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 해방신학에 영감을 불어 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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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 해방신학에 영감을 불어 넣다
  • 한상봉
  • 승인 2017.08.14 14: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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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tolomé de Las Casas (1474-1566)

우리는 민중들의 외로움과 그들의 가정문제,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영위하는 의미없는 삶에 주목한다.
오늘날 우리는 특히 가난으로 인한 불안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우리는 이 가난을 신앙의 빛으로 바라보면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에 벌어져 가는 격차를
그리스도인 실존에 모순되는 수치로 본다.|
소수의 사치는 거대한 대중의 비참한 가난에 대한 모독이다.
우리가 이 가난한 얼굴들 속에서 감지해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질문하고 도전하시는 그리스도의 고통스런 모습이다.
(3차 중남미주교회의, 푸에블라 문헌, 2장2항)

1987년,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했던 봄날, 내 영혼을 온통 사로잡았던 영화가 있었지요. 롤랑 조페 감독의 <미션>입니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영화음악 <가브리엘 오보에>로 더 유명해졌던 영화지요. 18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순교한 사제와 수도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가브리엘(제레미 아이언스) 신부가 십자가를 메고 이과수 폭포를 올라가서 그들과 눈빛을 마주치고 오보에를 붑니다. 노예상인으로 악명을 떨쳤던 맨도사가(로버트 드 니로)가 개과천선하여 바로 그 폭포를 거슬러 오르며 죄업을 끊어내는 장면은 종교적 수행이 가난한 민중의 아픔과 어떻게 밑닿아 있는지 잘 보여줍니다.

그해 이른바 6월 민중항쟁이 일어나고, 민주주의로 가는 물꼬를 터 주었지요. 그 봄에 동료들과 ‘제3세계신학회’라는 서클을 만들어 해방신학을 공부했습니다. 대학 라운지에서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을 읽으며 우리는 돌아가며 무릎을 쳤습니다. “이게 복음이구나!”하고 말입니다. 그후론 라틴음악만 들어도 머리털이 곤두서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교 해방전사’라는 말이 가슴팍을 후비고 들아와 앉았습니다.

구티에레즈의 하느님은 ‘억눌린 자들을 해방하시는 분’이었습니다. 해방신학의 핵심용어인 ‘프락시스’(Praxis, 실천)에 대해서 구티에레즈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용어는 우리들에게 이 사회의 비참한 현실, 그 비참한 현실 가운데서 고통받고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먼저 기억하게 한다. 그들은 인간으로 누릴 수 있는 존엄성을 이미 박탈당했으며,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최소한의 권리마저 빼앗긴 채 살고 있다. 이 불쌍한 사람들을 ‘해방하는 실천(Praxis)’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과 함께 연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 발견했던 이름이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입니다. 이 긴 이름을 무슨 주문처럼 외고 다녔죠. 그는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뒤로 스페인 사람들이 ‘인디오’라고 부르던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자행한 학살과 참상을 고발하고 ‘그들도 하느님의 자비 안에 있는 인간’임을 선포한 사제이며 주교가 된 예언자였습니다. 해방신학은 라스카사스 신부가 선택했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지금여기에서’ 다시 선택했던 신학적 성찰입니다.

인디언의 눈물을 닦아준 사람

Bartolomé De las Casas

구티에레즈가 지은 <라스카사스>라는 평전에서 ‘인디언의 눈물을 닦아준 사람’으로 부른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중심도시인 세비야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라스카사스는 신대륙에서 출세와 영광을 꿈꾸던 평범한 청년이어서 콜럼버스의 2차 신대륙 항해에 참여했으며, 1902년에는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엥코미엔타’ 제도에 따라 영토를 받고 원주민 노예를 사용하는 대가로 그들에게 가톨릭신앙을 전파하겠다는 계약을 체결합니다.

그러나 1511년 8월 15일, 라스카사스는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의 선교사였던 안토니오 데 몬테시노스가 스페인의 식민지 통치를 격렬하게 비난하는 강론을 듣고 감동하여, 자신이 식민정복자의 하나로 잘못 살았음을 깨우치고 회개합니다. 당시 스페인은 그라나다 왕국의 무슬림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가톨릭신앙을 강요했던 것처럼 1492년 이후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무력을 통한 선교를 주도했지요.

스페인 사람들에겐 선교라지만,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겐 끔직한 재앙이었습니다. 스페인 군대의 대포소리가 울려퍼지기 전에 사제들은 어리둥절해하는 인디언들을 향해 개종권유문을 낭독하곤 했지요.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라틴어로 권유문이 낭독되고 무참한 살육이 진행되는 동안 사제들은 ‘평화를 위한 기도문’을 계속 읊조렸지요.

라스카사스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범죄에 자신이 동참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소유했던 노예들을 즉각 석방했습니다. 그 후로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진정한 신앙을 전파하겠다는 열망을 품었습니다. 결국 1512년 그는 아메리카에서는 처음으로 사제로 서품되었는데, 아메리카의 첫 사제가 스페인의 식민지 정책을 반대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는 수차례에 걸쳐 대서양을 오가며 스페인 정부와 교회, 대학의 지성인들에게 각성을 촉구하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미 1500년에 발표된 스페인 공식문서에선 인디언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고 그들도 그리스도교인이 될 수 있음을 분명히 밝혔으나, 식민정복자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과 욕심 때문에 인디언들을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취급하였고, 정글의 ‘자유로운 짐승’으로 남아 있는 것보다 자신들의 노예로 사는 것이 더 낫다고 여겼습니다.

인디언은 짐승도 광장의 똥도 아니다

1525년에 쓴 글에서 토마스 올티즈 신부는 “인디언들은 복음을 이해하기에 부적절한 인종이다. 하느님은 이러한 사악한 인종을 창조하신 적이 없다. 인디언은 당나귀보다 더 멍청하며 우리 유럽인들의 어떠한 조언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라스카사스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는 인디언들도 하느님의 아름다운 창조물이며 모든 인류는 하느님 앞에서 하나라고 주장하며 다른 선교사들과 충돌했지요. 라스카사스는 인디언들을 ‘짐승’이라고 부르는 선교사들을 오히려 ‘굶주린 늑대’라고 표현하고, 그들의 강압적 선교야말로 반(反)그리스도교적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라스카사스는 1552년에 쓴 <인디언 파괴에 대한 보고서>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들은 겸손하고 인내력이 있으며, 평화롭고 온화하며, 이 세상 어디에나 가득한 분쟁도 소요도 없고, 분노도, 불평도, 증오도, 복수심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가장 섬세하고 여위고 연약한 체격의 사람들이어서 노동을 견디기에 힘들고 작은 질병에도 죽습니다. 그래서 비록 노동자의 혈통일지라도 우리들 가운데 왕자들과 영주들의 자식들보다도 허약합니다. 또한 매우 검소하여 최소한의 것들만 소유하고 더 가지려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거만하지도 않고 야심도 없고 탐욕도 없습니다. ...

맑고 걱정이 없으며 생기 가득한 이해력을 가지고 있어서 좋은 교리를 받아들일 능력이 있으며, 순응적이고 우리들의 신성한 가톨릭신앙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합니다. 이들은 하느님이 이 세상에 창조하신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기에 가장 최소한의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라스카사스는 이처럼 인디언을 옹호하며, “스페인 사람들은 이 온순한 양과 같은 사람들을 늑대나 호랑이나 사자로 알고 쳐들어가 우리들이 결코 보지 못했던 잔인한 방법으로 그들을 찢어 죽이고 고통스럽고 비통한 방법으로 파괴했습니다. 에스파뇰라 섬에는 3백만 이상의 주민이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들 가운데 200명도 남지 않았습니다.”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20년 동안 1200만 이상의 인디언들을 학살했다고 보고하는 라스카사스는 스페인 사람들이 인디언들을 광장의 똥만큼도 취급해 주지 않았다고 고발하며 시정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에 공감한 스페인의 황제 카를 5세는 강압적인 무력 선교를 중지시키고 라스카사스에게 지금의 베네수엘라 지역에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설립하고 지시했습니다. 그 공동체는 스페인 이주민들과 원주민들이 협력해서 농장을 운영하려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인근에서 노예를 부리며 농장을 운영하던 식민정복자들의 방해와 음해로 이 구상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Bartolomé De las Casas, defensor de los indios pero partícipe en la esclavitud africana

그리스도를 그들을 위해서도 죽으셨다

낙심한 라스카사스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저술과 연구를 통해 아메리카의 현실을 고발하고 신학적 성찰에 몰두합니다. 그 결과 1530년 스페인 국왕은 그의 청원을 받아들여 신대륙에서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칙령을 내리고, 교황 바오로3세는 1537년 교서를 통해 “아메리카 원주민도 하느님을 믿을 수 있는 이성적 존재이며, 따라서 그들의 종교적 권리도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보호되어야 한다”고 밝힙니다. 또한 1542년에는 신법(New Law)이 스페인에서 채택되어 ‘엥코미엔타’ 제도는 종말을 고합니다.

이후 라스카사스는 1544년에 지금의 과테말라 지역인 치아파스의 주교가 됩니다. 그는 이 새로운 법에 따라 인디언의 권리를 보호하고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조직하라는 임무가 다시 주어졌지요. 그는 임지에 도착하자마자 과격한 조치를 취합니다. 소유하고 있는 노예를 즉각 석방하지 않는 식민정복자들에게는 성체성사를 베풀지 말라고 교구의 모든 사제들에게 지시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 역시 격렬한 반대에 부딪쳐 결국 좌절되고 스페인으로 귀국해 세풀베다와 유명한 신학논쟁을 벌입니다.

세풀베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쟁 정당화 이론과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을 이용해 무지몽매한 인종의 노예화는 합법적인 것이며, 아메리카 원주민은 하느님을 인식할만한 이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했지요. 그러나 라스카사스는 “인디언들 또한 우리들의 형제이며,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서도 자기 생명을 바쳤다”고 반박했지요. 이 논쟁 후에 라스카사스는 16년 동안 스페인에 머물며 <라틴아메리카의 파괴> 등 저술활동을 하다가 1566년 마드리드에서 임종하여 그곳 작은 성당에 묻혔습니다.

그가 죽은 뒤에 400년이 훌쩍 넘어서야 라틴아메리카에서 진정한 인간해방과 구원을 향한 새로운 모색이 이뤄졌습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주장하며, 무력한 바닥민중이야말로 복음을 제대로 알아듣는 특권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입증한 ‘해방신학’과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투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출처] <그대 아직 갈망하는가>, 한상봉, 이파르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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