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그는 그의 온 몸을 혀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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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그는 그의 온 몸을 혀로 만들었다
  • 월리암 J. 쇼트
  • 승인 2017.08.29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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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즐거움-3

프란치스코회의 영성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앗씨시의 ‘작은 가난한 사람’의 영성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시작하기 위하여 마샬 르케의 다음 구절을 살펴보기로 한다:

"작고 가난한 사람 프란치스코의 삶은 다른 어떤 성인들보다 더 쾌활하고 더 평화스러운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진실은 그가 넘침의 성인이라는 것이다: 희생에 있어 넘치고, 사랑에 있어 넘친다: 그리고 바로 이 넘침에 의하여 그는 행복한 중간을 지키고 있다. 왜냐하면 온건함에 대한 그의 무시가 두 가지 방식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마치도 저울의 추가 양편에 더 오래 있을수록 더 나은 평형이 유지되는 것과 같다. 프란치스코는 넘침의 성인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웃음 짓는 성인이다. 그는 항상 양편을 녹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참회가 사랑이었고, 슬픔은 ‘완전한 기쁨’이었다. 이런 기준을 사용한다면, 어리석음은 지혜이고 넘침은 최고의 온건함이다."

 

프란치스코회의 전통의 시작과 그 영원한 기반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 ‘넘치는’ 성인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전통을 이해한다는 것은 프란치스코에게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로지 개인의 영성만 갖게 되지, ‘전통’을 얻지 못할 것이다.

전통이란 단어는 라틴어 어원에서 보자면 ‘인도하다, 양도하다’라는 뜻으로, 다른 이들이 프란치스코로부터 무엇인가 받았다는 의미가 나온다. 그것은 무엇인가? 당대인들, 친구들, 동료들, 형제들과 자매들에게 그것은 프란치스코 자신을 아는 체험이었다. 그가 메시지였다는 뜻이다.

당대의 대중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프란치스코는 사람들에게 ‘말과 표양’으로 가르쳤다. 그리고 그들의 증언에 의하면, 프란치스코는 그들에게 그가 가르쳤던 것의 살아있는 표양이었다. 그는 청취자들에게 말 뿐만 아니라 표양에 의하여 가르쳤다; ‘그는 그의 온 몸을 혀로 만들었다’ ; ‘그는 기도하는 어떤 사람이라기보다 자신이 기도가 되었다’ : 말하자면 그의 온 인격이 전달하려고 했던 메시지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의 메시지는 무엇이었나? 한마디로 메시지는 예수님이었다. 메시지를 그런 간단한 말로 표현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평범하고, 신심적이거나 기이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프란치스코에게, 예수님 즉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견은 회심 후 20년 동안의 전 삶에서 계속 드러나는 계시였다.

초기에 그는 예수님을 나환자들에게로 자기를 이끄신 분이라고 발견한다. 그래서 나병 환자들의 존재는 그에게 ‘쓰라리기보다’, ‘달콤했다.’ 그런 후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다스림을 선언하는 회심의 설교가라고 생각한다. 수년 동안 그는 더 선명하게 예수님을 베들레헴에서 하느님의 아들로 육화하신 존재로, 이후 골고타의 고통 받는 종이라고 발견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것들의 ‘주님’으로서 죽음 후 영광 속에 부활하신 분으로 알게 된다. 이 주님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 아드님 안에서, 프란치스코는 또한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이해한다.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프란치스코는 마리아, 교회, 성경, 사제직, 가난한 사람들, 형제들과 자매들,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을 이해한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 안에서 프란치스코는 자기 자신까지 이해한다. 예수님을 일컫기 위하여 ‘그리스도’라는 지위를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프란치스코의 영성과 그 이후의 프란치스코회의 전통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프란치스코회의 신학과 영성을 가장 완전하게 표현하는 적절한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 말을 가장 뚜렷한 특징으로 갖고 있는데, 프란치스코 성인의 믿음과 거룩함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에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계는 그 전체로 또한 모든 부분들이 다 함께 하느님한테 무슨 의미인가가 드러나고 있다.

똑같은 그리스도에 대한 다른 체험, 클라라와 프란치스코의 영성

프란치스코회의 전통을 지키고 형성한 사람들 중에 최고는 앗씨시의 클라라이다. 그는 자신을 프란치스코의 ‘작은 식물’이라고 묘사하곤 했다. 이런 명칭은 독자들에게 어떤 열등함을 느끼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클라라가 스스로를 이렇게 부른 것은 다른 의미가 있다: 그는 분리되어 있으나 연결되어 있으며, 똑같은 복음의 토양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로부터 받은 생활방식을 나누고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클라라가 자신의 성장을,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친밀한 지식을 표현하는 방식은 그만의 고유한 방식이다. 클라라와 프란치스코를 일치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똑같은 체험이 아니라, 똑같은 그리스도에 대한 다른 체험들이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회의 전통에 있어 첫 번째 해석자가 될 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다. 여성 공동체와 함께, 클라라는 프란치스코회 전통의 초기와 후 세대에 그것을 전달하는데 있어 기본적인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프란치스코가 죽고 나서 거의 30년을 더 살았으므로 (프란치스코는 1226년, 클라라는 1253년에 죽음), 프란치스코 학파의 ‘창설시기’에 대한 그의 해석은 우리가 지금에야 이해하기 시작하는 방식으로 전통을 형성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클라라는 다음 세대에 전달되는 전통의 핵심에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어떤 저자들은 오늘날 ‘프란치스코-글라라’의 전통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하고 있다. 제자 이상으로 클라라는 또한 그가 살았던 전통의 창의적인 건축가이기도 하다. 


[원출처] <가난과 즐거움-프란치스코회의 전통>, 월리암 J. 쇼트(프란치스코회)
[출처] <참사람되어> 2008년 10월호 

 

*여러분의 후원이 하느님 자비를 실천하는 가톨릭일꾼을 양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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