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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자비는 바닥을 모른다

[한상봉 칼럼] 

제법 아파트 주차장에 빈터가 늘어난 여름휴가철이다. 이참에 우연찮게 동네 서점에서 눈에 뜨인 책이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人間失格>이다. 아무래도 자전적 소설 같다. 연인과 함께 서른아홉 살에 투신자살한 다자이 오사무, 이승의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소설에서 주인공 요조는 “인간의 알뜰함에 암담해지고 서글퍼졌다.”고 했다. “인간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 그러니까 일해서 먹고살아야 한다.”는 말이 낯설었던 사람이다. 그저 밥만 먹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해결되는 ‘실용적 괴로움’을 받아들일 수 없는 요조는 이렇게 말한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즉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괴로운 것치고는 자살도 하지 않고 미치지도 않고 정치를 논하며 절망하지도 좌절하지도 않고 살기 위한 투쟁을 잘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밤에는 푹 자고 아침에는 상쾌할까? 어떤 꿈을 꿀까? 길을 걸으면서 무얼 생각할까? 돈? 설마 그것만은 아니겠지. 인간이 먹기 위해 산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지만 돈 때문에 산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어. 아닐 거야. 그러나 어쩌면 ... 아니 그것도 알 수 없지”

요조는 부조리하면서도 나름 ‘튼튼한’ 세상을 감당할 수 없었고, ‘광인’이 되어 마지막에 하는 말은 그저 이 한 마디였다.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이른바 ‘인간’의 세상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끼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그가 여러 차례 생의 굽이에서 예수를 거명하면서도 종교에 귀의하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종교도 종교 나름이고, 실상 종교 안에서 더 큰 인간실격을 경험하지 말라는 법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세상이 어딘들 그리 다를까, 싶은 까닭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나의 수행은 '너'를 위한 것

그래서 필요한 게 ‘공부’라면 지나친 말일까? 세상에 떠밀려 살기에 급급하지 말고, 충분히 호흡하며 돌아보는 수행(修行)이 필요할 텐데, 그래야 마지막에 만나는 ‘허무’마저 넘어설 텐데, 하는 생각에 조급해지는 마음을 추수르며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다. 그리고 이름도 재미난 노골부들 이야기에 꽂혔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성덕왕 때 선천촌(仙川村)이라는 마을에 친구였던 노골부들과 단단빡빡이라는 젊은 대처승이 살고 있었다. 어느날 “농사가 잘 되어도 자연이 스스로 풍요한 것에 미칠 수 없다. 아내와 다정해도 앵무새 한 쌍의 즐거움에 미치지 못한다. 하물며 진리를 깨우쳐 부처가 되고자 하는 우리가 세속의 무리와 다름없는 생활에 얽매어 있어서야 되겠는가.” 생각하여, 그들은 가족과 마을을 떠나 지금의 창원 인근의 백월산 계곡으로 들어갔다.

단단빡빡은 계곡의 북쪽에 암자를 짓고 아미타불이 되고자 발원했다. 노골부들은 남쪽에 암자를 짓고 미륵불이 되고자 힘썼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향기도 고운 젊은 여인이 산에서 길을 잃었다. 먼저 북쪽 암자에 찾아가 딱한 사정을 전하며 하룻밤 묵기를 청했다. 물론 엄격한 수행자였던 빡빡은 문을 걸어 닫고 들어가 버렸다. 할 수 없이 그 여인은 다시 남쪽 암자로 가서 사정을 전했다. 부들은 여인의 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이 암자는 여인이 들어올 만한 데가 아니지만 산골짜기가 이미 어두워졌으니 어쩔 수 없구려.” 부들이 여인을 암자에 들이고 염불을 계속 하고 있는데, 거기서 여인이 아기를 낳았다. 부들은 여인에게 짚을 깔아 주고 목욕물도 데워 주었다.

이튿날 새벽에 빡빡은 남쪽 암자를 엿보러 찾아갔다. “부들이 지난밤 필경 파계를 했겠지.” 비웃어 줄 심산이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사실 관세음보살이었고, 이 여인의 딱한 처지를 돌보아 준 노골부들은 미륵불이 되어 이미 황금빛으로 눈부신 모습이었다. 단단빡빡은 매사에 청정무구하기를 원하니 사실 속물적 근성이 숨어 있었다. 나를 위해 부처가 되기를 원하나, 너를 위해 수행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노골부들은 남의 이목을 두려워하지 않고, 너를 위해 나를 놓아두었다. 어차피 나의 수행은 너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성찬례, 영성체보다 빵나눔이 중요하다

러시아 사상가 베르자예프(Nicolai Berdyaev)는 “나 자신에게 빵을 주는 것은 육체적인 문제이지만, 이웃에게 빵을 주는 것은 영적인 문제”라고 했다. 가톨릭교회에서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성사가 있으니 ‘성체성사’이다. 이를 두고 ‘영성체領聖體’라고 부르기도 하고 ‘빵 나눔’이라 부르기도 한다.

신자로서 거룩한 빵을 먹는 행위도 중요하지만, 빵을 나누어 먹는 것이 더 중요하다. 평범한 빵이더라도 쪼개어 나누어 질 때 ‘거룩함’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축성된 빵은, 이 빵을 먹은 이가 다른 이에게 빵을 나누어 줄 때 다시금 축성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 성체란 그래서 ‘사랑 충만한 빵’이다. 늘 매일미사에 참석하면서 성체를 받아 모실 줄만 알고 베풀 줄 모르는 이는 성체를 모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열어놓은 사랑의 출구를 자기 선에서 막아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에서, 자신이 마저 하지 못한 사랑의 의무를 제자들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이를 기억하자는 게 성찬례이다. 요한복음은 이 성찬례 대신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예수님은 ‘가까운’ 제자의 배신으로 죽음의 행렬에 들어서기 전에 그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어주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비록 종의 처지에서도 주인의 발은 씻어주지 않는다. 정결례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당시 유대의 도시들은 매우 불결했다. 길을 걸으면 오물과 먼지, 배설물과 쓰레기, 타고 남은 재와 썩은 음식물을 비껴갈 수 없었다. 그래서 발을 씻는 것은 위생의 문제였으며, 정결규정과도 상관이 있었다. 더구나 성전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자기 발을 씻어야 하며, 최소한 손을 씻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남의 발을 씻기는 일은 천한 노예들이나 아내와 자녀들의 몫이었다. 로마제국에는 수백만 명의 노예들이 있었는데, 주로 슬라브족(slavs)이어서, 여기서 노예를 뜻하는 ‘슬레이브’(slave)라는 말이 나왔다. 예루살렘의 노예들은 주로 시리아 노예였는데, 이들은 평생 노예살이에서 풀려나올 수 없었으며, 이들이 주인이나 손님의 발을 씻어주었다. 그러나 유대인 출신의 노예들에게 발을 씻기는 일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발을 씻는 것은 ‘이방인’ 노예나 하는 부정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7)고 말했는데,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종 가운데서 ‘이방인 종’으로 처신하였다. 하느님의 자비는 바닥을 모른다.

 

사진출처=pixabay.com

짐승의 거처에 짐승의 먹이로 오신 것처럼 

루카복음에서는 ‘하느님 바닥의 끝장’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강생사건’이다. 하느님께서 하느님이심을 포기하시고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셨다는 거다. 그분이 메시아이고 예수님인데, 그분은 태어나실 때부터 ‘바닥’이셨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루카 2,7)는 말처럼, 예수님은 아예 짐승의 ‘거처’에서 짐승의 ‘먹이’처럼 구유에 누워계셨다.

메시아를 알아보고 제일 먼저 경배하러 온 사람들도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2,8)이었다. 목자들은 당시 유대사회에서 바닥에서 일하는 천직이었다. 짐승을 다루기 때문에 몸에서 누린내가 났으며, 남들이 다 잘 때에도 깨어 있어야 했고, 그래서 마을에 도둑이 들면 제일 먼저 의심받는 사람들이 또한 목자들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오묘하고,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어리석지만 그래서 그만큼 거룩하다. 모세가 야훼 하느님을 처음 만나 이름까지 받아내었을 때, 그의 직업은 목자였다. 모세는 왕자의 자리에서 밀려나 천한 양치기가 되어서야 광야에서 그분을 만났다.

루카복음서에서는 목자들이 처음 아기 예수님을 만났을 때, 주님의 천사가 둘러서고,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고 전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2,14)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목수 부부와 아기, 그리고 목자들만큼이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이들은 세상에 없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소식이다.

마태오복음에서는 이 아기와 부모들이 권력의 살해 위협을 피해서 이집트로 피난하였다고 하니, 객지에서 이주민으로 사는 이들 역시 그 “마음에 드는” 사람들 축에 끼일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입버릇처럼 “가난한 이들은 행복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과부와 창녀들이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고 섬기러 왔다.”는 말을 하였으리라 믿는다.

이렇게 보면, 구원에서 배제되어야 할 인간은 없다. “원수조차 사랑하라”는 말이 있으니, 구원에서 영 실격당할 만한 인간은 없다. 내가 나를 단죄할 뿐이다. 어찌보면 천국의 문은 항시 열려 있다. 천국은 강론대에서 말만 하지 않고, 실제로 천국 문을 밀고 들어가는 사람들의 몫이다. 세상이 불편한 이들은 세상을 천국으로 바꾸라.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 이글은 종이신문 <가톨릭일꾼> 2017년 8-9월호(통권 8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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