기 팔레스티나의 수도승이었던 가자의 도로테우스는 ‘영혼의 고질병’이라고 했다. 바오로 사도처럼 그 목표를 잊지 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필리 3,13-154)

카시아누스는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에 뿌리 내리기 위해서는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각인된 행동양식과 습관을 버리는 것이다. 자신에게 익숙한 땅을 버리고 떠나야 했던 아브라함처럼, 우리에게 누적된 악습들, 부정적 습관과 집착을 버려야 한다.

성 베네딕도는 “삭발로써 하느님을 속이며 행실로는 여전히 세속에 충성하는 이들”을 ‘사라바이타’ 곧 ‘혐오스러운 부류’라고 말했다. 특히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자처하는 사제들이나, 지리멸렬한 수도자들이 새겨 들어야 할 말이다.

영적 전투의 방법과 도구

<영적 전투 배우기>에서는 “모든 상황에 적합한 영적 도구”는 없다고 말한다. 어떤 약재도 모든 질병에 효과가 있지 않은 것과 같다는 것인데, 여기서 필요한 것은 영적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행하는 ‘영적 기술’이다. 흔히 영적 투쟁의 장으로 진입하기 위해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고 하지만, 처음에는 그곳에서조차 고요나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내적 소음에 직면한다. 그리고 자기 삶의 해결하지 못한 여러 문제에 자신이 속수무책으로 방치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이 뒤엉킨 상념들이 폭풍처럼 몰아치는데, 에바그리우스는 이렇게 우리를 휘몰아대고, 치근대며, 괴롭히고, 옭아매는 감정이 불안과 결합되어 있는 생각들을 ‘악령’이라는 은유적인 말로 표현했다. 에바그리우스는 인간 영혼 안에 자연적인 기질처럼 존재하는 상념을 ‘여덟 가지 발생학적 상념’이라 불렀다. 탐식, 음욕, 탐욕, 슬픔(근심), 노여움, 나태, 허영, 교만이다. 예를 들어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거짓말은 근본적 범주가 아니라 노여움과 탐욕과 교만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내가 습관적으로 저지르는 잘못이 있다면 그 갈망과 불안의 뿌리를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격정은 그 자체로 죄가 아니다. 다만 이 격정을 행위로 옮기는 것이 죄다. 에바그리우스의 목표는 수행을 통해 죄를 면피하자는 것이 아니라, 죄스러운 행동의 뿌리를 찾아내서 정화함으로써 ‘영혼의 건강함’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1. 성경 말씀으로 응수하라

쓸데없는 상념을 물리치기 위해 가장 먼저 제안할 수 있는 것은 ‘성경으로 응수하기’다. 예수는 광야에서 악마와 논쟁하지 않고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는 단 한마디로 응수한다. 이것은 논리적인 반론이 아니라, 하느님과 자신이 얼마나 결속되어 있는지 일깨움으로써 악마의 입을 닫게 만드는 방법이다.

“악령들이 우리를 거슬러 전투를 벌이고 자기네 ‘불화살’(에페 6,16)을 울;에게 쏘아댈 때, 우리가 그것을 성경 말씀으로 응수하게 하시어, 더러운 상념들이 우리 안에 머무르지 못하도록, 또 행위로 구체화되는 죄에 영혼이 굴복하지 않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에바그리우스, <안티레티코스>)

그리스도의 전사들에게 ‘말씀’은 험한 길의 등불 같은 작용을 하며 의연하게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수도승 사부들은 아울러 슬픔과 근심에 맞서 성경 말씀을 제시합니다. 에바그리우스는 “네 젊은 날의 죄들을 비난하는 악령에 맞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라며 안심하고 하느님의 길을 계속 가라고 권한다. 아울러 시편을 읽으면, 슬퍼하는 사람이 위로받을 수 있는데, 시편은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숨 쉬는 것 모두 주님을 찬양하여라”(시편 150,6)것처럼 노래는 영혼에 다시 생기를 주고 영혼의 활력을 깨워 일으킨다는 점에서 권장할 만하다.

2. 성경 말씀을 반복하라

영적 사부들은 유혹을 당하거나 영적 전투를 할 때 ‘그리스도를 호흡’하고 그분을 믿으라고 말하는데, 성경의 어떤 말씀이 살과 피가 되고 그리하여 안으로부터 사람의 행동에 각인될 때까지, 그 말씀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라고 권한다. 사막의 어느 교부는 “하느님의 말씀은 물처럼 부드럽고, 우리 마음은 돌처럼 딱딱하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이 하느님 말씀을 자주 들으면, 그의 마음이 하느님 경외를 위해 열린다.”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반복’이다.

“우리의 영혼에 거듭 되풀이하여 긍정적인 말씀을 보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의 목적은 싸구려 차기최면을 하거나,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성경 말씀을 반복함으로써 우리 영혼과 생명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현존을 상기하는 것이다.”(피델리스 루페르트)

때로는 카시아누스의 말대로 공식처럼 간단하게 “하느님, 어서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저를 도우소서”(시편 70,2)라는 간구를 끊임없이 밤이나 낮이나 되뇌이라고 권한다. 이런 기도는 자시느이 보호자이신 하느님이 언제나 곁에 현존하신다는 믿음을 지니게 한다. 이 기도가 항상 마음속에서 생동하면, 안팎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온갖 것과의 전투에서 효과적으로 승리할 수 있다.

 

사진출처=pixabay.com

3. 사부에게 말하라

내적 여정 중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사부들’과 ‘사모들’이 필요하다. 여기서 사부(사모)는 남들을 치유할 줄 아는 사람일 뿐 아니라 스스로도 상처받은 사람,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야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영적 여정에서 진보한 사람이라도 여전히 유혹을 당하고 상처를 입지만, 이를 적절하게 다룰 줄 알고, 그래서 다른 형제자매들의 상처를 더 잘 이해하고 치유를 도울 수 있다.

여기서 필요한 덕목이 ‘솔직함’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잘 다루기 위해 동료들과 자신의 상처를 공개적으로 나눌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 모든 형제들은 그를 기도로 돕겠다고 약속하고 배려할 수 있다. 음지에서 혼자 끙끙거릴 때, 잘못된 주관적 판관과 선택을 행할 위험이 있다. 빛의 전사들은 빛 속에서 함께 걸어야 한다.

4. 무기로서의 유머

영적 전투는 중대하고 심각한 사안이지만, 이를 악물고 수행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힘이 악마의 간계보다 강하다는 믿음을 지닌 사람은 의연함과 유머가 우러나온다. 안토니우스는 ‘참된 천사’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 않고도 한 군대를 거슬러 싸울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은 자신의 적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이며, 유머는 내면적인 힘의 표출이다.

이를테면, 만성적인 유혹과 집요한 심리적 기제가 발동될 때 “오늘은 네가 나를 꼬시긴 틀렸어. 오늘은 내가 너보다 똑똑해!”라고 말하는 것이다. 불교의 위파사나 수행처럼 자신 안에 들고나는 상념들을 그냥 “그렇군!”하며 바라보면서, 큰 파동 없이 지나가게 만드는 것이다. 악령은 가망 없는 싸움은 걸지 않는다. 그러니 악령이 시비를 걸거나 유혹할 때, “너는 누구냐?”고 묻는 태도가 필요하다.

5. 기도하는 몸

우리가 기도를 하지 못하는 것은 그저 생각만으로 기도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으로는 하느님을 접촉할 수 없다.”

기원후 4세기 베들레헴에서 수도원을 이끌었던 히에로니무스는 “언제나 거룩한 독서가 그대 손에 있게 하시오. 그대는 자주 기도해야 하고, 몸을 굽히고, 그대의 영을 하느님께 들어 올려야 합니다.” 히에로니무스는 ‘기도하는 독서’(lecture priante)를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몸과 함께 이뤄질 때 생생하고 깊어진다.

이를테면 성경의 어느 본문을 큰 소리로 읽기 시작할 때, 몸은 입과 귀를 통해 낭독에 포섭된다. 그러다 어떤 말씀이 마음을 움직일 때 즉시 읽기를 그치고 무릎을 꿇고 잠시 기도하거나, 서 있거나, 잠시 침묵하거나, 바닥에 엎드리거나 하는 동작을 통해서 그 말씀을 더 깊이 새길 수 있다. 시편을 읽거나 기도할 때 그 말씀이 머릿속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마음속으로 옮겨가서 더 깊이 내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몸이 하는 역할이 있는데, 가령 바닥에 엎드려 있는 것은 마치 ‘하느님의 자비를 공경하는’ 것이다. 결국 몸이 기도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6. 일어나기와 깨어나기

베네딕도 <성규> 머리말 첫 구절이 “들어라, 아들아!”인 것처럼, 매일 아침 우리는 하느님의 빛을 향해 눈을 뜨면서 이런 목소리를 경청할 필요가 있다. “오늘 그분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시편 95,7-8) 이 한 마디를 들을 때, 내 몸이 일어나며 내 영혼도 따라 일어나게 된다. 이때에 하느님도 돌연 일어나신다. 그분 현존 안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일 텐데, 하느님의 강력한 개입을 청하며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

“주님, 일어나소서. 하느님, 손을 쳐드소서. 가련한 이들을 잊지 마소서.”(시편 10,12)

7. 그리스도를 옷처럼 입기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27)

초기교회에서는 세례 받을 때, 알몸으로 세례반에 들어가서 세례를 받고 나오면 흰 옷이 입혀졌다. 세례 받은 이는 그 옷을 한 주 내내 입었다. 그리스도가 빛나는 흰옷처럼 당신의 빛과 은총으로 그를 감싸시고, 평생을 그와 함께 걸어가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는 세례에 대한 자각과 성령으로 인한 새로운 실재에 대한 감각을 깊게 해 준다. 수도원에서 입회자에게 수도복을 입히는 것도 세례에 따른 변화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제는 세례복 대신에 ‘세례 목도리(스카프)’를 걸어주기도 하는데, 의미는 똑같다.

그러나 새옷을 입는다고, 그 옷 아래로 옛인간의 더러운 옷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무기로 무장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우리는 영적 투쟁에 나서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에페 6,10)라는 전갈을 신자들은 듣는다.

고대 아일랜드 켈트전통에서 바치는 기도인 ‘로리카’(Lorica, 로마병사들의 갑옷)는 영적 전투를 치를 때 필요한 보호와 능력을 간청한다.

그리스도, 나와 함께
그리스도, 내 앞에
그리스도, 내 뒤에
그리스도, 내 안에
그리스도, 내 아래
그리스도, 내 위에
그리스도, 내 오른쪽에
그리스도, 내 왼쪽에
그리스도, 내가 누워 있는 곳에
그리스도, 내가 앉아 있는 곳에
그리스도, 내가 일어나는 곳에

그리스도,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 하나하나의 가슴 속에
그리스도, 나에게 말을 하는 사람들 하나하나의 입 속에
그리스도, 나를 보는 사람들 하나하나의 눈 속에
그리스도, 나의 말을 듣는 사람들 하나하나의 귀 속에.

여기서 간청하는 것은 영적 갑옷인데, 이 갑옷은 언제나 그리스도 그분이며, 또 오로지 그분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곳에 현존하며, 나뿐 아니라 내 주위의 형제자매에게로 확장된다.

8. 스승인 규칙

<영적 전투 배우기>, 피델리 루페르트, 분도출판사, 2017

규칙은 공간과 시간, 그리고 일상의 다양한 과제를 슬기롭게 조직함으로써, 마치 스승처럼 우리를 교육한다. 베네딕도 수도원에서는 하루 여덟 번 공동기도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그때면 지체하지 않고 품위 있게 서두르며 공동기도에 참석하러 가야 한다. 괭이를 내려놓고 잠시 짧게 기도하고서 다시 괭이질을 하는 것은, 일상의 쳇바퀴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떠올리는 일이다. 신석정의 <들길에 서서>라는 시가 이 정경을 잘 보여준다.

푸른 산이 흰구름을 지니고 살듯
내 머리 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림처럼 두 팔을 드러낸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거니―

루페르트는 “일과 다른 문제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일을 끝내지 못한 채 그대로 두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점에서 우리는 노력하지 않으려는, 별난 노력도 해야 한다”고 했다. 사실 ‘즉시 중단’은 참 어려운 일이다. 가던 길을 멈추거나 갑자기 돌아서는 훈련은 특히 분노의 순간에 필한 ‘마음의 전환’에 요긴하다. 이것은 악습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길이며, 주님을 기다리는 자의 태도이다.

영적 투쟁의 열매는 사랑

성 베네딕도는 영적 투쟁의 과정에서 숭고한 사랑이 어떻게 일상에서 실천될 수 있는지 <성규> 72장에서 유언처럼 요약한다. “서로 공경하기를 먼저하고,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서로 다투어 순종하고, 아무도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여기는 것을 찾지 말고 오히려 다른 이에게 유익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찾을 것”이라 한다. 또한 “사랑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절대로 아무것도 그리스도보다 선호하지 않게 된다.”

하느님은 사랑인 동시에 거룩하심이다. 우리에게 하느님과 그리스도가 ‘하나이자 모든 것’이 되면, 사랑이 ‘지극히 열렬해’지면, 그 사랑은 마치 저절로인 듯, 마치 좋은 습관처럼 다른 사람에게로 넘쳐흐르고, 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심지어 원수를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된다.

사실상 영적 투쟁은 ‘고독하게 홀로’ 행하는 여정이 아니다. 형제는 거울이 되고, 내적으로 자신을 수양하고 영혼을 더 정화하라는 도전이 된다. 사실상 집중적인 기도생활이나 금욕수련보다 소중한 것은 인간들과 맺는 좋은 관계이다. 성 베네딕도는 장차 누가 주님의 거룩한 산과 장막에 살게 될 것인지 묻고 답한다.

“그는 허물없이 걸어가며 의를 행하는 이, 자기 마음으로 진리를 말하는 이, 자기 혀로 속이지 않는 이, 자기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이, 자기 이웃에 대한 중상에 귀 기울이지 않는 이다.”(시편 15,2-3)

이처럼 동료 인간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법을 배우는 것은 영성생활의 첫걸음이다.

집은 땅에서 공중으로 지어 올라가야 하는데, “주춧돌은 이웃이니, 그대는 이웃을 얻어야 한다.”고 어느 사막 교부는 말한다. 가치 있는 것은 사랑이니, 그 밖의 모든 영적 노력은 그것이 인간을 사랑에 열려 있게 하고 사랑 안에서 성장하도록 하는 한에서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에바그리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 다음의 ‘하느님’으로, 하느님보다 덜 숭고하지만 어쨌든 신적 품위를 지닌 존재로 여겨져야 한다. 하느님이 모든 인간 하나하나 안에 사신다는 것, 그분을 거기서 만나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그분을 알 수 없다.”

지상에 낙원이 있을까?

영적 투쟁의 목표는 우리가 넓은 마음과 완전한 사랑을 이루는 것이다. 베네딕도는 수행을 하면 “길이 넓어지는 게 아니라 마음이 넓어진다”고 했다.

“나의 일상이 변할 까닭은 없고, 난제들은 아마 그대로일 테지만, 마음이 넓어져서 나는 현실을 다르게 보고 받아들일 수 있다. 넓은 마음은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인격적으로 현존하며 작용하신다는 것을 내포한다.”

결국 환난은 계속되고 우리 삶은 여전히 막막하더라도, 끝내 절망하지 않기에 숨을 쉴 여유와 넉넉한 희망이 존재한다. 이 마당에 루페르트가 들려준 토고의 잠언은 이렇다. “삶은 희망과 결혼한 고통이다.”

우리는 사실상 악습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격정을 뿌리째 뽑아 버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것들과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다. 요컨대 전투는 계속되지만, 또한 그러면서 우리는 전진한다.


* 이 글은 8월 26일 인문카페 엣꿈에서 열린 <제1회 가톨릭일꾼강습회>에서 발제한 내용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여러분의 후원이 하느님 자비를 실천하는 가톨릭일꾼을 양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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