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셉 카르댕, 노동세계의 구원을 위한 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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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카르댕, 노동세계의 구원을 위한 사도
  • 한상봉
  • 승인 2017.08.07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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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ph Cardijn (1882-1967)

네 생애를 두고 돌보아 준
새 한 마리 있었더냐?
네 영혼을 두고 마음에 담아 둔
또 한 영혼이 있었더냐?
그분이 묻고 나는 답해야 한다.

내가 노동문제를 처음 접한 것은 천주교사회문제연구소에서 일할 때 <노동헌장> 반포 100주년 기념심포지엄을 준비하면서입니다. 레오 13세 교황이 반포한 회칙 <노동헌장>이 한국교회사 안에서 가난한 이들, 특히 노동세계에 한국교회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가늠해 보려는 것이었지요. 당시 해방신학을 공부하던 저는 이후에 노동신학을 해보고 싶더군요.

마침 필리핀에 방문할 기회를 얻었는데, 거기서 여성노동자운동을 동반하던 에밀리아나 수녀를 만났습니다. 그분에게 “노동신학에 관한 자료 있나요?”라는 학구적 질문을 던졌더니, 그분은 오히려 내게 “어느 노동자가 당신에게 신학을 해달라던가요?” 하고 실천적 질문으로 되묻더군요. 당시까지 신학적 관심을 넘어서 노동자 현실에 대한 탐구나 직접참여, 아니 노동계층을 직접 대면한 적이 없던 나는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생각한 것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현실 한가운데서 경험하는 하느님을 이야기할 때, 바로 그것이 노동신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해에 의자공장에 취직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노동사목 활동가로 일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마다 스스로 용기를 주고 길을 알려줄 스승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만났던 사람이 곧 벨기에의 조셉 카르댕 추기경이었지요. 카르댕 추기경은 노동세계의 신성함과 평신도 노동청년들의 사도적 직분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였고, 평생을 노동세계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사제와 노동자

Joseph Cardijn

조셉 카르댕은 벨기에 브뤼셀의 블롱도가(家)에서 마부 겸 정원사 노릇을 하던 아버지와 집안 청소와 부엌일을 맡았던 어머니 사이에서 1882년에 태어났습니다. 그후 공단지역이었던 하알로 더부살이를 간 가족들과 함께 성장했지요. 조셉은 어린시절부터 병약하였으나 쾌활한 성품을 지녔는데, 조그만 마을에서 미장이, 목수, 빵가게 주인, 재봉사, 농부, 대장간 일꾼들과 심지어 놀이터에서 이빨 뽑아주는 사람과 거지들과도 낯을 익히며 지냈습니다. 등하교 길에 걸음을 멈추고 신기한 듯이 그들이 일하는 솜씨를 지켜보곤 했는데, 그네들에게 말을 걸고 연장을 만지작거리는 재미가 그만이었답니다.

한편 아침저녁이면 가까운 촌락에서 모여든 남녀 노동자들이 공장에 가려고 줄지어 집앞을 지나가는 서글픈 광경을 봐야했다고 그는 기억합니다. 근처의 제지공장, 유리공장, 주물공장, 특히 튀비즈의 인조견 공장으로 일하러 가는 사람들입니다. 조셉은 새벽 4시면 바둑돌로 포장된 골목길에서 들리는 나막신 소리에 잠을 깨곤 했죠. 이들 중에는 10대 소년들이 많았는데, 더 어린 아이들도 부모의 손에 끌려 일터로 갔습니다. 그리고 광부들이 파업을 했다는 소식, 그들에게 경찰이 곤봉을 휘둘렀다는 이야기, 누가 감옥으로 잡혀 들어갔다느니 하는, 어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이미 노동현실에 눈을 떠서 여느 사회주의자들처럼 노동자들 편에서 강론하고 조직을 만들던 단스(Daens) 신부의 강연회에도 아버지를 따라서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부모 덕분에 공장노동에 매달리지는 않았지만 참혹한 노동세계는 바로 옆에 있는 실재였지요. 아버지는 하알에서 석탄 파는 상점을 열었고, 어머니는 술집을 열기도 했습니다. 이 상황에서도 그는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부모의 헌신으로 겨우 메헬른 소신학교에 겨우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충격적인 것은 방학이 되어 집으로 돌아와도 친구들이 아무도 예전처럼 자기를 대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다들 공장 노동에 지쳐 있었으며, 단스 신부 등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노동문제에 등을 돌리고 있던 교회를 환멸에 가득찬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은 무서운 경험이었습니다. 옛 친구들은 조셉을 ‘꼬마신부’라고 부르며 멀리하였고, 조셉은 이들이 사제들을 ‘노동자의 원수’로 여기고 있음을 깨닫고, “내 가슴이 비수에 찔린 듯 아팠다”며 평생을 두고 고백합니다.

이들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하기로 작정한 조셉 카르댕. 그는 1906년 사제서품을 받고 라컨의 보좌신부가 되자 동료사제들이 병자성사를 달라는 부탁을 받기 전까지는 발도 들여놓지 않던 노동자거주지와 빈민가에서 늘 가난한 이들을 찾아다녔습니다. 노동세계의 그늘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1914년, 독일군이 벨기에로 진주해 왔을 때는 저항운동에 참여하게 되는데, 성 구둘라 성당에서 전몰자들을 위한 장엄미사를 봉헌하면서 독일군의 침공을 규탄하고, 1916년에는 브뤼셀 그리스도인 노동자 13만 명의 이름으로 벨기에 노동자들이 독일로 징용당하는 것을 반대하는 공개항의서를 점령군과 중립국과 교황 앞으로 발송했습니다. 그 대가로 조셉 카르댕 신부는 군사법정에 서야 했는데, 13개월의 징역형, 130마르크의 벌금형, 그리고 생질 형무소 58호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감옥에서 카르댕 신부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꼼꼼이 읽고 영감을 얻어 이렇게 말했답니다.

“20세기 전반기에는 새 세계의 출현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세계는 혁명과 투쟁과 파괴를 겪지 않고는 오지 않으리라. 평화롭고 조용하게 새 질서가 들어서기에는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분노가 쌓였고, 너무나 많은 고통을 당했으며, 너무나 많은 불의가 저질러졌고, 너무나 많은 범죄가 행해졌다.”

Joseph Cardijn

노동세계를 향한 중단없는 투신

전쟁 이후 카르댕 신부는 열성적으로 ‘가톨릭노동청년회(JOC)’의 건설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는 평신도의 사제직분을 굳게 믿었던 사제였으며, 훗날 요한 23세 교황에게도 평신도 사도직에 대한 영감을 주었다고 합니다. 카르댕 신부는 청년 노동자 스스로 ‘노동자의 그리스도교 인본주의’를 가꾸어 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느꼈지요. 그는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해방하시는 노동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노동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노동자의 존엄성을 지렛대로 노동세계를 ‘들어 높이자’는 것이 카르댕의 생각이었는데, 그는 노동자들이 복음정신으로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카르댕이 민중의 당파적이고 정치적인 요구를 자주 옹호하고 나서자, 주교들과 교회의 부유한 권력층은 그가 사회주의를 부추기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이는 가톨릭교회의 일치를 깨뜨리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노동자들에 대한 자선은 좋지만 그들이 스스로 조직화 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카르댕의 노동청년운동은 일부 비난에도 불구하고 질풍노도같이 번져나갔으며, 이미 늙어버린 메르시에 추기경도 이 흐름을 가로막지 못했답니다.

결국 카르댕은 이 문제를 판결해주도록 교황에게 갔는데, 교황 비오 11세는 의외로 “이제야 마침내 대중에 관해 말을 해주는 사람을 만났다”고 반가워하며 카르댕의 노동청년운동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브뤼셀 JOC창립 10주년 기념식에는 8만 5천명의 청년노동자들이 참석했으며, 그중에는 벨기에뿐 아니라 온 유럽과 캐나다, 콜롬비아, 콩고 등지에서 온 이도 있었습니다. 1937년에는 프랑스 회원만 6만5천 명을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교황 비오 12세에 와서는 가톨릭노동청년운동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교회 안에서 조셉 카르댕과 가톨릭노동청년회를 향한 비난 역시 그치지 않았습니다. 노동운동이 주로 사회주의운동과 결합되어 있던 현실 속에서, 교회는 사회주의운동뿐 아니라 노동운동 자체를 거부해 왔던 것입니다. 이에 카르댕은 교회가 복음과 노동세계의 현실을 제대로 볼 것을 주장했죠.

“반(反)사회주의와 반공주의로는 노동자 계급을 구하고 교회에서 멀어진 민중을 다시 교회로 이끄는 데 충분치 못하다. 마르크스주의 안에는 하나의 진리의 핵이 엄청난 폭발력을 지니고 있다. 이 점을 사람들은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있다. 즉 마르크스는 노동자 계급에 세계를 구원할 임무, 메시아적 사명을 부여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의 강점이다. 공산주의를 논하는 교황의 회칙은 문제를 부정적인 면에서만 다루고 있다. 대부분의 내용이 공산주의를 말살하는 방법만 찾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주신 노동자 계급의 사명에 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결국 비오 12세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JOC가 신중하지 못하며, 계급투쟁을 선동하고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JOC가 그리스도와 마르크스라는 두 주인을 섬기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노동운동을 지지하면 마르크스를 따르는 것이고, 이것은 곧 그리스도를 버리는 행위라고 비난한 것이지요.

그러나 카르댕은 굽힘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소박한 노동자 한 사람을 선봉투사요, 동료 노동자들을 구할 수 있는 사도로 삼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단순한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작고 겸손한 사람들에게는 당신을 드러내시고 크고 오만한 사람들에게는 당신을 감추셨으니 감사하다고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또 역사를 보십시오. 작은 이들이 교회를 키워왔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작은 이들의 부요함을 알아야 하며, 그들의 가능성을 믿어야 합니다.”

1945년에는 국제가톨릭노동청년회가 창설되고,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 온갖 모함과 비난 속에서도 청년노동자들과 평신도의 자발성을 믿었던 조셉 카르댕은 1965년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추기경으로 지명됨으로써 그의 그리스도교적 신앙과 노동세계의 구원을 위한 확신이 교회 안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셈이 되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 83세였지요.

그가 추기경이 되어 로마에서 명예교좌(敎座) 받아야 했을 때, 그는 “내게는 가장 가난한 교회를 정해달라”고 주문했습니다. 결국 카르댕 추기경은 피에트랄라타에 있는 ‘성미카엘대천사 성당’을 자신의 명예성당으로 정했는데, 그곳은 로마 변두리에 있는 노동자 밀집지역이었습니다. 대성당은커녕 건물을 짓다가 중단한 허름한 성당이었으며, 첫 방문을 갔을 때 비를 피하려고 성당에 들어서자 천정에서 빗물이 줄줄 새고 있었습니다. “전세계 노동청년이 내 교구”라고 즐겨 말했던 만년의 카르댕 추기경, 그는 자신의 노동자들을 위해 세웠던 첫마음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1967년 7월 24일 고요히 이승과 작별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출처] <그대 아직 갈망하는가>, 한상봉, 이파르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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