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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주변,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김경집 칼럼]

‘사람(아담)’은 하느님의 당부를 어기고 금지된 열매를 따먹었다. 그것은 욕망 때문이었다. 뱀의 꾐에 빠져 선과 악을 알게 되는 능력을 갖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단 일을 저지른 뒤 처음 알게 된 것은 자신이 알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부끄러움을 상징한다. 그래서 하느님을 피해 동산 나무 뒤에 숨었다. 하느님은 그를 불렀다. “너 어디 있느냐?”(창세 3, 9)

우리는 무엇을 부끄러워하는가?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이 나라에서 제일 잘 나가는 기업의 사장에게 보낸 문자를 보낸 이들은 모두 내노라 하는 자리 하나씩 차지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언론계, 학계, 법조계는 말할 것도 없고 국정원도 빠지지 않았고 심지어 청와대의 참모까지, 그야말로 어디 한 곳 빠지지 않고 ‘착실하게’ 정보를 제공하고 온갖 아부와 아첨을 아끼지 않았다.

무엇을 위해서 그랬는지 물을 것도 없다. 스스로 돈의 노예가 되기 위해 안달이다. 그러니 그 기업이 청와대보다 더 위에 있다는 말을 거리낌 없이 토로한다. 하기야 모든 정보를 알아서 갖다 바치니 가만히 앉아서 사회 전체를 제 손아귀에 두고 주물럭거릴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기업도, 거기에 온갖 선을 대 정보를 제공하고 아부했던 자들도.

아담은 그래도 지식(혹은 지혜)에 대한 갈망 때문에 약속을 어겼다. 그리고 적어도 부끄러움을 알았다. 그러나 이 아귀들은 오로지 돈에 대한 갈망 때문에 그 패악질을 부끄러움도 지워버리고 태연하게 저질렀다. 그자들이 돈이 없는가? 서민들은 평생 모을 수도 없는 돈쯤은 쥐고 있고 누리고 있는 자들 아닌가? 그런데도 인간의 욕심은, 특히 돈에 대한 욕망은 끝이 없는 까닭인지 더 악착같이 매달린다. 그러려고 공부했고 출세했으며 그 자리 차지한 것인가? 차라리 돈이 목적인 기업인들이 그랬다면 낫겠다.

위에 언급한, 그 기업에 충성을 맹세하며 빵 부스러기 얻으려한 자들은 사회의 부패를 비판하고(언론), 악을 척결하며(법조), 진리를 가르치고(학계),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고위공직자) 자리에 있다. ‘있었다’가 아니고 ‘있다’라는 말이 한심스럽고 화가 날 일이다.

아담은 비겁하지만 솔직하게 고백했다.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 12) 그 말을 털어놓으면서 얼마나 후회하고 부끄러웠을까. 그러니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알몸을 감추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의 후손들은 죄를 저지르면서도 죄책감도 없으며 솔직하지도 않다.

돈 없으면 제대로 사람 구실하기 어렵다. 가난이 죄는 아니지만 불편하다. 아니, 이제는 불편을 넘어 모욕과 절망을 절실히 느끼게 만드는 세상이다. 그러니 누구나 필요한 돈은 마련해야 한다. 다만 그게 정당한 방식으로 공정하게 그리고 정의로운 절차를 통해 얻어져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열심히 산다. 그러나 힘 있고 윤택하며 명예까지 누리는 자들이 부당한 방식으로 불공정하게 그리고 불의한 야합을 통해 필요 이상의 돈을 추구한다. 그것은 이미 돈의 노예다.

‘사람’은 금지된 열매를 먹은 죄로 영원히 낙원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추접하게 그리고 다른 이들을 절망시키고 분노하게 만들며 세상을 썩은 시궁창으로 만드는 짓을 ‘아낌없이’ 저지른 자들은 여전히 떵떵거리고 산다. 추방은 그들의 몫이 아니라 애먼 약자와 서민의 몫이다. 그것은 조롱이며 적반하장이다. ‘사람’은 부끄러워했는데 ‘그 사람들’은 부끄러움조차 없다.

하느님은 ‘사람’의 부끄러움을 가엽게 여겨 낙원에서는 추방했지만 끝까지 지켜줄 것이라 약속했다. 그러나 악행과 지나친 탐욕에 찌든 ‘그 사람들’의 후안무치는 아무리 인자하고 사랑 넘치는 하느님이라도 쉽게 그 죄를 지우지 않으실 것 같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랑은 약자에게 향하는 것이다

<신명기>는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후 광야에서 40년을 지낸 뒤 특별히 광야시대에 태어난 새로운 세대를 위해 하느님의 율법을 설교를 통해 상기시켜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거기에는 하느님의 약속과 가르침이 일목요연하게 담겨 있기 때문에 구약 사상의 고갱이라고 불린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을 때 물리치며 <신명기>를 거론한 것을 보아도 그 진수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신명기>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대목은 약자를 보호하는 규정이다. 예를 들어 "맷돌은 그 위짝 하나라도 담보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생명을 담보물로 삼는 것이다"(신명 24, 6), "그 사람이 가난하면, 너희는 그의 담보물을 잡아 둔 채 잠자리에 들어서는 안 된다. 해가 질 무렵에는 그 담보물을 반드시 돌려주어, 그가 자기 겉옷을 덮고 잘 수 있게 해야 한다"(신명 24, 12~13) "가난하고 궁핍한 품팔이꾼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 그의 품삯은 그날로 주어야 한다."(신명 24, 14~15), "너희가 밭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곡식 한 묶음을 잊어버리더라도 그것을 가지러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의 몫이 되어야 한다."(신명 24, 19)는 등의 규정은 약자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너희는 자루에 크고 작은 두 개의 저울추를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신명 25, 13)는 것은 정직하게, 부를 편취하지 말아야 한다는 규범이다. 그것은 바로 정의의 개념이다.

삼성의 장충기에게 정보와 아부와 부탁의 문자를 보냈던 자들은 우리 사회의 강자들이다. 그들 가운데는 제법 ‘갓물주’라 불리는 건물주들도 있을 것이다. ‘을’의 슬픔과 고통보다 ‘갑질’에 익숙한 자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자들 가운데 천주교 신자들도 있을 것이다. 과연 그들이 <신명기>를 제 정신으로 읽을 수 있을까? 아니, 읽기는 했을까?

하느님의 가르침은 ‘오직 사랑’이다. 그게 예수님의 복음 정신이다. 사랑은 나보다 잘나고 힘세고 돈 많은 자에게 아부하고 아첨하며 그를 위해 불의하고 부당한 일까지 자청해서 수행하는 게 아니다. 사랑은 나보다 못한 사람, 약한 사람, 병든 사람을 따뜻하게 품고 보듬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사랑 없이 오직 탐욕에 싸여 패악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성당이나 교회 백날 다니면 뭐하겠는가.

부끄러운 걸 부끄러워해야

1974년에 발표된 소설가 박원서의 단편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는 도시 소시민의 속물성을 솔직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한국전쟁 때 서울로 피난 와 기지촌 근처에 살면서 집안 부양을 위해 양공주가 되라고 압박하는 어머니, 도저히 그럴 수 없어서 부농에게 시집가지만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이혼하고 대학 강사와 결혼한 나. 세속적 욕망을 초월한 사람이라 여겼지만 그 실체에 환멸을 느끼고 다시 이혼한 뒤 이후 사업가와 세 번째 결혼한 나는 잘사는 것이 꿈이라는 그의 솔직함이 오히려 좋다는 생각에서였다."

오랜 만에 만난 중학 동창들은 그녀가 세 번 이혼한 사실을 경멸하면서도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가 궁금하다. 부끄러움이 많았던 아이였던 그녀는 짐짓 세 번의 결혼을 당당하게 말하지만 사실은 부끄러움을 잃어버리게 만든 삶과 세월의 시고 고된 곡절들이 씁쓸하다. 그러나 그건 주인공뿐 아니라 잘 살고 있는 듯한 동창들도 마찬가지라는 걸 알고 씁쓸한 만족을 느낀다.

아무리 삶이 피폐해도 어찌 자기 딸에게 양공주가 되라고 강요할 수 있는 엄마가 있는가.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도 다행히 부농과의 결혼으로 그 부끄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결혼은 실패였고 이혼이 거듭되었다. 이혼이 손가락질 당하던 시절이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넘치게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정작 부끄러운 것은 그런 이력이 아니다. 친구의 삶이 그런 이혼과 결혼의 반복임을 알고 속으로 고소해하면서 아예 드러내놓고 조롱하는 동창들의 허위의식은 또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이른바 중산층의 허위의식을 담담하게 고발한 박원서 선생은 그렇게 소소한 일상의 일에서 빚어지는 부끄러움의 떨켜들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내놓는다. 그러나 이제 그런 부끄러움조차 사치가 된 ‘그 사람들’이다.

그 잘난 것들 비난만 할 일이 아니다. 비난하면서 마음 한편에 그들에 대한 부러움과 시기심을 조금이라도 지녔다면 그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하느님이 ‘사람’이 어디 있느냐 부르셨을 때 그는 두려워했고 부끄러워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그런 부끄러움조차 버리고 산다. ‘사람’의 맏아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뒤 하느님이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고 묻자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 9)라고 대답했다. 죄책감도 부끄러움도 없다. 그게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삼성과 장충기에게 아부한 자들의 모습만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도 그런 모습이 아닌가. 부끄러움을 부끄러워하며 살아야한다. 그게 재기의 시작이다. 나도, 사회도, 세상도 탐욕과 악을 물리치고 제대로 살아야 한다. 그래야 겨우 사는 것처럼,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간다 하지 않겠는가!

 

김경집 바오로
인문학자,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저자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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