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에티우스 "참다운 행복은 편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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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에티우스 "참다운 행복은 편하지 않다"
  • 유대칠
  • 승인 2017.08.29 09: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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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의 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 13]

이 세상은 참으로 슬픈 일로 가득하다. 그 슬픈 일 가운데 안타까운 슬픔도 있다. 바로 억울함이다. 잘못이 없음에도 벌을 받게 되었을 때, 억울함을 느끼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억울했다. 잘못이 없음에도 재판이란 형식적 절차를 걸쳐 사형을 당한다. 사실 왜 나의 잘못이 아님에도 벌을 받아야하는 것인지 오랜 시간 많은 이들은 궁리하고 궁리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예수의 사랑과 희생을 이야기하는 복지시설이라 말하기에 장애를 가진 사랑하는 자녀를 부탁했지만, 싸늘한 죽음이 되어 돌아왔다. 어떻게 죽음이 일어났는지 진실을 알려 달라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함이었다. 자녀를 잃은 부모는 억울하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통을 당하고 있다. 또 진실 앞에서 침묵하는 일부 종교인의 가식적인 모습에 아파한다.

참으로 억울하다. 세월호도 다르지 않다. 선장의 말대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던 많은 이들은 죽임을 당하게 되었고, 그 과정의 진실 된 모습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유가족의 눈물 앞에 당시 국가권력자는 고개를 돌렸다. 참으로 억울하다. 억울함, 죄 없이 당하는 고통, 그 고통이 주는 아픔은 매우 깊다. 매우 잔인하다.

악이 가진 힘은 가상적인 힘일 뿐

보에티우스의 억울함을 생각해본다. 잘못 없이 죄인이 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도대체 왜 자신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해야 했다.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악으로 다가오는 보상 앞에서 생각했다.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보에티우스에게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선이다. 선은 존재의 원리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선한 것이다. 참다운 선만이 참다운 행복의 근거가 된다. 거짓된 선이 참다운 행복을 주지 못한다. 거짓된 선은 거짓된 행복을 줄 뿐이다. 악은 바로 거짓된 선이다. 악은 선의 충만이 아니다. 선의 결핍이다. 좋음의 결핍이다. 좋지 않은 것이고, 덜 좋은 것이다. 그러니 악으로 힘들어하는 이는 결핍된 것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다. 온전히 존재하지도 못하는 허상 존재로 인하여 힘겨워하는 것이다.

보에티우스는 악이 가진 힘은 가상적인 힘일 뿐이라 한다. 악이 주는 행복도 온전한 행복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그저 행복으로 보이는 가장적인 것일 뿐이다. 가짜 행복이다. 그런 가짜 행복을 이룬다고 참다운 행복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가짜이기 때문이다.

보에티우스는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의 그 아픔에서 철학은 위안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눈앞에 존재하는 악 앞에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하고 가짜 행복으로 편하게 살아가려는 이들에게 진실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한다. 억울한 이에게도 위안을 해야 한다. 당당하게 싸우라고 말이다. 악의 가짜 행복에 사라 잡힌 이들의 야비한 공격에도 흔들리지 말고 싸우라고 응원해야 한다. 그것이 힘들어도 바로 그것이 참된 행복이며 마땅히 나아가야할 길이라 말하며 위안해야 한다고 한다.

선을 행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악을 지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도 친일파가 아닌 독립운동가가 되어 힘겨운 삶을 살아갔던 이들을 본다. 선을 행할 능력을 가진 이들은 악이 무엇인지 알고, 그 악과 맞서 싸우면 결국 자신에게 나쁜 환경이 온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길을 갔다, 그것이 행복이기 때문이다.

 

억울하고 고통 받는 이를 위로하는 철학 

철학은 무고하게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어야 한다. 그 고통으로 가짜 행복과 타협하지 말고 더욱 더 담담하게 진정한 행복의 길을 가라 한다. 악을 피하고 편하게 나쁜 사람으로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행복은 아니다. 진정한 행복은 편하지 않다. 힘들다. 악과 싸워야 한다. 자신의 선이 자신의 삶을 힘들게 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이때 철학은 진정한 행복을 위해 악과 싸우는 이의 편에서 그들의 논리가 되고 그들의 벗이 되고 위안이 되며 그들과 함께 해야 한다. 실없는 악의 힘 앞에 고개 속이지 말고 끝까지 싸우라는 논리가 되어 주어야 한다.

여전히 억울한 일들은 세상에 가득하다. 하지만 그 억울한 일 앞에 무력하게 슬퍼하는 것도 포기하는 것도 안 된다. 오히려 더욱 더 치열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그 힘든 길을 가야 한다. 진정한 행복은 변하지 않다. 오히려 행복은 불편하고 힘들다. 그러나 이 불편과 힘겨움을 포기하는 순간 어쩌면 본인도 가짜 행복으로 타인을 힘들게 하고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내는 사악한 존재가 되어있을지 모른다.

보에티우스의 말처럼, 위안하는 철학, 요즘 그러한 철학이 정말 간절히 필요해 보인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여러분의 후원이 하느님 자비를 실천하는 가톨릭일꾼을 양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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