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하는 프란치스코와 클라라
상태바
출가하는 프란치스코와 클라라
  • 월리암 J. 쇼트
  • 승인 2017.08.20 15: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가난과 즐거움-2

앗씨시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이태리의 북 중앙 지역의 앗씨시 사회에서 12세기 후반에 태어났다. 프란치스코는 1181년 아니면 1182년에, 클라라는 1193년에 아니면 1194년에 태어났다. 봉건주의의 초기 문화가 특히 이태리 중부에서 새로운 세력에 길을 내주고 있었다. 상인들의 새 계급이 확연히 드러났다.

앗씨시 같은 곳은 정치권에서도 봉건 영주들과 세력을 겨누었고, 좋은 경기와 무역이 물물교환과 기본농업을 대체하고 경제의 동력이 되었다. 길이 개선되고 더 안전해졌으며 이는 교역하는 상인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하여 앗씨시 같은 곳은 전 이태리지역으로,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로 나머지 유럽으로, 그리고 바다 길을 통해서는 중동 아시아와 북 아프리카까지 갈 수 있는 교통 요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정치세력은 반목하면서 글라라의 가족을 포함한 앗씨시의 귀족들, 신성 로마제국 황제의 동맹세력인 귀족들과 상인 계급(프란치스코의 가족을 포함한)을 갈라놓았다. 상인 계급은 제국과 귀족으로부터 오는 멍에를 부수고 싶었다. 앗씨시는 이처럼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의 유년기에 이미 전쟁 중이었고, 얼마 후에는 인근 도시이고 경쟁 상대이며 앗씨시의 수평선에서도 볼 수 있는 페르지아와도 전쟁을 하게 된다.

그러나 또한 거룩한 전쟁, 십자군전쟁도 있었다. 수많은 기사들, 예언자들, 걸인들과 모험가들이 유럽으로부터 근동으로 몰려갔다. 십자군은 전투 후 무공을 세운 기사들만 앗씨시로 데려온 것이 아니라 나병도 가져왔다. 한센병은 전 세기에 유럽에는 거의 없었으나 근동에서는 풍토병이었다. 한센병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시 정부와 교회당국은 감염된 이들을 고립시키는 엄격한 법을 제정하기 시작했고 프란치스코과 글라라가 태어났을 즈음 이미 앗씨시에는 환센병 환자 병원이 시 성벽 외곽에 철저한 검역을 통해 존재했다.

13세기 초기에는 설교사들, 예언자들과 개혁가들이 가득했고, 십자군의 변화하는 운에 따라 불안과 기대가 극적으로 교차되는 메시지를 퍼뜨리고 있었다. 불안은 구원에 관한 것이었다. 심판이 가까웠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구원될 것이다, 오로지 이 선생, 저 교리, 혹은 이 다른 ‘삶의 규칙’만을 따라야 구원의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믿어졌다.

대중 설교가들의 메시지에 놀란 교회당국은 이단적 움직임이 퍼지는 것에 점점 더 불안해 갔다. 주교들과 사제들 그리고 성사로 무장한 요새 같은 교회들이 프랑스 남부에, 북부 이태리의 롬바르디에, 그리고 앗씨시 가까운 근방에 자리 잡았다.

 

사진출처=myheartartbygeri.com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는 1181년 혹은 1182년에 앗씨시의 부흥하는 한 상인 계급의 가족에게서 태어났다. 그는 세례자 요한으로 세례 받았고 별명으로 '프랑스 사람'이라는 의미의 ‘프란치스코’로 알려졌다. 약간 천박스러운 청년기를 보내고 프란치스코는 가업인 옷감사업에서 일한 후 기사가 되어 사회적 지위를 높이고자 했다.

페르지아와의 전쟁에서 그는 잡혔고 옥에 갇혔다. 풀려난 후 몹시 앓았고, 다시한번 이태리 남부에서 기사직을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한 후, 프란치스코는 회심을 겪기시작했다. 그는 평신도 은수자처럼 살았고, 자주 기도하기 위하여 고독한 자리를 찾았다. 교회를 복구했고, 나환자들을 섬겼으며 추종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첫 번째 형제들이 열두 명쯤 된 후, 그들은 교황 인노센트 3세로부터 생활방식을 구두로 인정받았다.

프란치스코는 여러 번 선교사명을 수행했다. 첫 번째는 이태리에서, 후에는 스페인을 거쳐 모로코로 가려고 시도했다(병 때문에 되돌아와야 했지만). 그리고 제 5차 십자군전쟁 때에는 에집트로 가서 이슬람의 지도자인 말렉 엘-카밀 앞에서 가르쳤다.

프란치스코는 또한 기도하기 위한 고독의 자리를 계속 찾았고, 때때로 해마다 몇 달 씩을 이태리 중부에 있는 산의 암자에서 보내기도 했다. 마지막 시기에 건강을 잃으면서 프란치스코는 지금은 '작은 형제회'라고 부르는 수도회의 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죽기 3년 전에(1226년 10월 3일에 임종) 프란치스코는 그들의 회칙이 교황 호노리우스 3세, 그레고리 9세에 의해 승인되는 것을 보았다. 그는 1228년에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St. Clare of Assisi © Jen Norton She was quite a rebel in her day!

클라라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클라라는 대조적인 환경에서 자라났다: 즉 전쟁과 기도, 부와 추방 등. 그의 아버지는 앗씨시의 저명한 시민이었고 어머니는 성지순례를 잘 가는 신심 깊은 여인이었다.

그의 가족 남자들은 기사, 군인이었는데 지역의 다른 귀족들과 군사, 정치적으로 동맹관계를 맺었고 황제를 지지했다. 앗씨시의 상인들은 황제의 ‘점령군’과 그들을 돕는 귀족들을 도시에서 몰아내고 싶었다. 그리하여 앗씨시에서 내전이 일어났고, 여기에 프란치스코도 참가했다. 귀족과 황제 군대가 패해서 클라라는 가족과 함께 페르지아로 도망가 7년을 머물렀다.

사춘기 후기, 결혼적령기에 도달했으나 클라라는 미래의 남편들을 거부했다. 그는 음식을 모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었고 지역의 교회 재건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두었다.

그는 프란치스코와 그의 회심에 관해 알게 되었다. 그는 가족 몰래 친구와 함께 프란치스코를 만났다. 점차 클라라는 자신이 찾고 있던 것이 프란치스코 방식의 삶 안에 있다고 믿었다. 성지주일 저녁에 18살의 클라라는 몰래 집을 빠져 나와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이 기다리고 있는 교회로 갔다. 그곳에서 머리를 자르고 베일을 썼다. 이것은 좀 기이한 예식이었다. 마치도 공식적으로 권위가 없는 한 사람에 의해 종교적 봉헌이 허락되어 그때까지 오로지 남자들만이 구성원으로 모인 운동에 참여한 것과 같았다.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은 그 밤으로 클라라를 가까운 곳에 있는 베네딕도 수도원으로 데려갔다. 그곳은 교황의 직접 보호하에 있었다. 다음날 클라라의 삼촌들이 화가 나서 달려와 그를 끌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클라라는 베일을 벗고 머리칼을 자른 모습을 보였으며 오랜 지성소의 보호권 안에 있다고 주장했다.

프란치스코의 도움으로 클라라와 그의 동생은 새로운 집으로 옮겨갔다. 몇 년 전 프란치스코가 수리한 산 다미아노의 작은 교회에 거주지를 마련했다. 다시 한번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의 행동은 당황스러운 모습으로 보인다: 비록 프란치스코가 수리했다고 하여도 교회는 프란치스코가 클라라에게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주교의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클라라와 동생 아그네스에게 앗씨시의 다른 여성들 약 50명이 합류했으며, 클라라는 그곳에서 1253년 8월 11일 죽을 때까지 40년을 살았다. 그는 1255년 교황 알렉산더 4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원출처] <가난과 즐거움-프란치스코회의 전통>, 월리암 J. 쇼트(프란치스코회)
[출처] <참사람되어> 2008년 10월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