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우침, 하느님의 거룩한 불길은 어디나 누구에게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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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우침, 하느님의 거룩한 불길은 어디나 누구에게나 있다
  • 죠안 치티스터
  • 승인 2017.08.20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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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찾는 이들을 위한 지혜-6

싱글레티카 수도원장이 말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사람들에게는 처음에 투쟁과 해야 할 일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난 다음에는 형언 할 수 없는 즐거움이 있게 된다. 마치 불을 지피는 것과 같아서, 처음에는 연기가 나고 눈이 맵지만 후에 당신은 원하던 결과를 얻는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 안에 거룩한 불을 밝히기 위하여 눈물과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영적 삶에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일은 종교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규칙과 법칙, 교의와 교리의 차원에 머물게 될 때에 -물론 이런 것들이 좋은 안내자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고 이런 것들을 영적인 삶이라고 부르게 될 때에, 우리는 삶의 의미, 거룩함에 대한 초대, 자아의 충만함이라는 주제로부터 훨씬 멀어지며 멎게 된다.

깨우침은 하느님을 찾기 위하여 우리가 만든 모든 것들을 초월하여 보는 능력이다. 우리는 종교를 만들기 때문에, 종교가 아닌 곳에서 하느님다움을 발견하는데 실패한다. 하지만 선함은 가장 단순한 사람들, 가장 오지인 곳에 분명하게 보이고 또 한결같이 나타난다.

우리는 국가의 명예를 하느님이라고 만들었기 때문에 다른 국가들, 특히 비그리스도교 국가들에게서 하느님의 현존을 보는 데에 실패한다. 우리는 개인의 안전을 하느님으로 만들기 때문에 삶의 삭막하고 황량한 측면 속에서 하느님을 보는 데에 실패한다.

우리는 우리자신의 인간적인 속성을 하느님으로 만들기 때문에 다른 모습으로 오는 존재 안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한다. 우리는 하느님에게 성(性)을 주기 때문에 모든 곳의 모든 사람 안에서 움직이는 하느님의 영을 놓친다.

우리는 물질과 정신이 마치 두 개의 다른 것인 양 갈라놓는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양자 물리학으로부터 물질이 정신 에너지에 의해 압축된 힘들의 장(場)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우주와 하나로 일치되어있다. 우리는 우주로부터 분리된 것도 아니며 우주와 다른 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주 위에 있지 않다. 우리는 그 안에 있으며, 우리 모두와 모든 것은 하느님인 에너지 안에서 헤엄치고 있는 것이다. 깨우치는 것은 모든 것들을 존재하도록 붙잡고 있는 하느님을 형상들 그 뒤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깨우침은 또한 하느님을 인격화시키려고 하는 모양들과 초상들을 뛰어넘어 너무나 인격적이며 너무나 포괄적인 하느님, 어떤 형태나 모습, 이름이든지 모든 표현 방식을 취하는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 깨우침은 우리의 편협함을 넘어 모든 곳에, 모든 사람 안에, 온 우주 안에 현존하는 하느님께로 우리를 이끌어준다.

깨우친다는 것은 어떤 단일한 방식이나 한가지 명시, 어떤 특정한 분파나 특정한 국가구조가 아무리 선하고 의도가 좋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밀착되지 않고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주변의 모든 것에 현존하는 하느님과 만나는 것이다.

기도하기 위하여 경당으로 들어가면서 제단에 절한 후 옆의 동료들을 돌아보며 인사하는 것은 많은 수도원에서 실천하는 한가지 예이다. 이러한 수도회의 관습의 의미는 분명하다: 하느님은 똑같이 우리주변의 세계에, 서로 안에, 제단 위에 있는 사람이나 경당에 있는 사람 모두 안에 계시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 삶이며 우리 영혼의 숨결이요, 온갖 형태의 삶에 대해 더 이해를 높이도록 늘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는 것이다.

깨우치는 것은 천국이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천국은 이곳이다. 아서왕과 성배를 찾으려는 그의 탐색처럼 우리가 천국을 잘못된 곳에서 찾으려고 하고 온갖 잘못된 우상들을 섬기며 하느님에 관한 온갖 잘못된 개념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늘상 다른 곳으로만 가려고 하나, 바로 이 자리, 내가 서있는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이든간에 바로 내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자리이며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생명과 내가 일치하는 자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관상가가 되기 위하여 나는 하느님과 나를 떼어놓는 분리의 개념을 내려놓아야 하며 나의 작은 삶의 구멍 속으로 우주를 통해 침투해 들어오는 모든 것들 속에서 하느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도록 허락해야 한다. 그 때에 나는 싱클레티카 여원장이 약속하듯이, 거룩한 불길의 섬광 같은 빛 앞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원출처] <Illuminated Life, Monastic Wisdom for Seeker of Light>, Joan Chittister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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