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네스토 카르데날, 가장 종교적인 가장 혁명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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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네스토 카르데날, 가장 종교적인 가장 혁명적인
  • 한상봉
  • 승인 2017.08.20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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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nesto Cardenal (1925-)

박노해 시인이 노래했던가요, 키 큰 미루나무 숲을 걷다보니 어느덧 내 키가 자랐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생애를 통해 만나고 마주치는 사람들, 곁에 두고 보는 책과 즐겨듣는 음악, 그밖에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곧 ‘나’를 만들어간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 사람과 그 것들은 우연히 제 곁에 머물고 있는 것 같지만 기실 내 영혼이 부르고 갈망하던 것들이겠고, 그것들이 내 뼈에 힘을 주고 내 살에 피가 돌게 하였겠지요.

‘시와 혁명의 통일’이란 말은 늘 머리맡을 떠나지 않는 화두였습니다. 학창시절 시인 김지하가 저 같은 어린 후배에게 던져준 ‘화두’(話頭)입니다. 고등학교 때 도서부 담당이던 선생님이 권해 주신 함석헌 옹이 쓴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읽고 전율을 느꼈던 것은 아마도 신앙과 사회적 실천에 대한 감수성 탓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이 책은 본래 <성서의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란 제목으로 출판된 책이라지요. 대학시절엔 <자기로부터의 혁명>이라는 제목에 홀딱 반해서 크리슈나무르티를 읽었던 기억도 납니다. 자기혁명과 사회혁명을 늘 더불어 생각하는 습성을 지니게 된 것은 꽤 오랜 것이었고, 이것도 운명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다 보니, 이리 되었다는 말이겠지요.

한참 전에 한국신학연구소에서 펴낸 <혁명적 신앙인들>이라는 책을 접했을 때도 비슷한 전율을 느꼈죠. 편집자 손규태 박사는 “경건한 신앙 때문에 세상에서 도망치지 않았고, 사회혁명이라 해서 어떤 체제에 사로잡히지 않았던 사람들” “경건한 신앙을 사회에 실현하고, 사회적 실천을 신앙으로 승화시킨 사람들”을 다루고 싶다고 말했죠. “가장 종교적인 사람이 가장 혁명적이다”라는 말을 증언한 사람들이지요. 간디가 그랬고, 도로시 데이와 시몬느 베이유, 조셉 카르댕 추기경 그랬고, 돔 헬더 카마라와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그런 사람이었죠.

그리고 우리시대의 수많은 그리스도인 남녀들이 복음에 영감을 받아 그 길을 걸어 역사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복음은 가련한 인생들에 대한 연민을 자극하고, 그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그 제단에 온몸을 봉헌했지요. 니카라과의 에르네스토 카르데날 신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카르데날 신부는 “삼라만상은 서로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세상만물은 각자가 하나의 ‘너’를 향하고 있다는 것인데, 눈송이가 응결되고, 새로운 별이 폭발하고, 쇠똥구리가 똥덩이에 달라붙고, 연인들이 껴안는 것도 사랑입니다. 연꽃 이파리 위에 이슬이 맺혀도 사랑 때문이랍니다. 미움은 좌절된 사랑일 뿐이고, 누구나 그 사랑을 갈망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발견할 때까지 휴식을 찾을 수 없답니다. 그래야 우주적 고뇌도 진정된답니다.

그 하느님께서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를 갈망해 오셨다는데, 그래서 우리가 그분에게 끌리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 끌림에 응답하는 길에서 카르데날 신부는 수도승이요 시인이요 혁명가로 살았더군요.

 

Ernesto Cardenal

시인에서 혁명가로

에르네스토 카르데날은 1925년 니카라과의 그라나다 출신으로, 가족들은 스페인 상류층이었죠. 그후 레온으로 이주해서 걱정 없이 학창시절을 마쳤는데, 강과 나무, 꽃과 소녀들의 아름다움을 시로 노래합니다. 그때까지도 빈곤문제란 관심 밖의 일이었죠. 니카라과는 1933년 아나스타시오 소모사가 미국의 막대한 경제원조로 국가근위대를 조직하고 군사독재를 감행했으며, 이에 저항하던 아우구스토 세자르 산디노가 살해된 상황이었지만, 아직 어렸던 그에게는 이런 정치적 환경이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었죠.

부모들은 그에게 유학을 주선해 주었고, 그는 멕시코에서, 그리고 뉴욕 콜롬비아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니카라과 서정시에 나타난 열망과 언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유학기간동안 유럽 등지를 여행하면서 급진적인 새로운 사상을 접한 뒤로 니카라과에 돌아와서는 예전처럼 소모사 대통령의 군사독재를 마냥 지켜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저항시인이 된 것이지요.

카르데날은 1952년에 국가근위대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으면서 더욱 급진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노래합니다.

4월에 사람들은 죽임을 당했네
나는 그들과 함께 4월의 봉기에서 소총 사용법을 배웠지
아돌포 바에즈 보네는 내 친구였네
그는 비행기, 트럭, 탐조등, 수류탄, 라디오, 군견, 근위대에 쫓겼지
나는 대통령 관저 위에 떠오른
피묻은 탈지면 조각 같은 붉은 구름과
붉은 달을 기억하네

그는 1954년에 4월봉기를 계획했다가 발각되어 많은 친구들이 체포되어 처형되는 가운데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그동안 소모사 대통령의 가족들은 니카라과 경작지의 1/4 이상을 소유하고, 국립항공사 라니카, 항구와 연안부두를 소유했으며, 호텔과 라디오 방송, TV방송국, 일간지뿐 아니라 유통회사와 수많은 공장, 그리고 은행과 보험사까지 장악했습니다. 게다가 그 자식과 가족들이 연이어 대통령에 올랐습니다.

 

혁명가에서 수도사로

4월 봉기가 좌절되면서, 사회변혁을 꿈꾸던 카르데날은 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함을 깨닫고 미국 켄터키 주에 있는 겟세마니 트라피스트수도원을 찾아갑니다. 거기서 정치적 길을 선택했을 때와 똑같은 철저함으로 수행에 나섭니다. “나는 전적으로 하느님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영감을 받았다”며 정치와 문학에서 일단 물러선 것이지요.

당시 이 트라피스트 수도원 원장은 토마스 머튼 이었는데, 그는 <칠층산>을 쓴 작가이며, 수도자의 길을 통해 세상의 평화를 위해 나아갔던 실천하는 영성가입니다. 카르데날은 말합니다.

흰눈을 보기 위해 나는 불을 껐다
창문을 통해 흰눈과 새로 뜬 달을 보았다
그렇지만 나는 눈과 달이 다시 창문이었고
이 창문을 통해 님이 나를
응시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는 명상 중에서 노트를 만들었는데, 나중에 <침묵 위에 떠오르는 소리>라는 책으로 묶여 나왔습니다. 여기서 그는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이제는 내 존재의 유일한 근거요 내 유일한 직업이요 내 유일한 활동입니다. 이전에 내가 소녀의 아름다움에 쏟았던 열정으로 나를 당신께 드렸습니다... 이전에 당신의 손으로 만든 온 피조물에게서 느꼈던 사랑으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게 남아 있는 것은 사하라 사막의 메마른 우물같은 갈증, 거의 우주적인 사랑에 대한 굶주림, 해소할 수 없는 열망, 빈 마음뿐입니다. 이 모든 내 열정들은 죽어버렸고 남은 것은 당신, 이제 모든 사랑을 가지고 사랑하는 당신에 대한 사랑뿐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여기서 2년 동안 머물며 명상과 기도에 집중했습니다. 그때에 토마스 머튼은 카르데날에게 “신비적으로 사는 것은 자기를 세계에서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다.”라고 도움말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회심과 사회적 실천이 맞물리는 다른 길을 찾아가도록 충고했습니다. 이는 머튼이 카르데날의 정치적 갈망을 잘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고유한 길을 걸어 하느님께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곳을 떠나 멕시코의 쿠에르나바카에 있는 베네딕토수도원에서 2년간 더 보냈습니다. 그곳은 가톨릭신자뿐 아니라 무신론자들도 와서 머물 수 있는 개방된 수도원이었답니다. 그후 콜롬비아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965년 8월에 마니구아에서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담 없는 수도원, 솔렌티나메 공동체

<말씀이 우리와 함께>, 분도출판사, 1981

이듬해인 1966년에 사제가 된 카르데날이 찾아간 곳은 니카라과의 큰 호수에 있는 솔렌티나메 섬이었지요. 여기에는 ‘우리가 사랑하는 부인 솔렌티나메’라는 이름을 가진 그리스도교공동체가 있었고, 원시림과 잡목이 뒤엉킨 이 공동체에서 카르데날 신부는 아침에 낚시질을 하고 부엌일을 도우며, 돌을 나르거나 나무를 패고, 새소리를 들으며 사람들과 모여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단촐한 집과 식사, 그리고 노동 속에서 카르데날 신부는 ‘건전한 빈곤의 풍요로움’을 만끽했습니다. 이 공동체는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지 않은 수도원’이며, 아무런 계율도 규칙도 없는 ‘우정의 학교’였습니다. 시인과 지식인, 농부와 목수, 독실한 신자들과 무신론자들마저 모여서 먹고 공부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카르데날 신부는 아침이면 나무에 매달아 놓은 해먹에 누워 명상에 잠기고, 미사가 끝나면 매일같이 어디에나 나무 한 그루씩 심었습니다. 남은 노동을 마저 하고 점심을 먹고나면 5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 속에서 긴 낮잠을 자고, 저녁이 되어 시원해지면 다시 일을 합니다. 주일에는 농부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면서, 글읽기를 배운 소년이나 소녀중 하나가 일어나 복음서를 읽고 강론 없이 신자들과 그날 읽은 말씀을 두고 대화를 나눕니다.

그들은 이 자리에서 “복음이 가난한 이들을 위한 기쁜소식”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거기서 하느님의 거룩한 영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 내용이 <말씀이 우리와 함께>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도 번역출간되었지요.

그는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공동체뿐 아니라 사회주의 실험을 하고 있던 쿠바방문(1970년)을 통해 ‘가난한 이들 속에서 새로운 인간이 탄생하고 있음’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새로운 인간은 이기심이 없는 인간, 이웃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봉사하는 연대적 인간이다. 새 인간은 사회주의적 인간, 다른 사람에게서 이익을 취하는 데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주는 데 의미를 두는 인간이다.”

그는 당연히 소모사정권에게서 미움을 받고 살해당할 위험도 겪어야 했지만, 태연자약한 태도로 일관했답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내가 수도자가 된 이래 세상과 내 생명을 포기했기 때문에 그들은 내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 나는 모든 걸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빼앗길 것도 없다. 마지막으로 내게 가할 수 있는 것은 죽임뿐이다. 결국 나는 많은 위협에서 면제받은 상태에 있다”고 말할 만큼 자유로왔다. 목숨을 거는 순간, 우리는 모든 걱정에서 해방되는 법입니다.

 

Ernesto Cardenal

니카라과 해방 이후

그러나 소모사 대통령 일가의 무절제한 탐욕과 독재정치는 1978년에 일어난 민중봉기로 무너졌습니다. 카르데날 신부는 줄곧 비폭력적인 평화적 수단을 앞세웠으나, 니카라과 민중은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의 투쟁을 지지했으며, 결국 산디니스타 전사들뿐 아니라 교회와 기업인들도 봉기에 동참하게 되면서 카르데날도 투쟁의 필요성에 동의하게 되었죠.

소모사 대통령은 빈민지역을 공군으로 폭격하면까지 봉기를 막으려고 했으나 결국 1979년 7월 17일 아침에 나라밖으로 도망쳤습니다. 니카라과가 군사독재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입니다. 그리고 혁명위원회는 카르데날 신부를 대중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는 같은 해 10월에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제서적 박람회에서 주관하는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때 평화주의자들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폭력혁명을 승인하고 동참할 수 있는지” 물었다. 카르데날은 “산디니스타들이 소모사 정부군에 총을 들고 저항한 것은 다윗이 골리앗이란 괴물같은 폭력집단에 던진 돌팔매와 같은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국가안보를 빌미로 민중에게 가하는 국가폭력은 용납될 수 없으며, 이에 침묵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폭력의 악신에게 굴종하는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에르네스토 카르데날이 사제가 되면서부터 항상 잊지 않았던 것은 사회변혁만 추구하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영적 갱신만을 추구하는 수도생활을 동시에 극복하는 것이었지요. 그것은 곧 자신이 세상과 교회 안에서 ‘사랑의 송신기’가 되는 것이라고 고백하면서 이렇게 말햇숩니다.

“우리는 이기적인 사랑에 한눈을 팔 여유가 없다. 이기적인 사랑이란 절연체(絶緣體)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 자신에 대한 사랑이 더욱 클 때, 그것은 우리 사랑의 흐름을 방해하고 억제하게 된다. 우리는 자신을 송두리째 사랑에 바쳐서 사랑의 고압전류가 우리 몸을 통해 흐르게 해야 한다. 우리는 사랑의 송신기들이다.”

 

[출처] <그대 아직 갈망하는가>, 한상봉, 이파르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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