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해지고 싶다, 덩치 큰 내 친구 예수의 아범 사람 좋은 하느님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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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해지고 싶다, 덩치 큰 내 친구 예수의 아범 사람 좋은 하느님 앞에서
  • 한상봉
  • 승인 2017.08.07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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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모든 삶은 장엄하다]-15

살림이 서면 잔정을 키우고, 잔정이 자라면 큰 사랑도 해보고 싶다.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다 가능성 그대로 남아 있는 게 산중 생활이다. 나의 호미가 닿는 곳에 씨를 뿌려 곡물을 거두고, 나의 눈길 닿는 곳에 꽃밭을 꾸미고, 나의 손길 머무는 곳에 방을 들여 살면서, 몇 안 되는 이웃이지만 알콩달콩 잔정을 키우다 보면, 어느 새 내 그릇이 커져서 ‘만사만인에게 모든 것’이 될 수도 있지 않겠나 하는 가능성말이다.

뒷간도 제멋대로 고치고, 제 먹고 싶은 것 맘대로 키워서 먹고, 제 좋은 사람 불러다 하고 싶은 이야기 나누고, 산골이 답답하면 출타도 가끔 하고, 책 읽어 좋은 구절 이웃에게 나눠 주면 뭔가 좋은 일 생기지 않겠나 싶다. 다만 괜한 욕심만 줄일 수 있다면 말이다. 그래서 남들이 다 시시하다고 내버린 것들을 주워다가 그럴 듯한 예술을 하는 멋있는 인생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채광석 시인, 평론가

채광석이라는 시인은 「사랑노래」라는 시에서 “시시해지고 싶다”고 했었다. 그이는 박정희 유신 정권이 한참 서슬 퍼렇게 날뛰던 시절에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는데, 감옥에서 연인(戀人)에게 이런 시를 편지에 붙여 띄웠다.

이렇게 쓰리라 한다. 님이여
그날 아침 유난히도 헛구역질, 먹고 싶은 것이
많아져 입 안이 부숭부숭하더니만
당신의 편지가 맞아 떨어져 나는 운다
응애, 삼신할멈 깡마른 손바닥에 얻어터지며
그대를 만나려 나는 운다. 님이여
보고 싶어,
그것이 그대에게 고통일지라도 다만
보고 싶어,
가시가 되어 그대의 손가락에 틀어박혀
바늘끝이 후비어도 그저 그리움으로 남고 싶어,
고집스레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님이여
쉬어빠진 김치 한 보시기 그저 사랑하는 까닭에
맛있다 맛있다 하며 먹고 지워 이 밤은 나가고
나가고 싶어지는 것이다, 님이여
세월보다도 높다란 저 담벼락을 벗어나
함께 있고 싶어지는 거다. 무너뜨리고
무너뜨리고,
사랑 안에 모든 잔주름 녹여버리고
어느 날 갑자기 그대 앞에 당당히 손을 내밀고
싶어지는 거란다, 님이여
크게는 말고 조금씩, 정말이다, 님이여
조금씩만 나눠 웃으며 자잘한 얘기 큰 목소리로
나누며 시시해지고 싶어
시시해지고 싶어
나는 운다 님이여 시푸르둥둥한 엉덩이에 퉁그스의
후손답게 누린 피부로 나는 태어나 가시가 되어
그대의 손가락에 염증을 피울까 그리움으로 곪을
우리네 아픔을 어찌할까 가슴가슴 부비며
나는 기도한다 님이여, 마침내
나는 무릎을 꿇고 덩치 큰 내 친구 예수의 아범
사람 좋은 하느님께 우리네 작은 사랑의 부끄러움을
감사하는 것이다, 님이여
작은 사랑의 고달픔을 님이여 우리는 함께
바치는 것이다. 하느님께 하느님께
우리 태어나 아픔으로나마 하나되어 있음을
울어 고해 바치는 거다. 님이여.

산골에 살며 작은 것에 주목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행운이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워낙 농사에 ‘초짜’여서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잘난 척할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일 것이다.

광대정 이웃들에겐 잡지를 만든다거나 글을 쓴다거나 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먼저 농사를 잘 지어야 행세할 수 있다. 거창한 이론은 그다지 쓸모가 없다. 그러니 자연 내 주변을 돌아보게 되고, 내 행색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고, 작은 호의에 기뻐하고, 일상을 즐기는 법을 터득하게 되는 법이다.

툇마루에 앉아 멍하니 앞산을 쳐다보는 재미도 늘어나고, 들깻잎이며 고구마 줄거리며 콩잎, 고추 열매를 살피는 것이 일상의 중요한 몫이다. 작아서 구체적인 일상과 주변이 ‘세상의 전부’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언뜻 보면 시시해도 그저 시시한 채로 아름다운 산중 생활이다. 채광석 시인이 감옥이라는 좁디 좁은 울타리에서 사랑의 정수를 캐고 있었던 만큼, 나락 하나에도 우주가 있다는 장일순 선생의 혜안(慧眼)을 빌지 않더라도, 시시한 것에서 구체적이고 생동감 있는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면 그도 좋은 일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빈대가 전한 복음

채광석 시인은 감옥에서 ‘빈대’가 복음을 전한다고 연거푸 경탄한 바 있다. 그의 사랑법이 자뭇 놀랍고 재미있다. 시인이 나중에 석방된 뒤 그의 아내가 되는 ‘정숙 씨’에게 쓴 편지에는 빈대 예찬이 담겨 있다.

“밤새 잠든 육신을 뜯어 먹고 탱탱해진 배때지를 주체하지 못한 탓에 비실거리다가 끝내 벽을 타고 기어 올라가 숨지 못한 채 비실비실 방바닥에서 버둥거리는 빈대를 아침에 만나 보면, ‘허허 욕심도 많은 친구로군’ 헛웃음만 입가에 맴돈답디여. 실컷 뜯어 잡숫고는 피부병이나 옮겨 주는 ‘놈’의 행태가 제법 괘씸하오만, 젠장 팔다리에 누덕누덕 빈대가 전해 준 피부병을 그대로 보존하였다가, 내 나가서 님을 만나면, ‘반갑소, 이리 반갑고 이리 기분 째질 수가 없소’, 히히거리며 비비적거려선 빈대가 전한 가려움증을 몽땅 옮겨, 매일같이 만나선, 드드득득득득 온몸을 긁어 가며 둘이서 킬킬거림이 어떨꼬. 그리하여 빈대의 염치없음이 간질거리는 그리움이 되어 우리는 항시 마른 몸을 득득 긁으며 사랑이란 남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것, 사랑이란 함께 긁으며 킬킬 웃는 것, 사랑이란 빈대가 전한 기쁜 소식, 사랑이란 피부병에 걸리는 것, 아아 사랑이란 용서하는 것이라.……”

실로 기막힌 사랑법이 아닌가? 그런 구체적인 사랑법을 터득한 처지였기에, 징역살이를 마치면서, ‘우리’ 사랑에 대한 멋진 시 한 편을 더 남길 수 있었다.

이승에서 그대를 만나 남다른 기쁨을 맛본
그 이유만으로 저승길에서 고통받는다 하더라도
나는 기죽지 않는다
천년왕국이니 영생의 낙원이니
내세는 휘황한 행복뿐이라지만
그대에게 못다 한 사랑이 허물이 되어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진다 한들
그게 어찌 나를 미혹할 수 있단 말이냐
삶은 언제나 굽이쳐 휘도는 물길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
삶은 굽이치며 그대의 심장에 나의 심장을 잇대어
출렁이는 물길로 이어왔느니
살지라!
삶은 고뇌요 일상은 부대껴 권태의 늪을 이뤄 갈지라도
살아서 즐거움과 괴로움 함께 마시며
사랑하는 작은 몸부림 속에 함께 피로 흐르라
맥을 거쳐 다시 맥으로
심장을 나와 다시 심장으로
펄펄펄 솟구치는 피가 되어 흐르다가
어느 한 순간 삶을 거두고
내세의 문턱에 선다 한들
천지의 저울대가 무슨 그리 대수로운 논의거리일 것인가
행여 윤회의 긴 회로에서
남자와 여자로 다시 만나지 못하고
이름 모를 짐승으로 마주 으르렁대게 작정되었다 하더라도
사랑할지라!
사랑에서 사랑으로
펄펄펄 타오르며 우리가 배운 삶의 생명은
사랑
사랑은 우리가 지상에 남길
유일한 발자취거니
평안하라 두 해의 고통이여
평안하라
―채광석, 「징역에서 보는 우리들의 삶에 보내는 마지막 헌사」

하지만 결국 구체적 일상을 배운다는 것은 일상의 미묘함을 배우는 것인가 보다. 일상을 따라가다 보면, 만사에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예 무의미한 것도 아닌 미묘한 지점이 있는 것이다. 도덕과 윤리의 잣대를 넘어서는 삶의 부조리가 엿보이는 지점. 그래서 만사만인을 함부로 재단하고 섣불리 판단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저마다의 사정이 있을 법하고, 사람마다 간절함이 배인 곳이 다를 수도 있겠다. 그리고 모든 윤리적 잣대마저 무력화시키기에 충분한 ‘생존에의 요구’도 있을 것이다. 복음서에도 이런 말이 있지 않던가. 판단하지 말라, 너희도 판단받을 것이다. 엄한 말씀이지만, 실타래 엉키듯 인생을 한 마디로 잘라 말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때쯤이면, 역시 지당한 말씀임을 깨닫게 된다.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옛날에 어느 초등학교 교사 이야기인데, 그분이 평소 어린 학생들에게 그렇게 욕을 잘했다고 한다. 그 욕쟁이 선생은 머리가 새까만 초등학교 어린애들한테 “너희 중에 대학 갈 놈 몇이나 될 것 같애? 뭐 해 먹고 살래?” 하는 가당치 않은 면박을 주지를 않나, 툭하면 쌍욕을 해대질 않나, 한 마디로 그런 점에선 개꾹이었다. 그리고 때마다 그 선생은 사진사 노릇도 자청했다.

소풍을 가거나 하면 아이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진을 찍어 댔는데, 아이들은 그 사진을 어거지로 사야 했다. 하긴 그 시절만 해도 카메라가 귀하던 때인지라 아이들로선 반가운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떤 아이들의 경우에는 지나가다가 우연히 옆모습이 얼핏 찍히는 수도 있었는데, 그럴 경우에는 사진값을 반값으로 계산해서라도 그 아이에게 사진을 팔아치웠다. “넌 옆모습만 찍혔으니 반만 내.” 그런 투였다. 그게 선생에게 그런 대로 짭짤한 수입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이 선생에겐 평소 행동거지로 보아 납득하기 어려운 습관이 하나 있었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에 대개의 남자 선생들은 교무실에 둘러앉아 실없는 농담 따먹기나 축구 한일전, 또는 고교 야구에 대해서 열을 올리곤 하였는데, 이 선생은 도무지 그 좌석에 끼지 않고 교실에 남아 있었다. 교실에서 풍금을 치며 중·고등학교 음악 교과서에나 나오는 노래 부르길 좋아하였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청라언덕 위에……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 그리고 자기 반 아이들에게 그 노래를 신이 나서 가르쳐 주곤 했다. 크리넥스 들고 화장실 가는 격이라고나 할까? 아님 세파에 쓸려 간 맑은 품성을 건져 내는 중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우울한 순수와 고독, 그리고 세상에 대한 적개심과 현실주의가 뒤엉켜 있는 것이었다. 사람이란 대충 그렇게 복잡한 이면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출처] <연민>, 삼인, 2000. 이 글은 제가 삽십대 중반 <공동선> 편집장 시절에 쓴 글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20년이 되었군요. 세월이 흘러도 마음과 생각의 갈피는 달라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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