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 낯선 분] 갈릴래아의 로마식 도시, 세포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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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 낯선 분] 갈릴래아의 로마식 도시, 세포리스
  • 송창현 신부
  • 승인 2017.08.02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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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고고학 - 10
세포리스 유적지. 사진=한상봉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는 갈릴래아의 수도를 세포리스(Sepphoris)에서 티베리아스로 옮겼다. 세포리스(Sepphoris)는 신약성경에 전혀 언급이 되지 않는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왜냐하면 이곳이 예수 당시 갈릴래아의 중요한 도시였고, 그가 살았던 나자렛과 매우 가까웠기 때문이다. 과연 몇몇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역사적 예수는 헬레니즘적 도시인 세포리스를 잘 알고 있었고 그 도시의 언어와 문화는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을까?

세포리스는 벳 네토파 계곡(Beth Netofa valley)의 남쪽과 그 위에, 그리고 나자렛에서 북서쪽으로 약 6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이 도시에는 지중해 해변의 프톨레마이스(Ptolemais)와 갈릴래아 호수의 남서안에 위치한 티베리아스(Tiberias)를 연결하는 길이 지나고 있어 군사적이고 경제적인 요충지였다.

세포리스 혹은 치포리(Zippori)라는 이름은 새(bird)를 의미하는데, 이 도시가 마치 횃대에 앉은 새처럼 산등성이 위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이 설명은 바빌로니아 탈무드에 따른 것이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알렉산더 얀네우스(기원전 103-76년)가 권력을 잡은 기원전 103년에 키프로스를 다스리던 프톨레마이오스 라티루스(Ptolemy Latyrus)가 안식일에 세포리스를 차지하려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유다 고대사> 13권 338) 당시 세포리스는 갈릴래아의 도시들 가운데 유일하게 견고하게 요새화된 도시였다.

기원전 63년에 폼페이우스가 팔레스티나를 점령한 이후, 시리아의 로마 총독 가비누스(Gabinus)는 기원전 55년경에 세포리스를 갈릴래아 지방의 중심 도시로 만들었다.(<유다 고대사> 14권 9) 기원전 37년경에 헤로데 대왕(기원전 37-4년)은 세포리스를 쉽게 차지하였는데, 왜냐하면 “하느님이 눈을 보내셨기” 때문이다.(<유다 고대사> 14권 9; ) 사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헤로데 대왕은 겨울에 눈보라가 치는 가운데 세포리스를 점령하였다. 헤로데 대왕은 세포리스에 궁전을 세웠다.

갈릴래아의 모나리자. 사진=한상봉

세포리스에서는 십자군 시대의 요새가 발견되었다. 이 요새 근처에는 기원후 3세기 로마 시대의 대저택이 발견되었다. 이곳의 연회장(triclinium) 바닥에는 돌로 만든 모자이크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특히 디오니소스(Dionysos) 제의와 관련이 되는데, 그중에서 매우 아름다운 여인의 모자이크를 학자들은 “갈릴래아의 모나리자”(Mona Lisa of Galilee)라고 부른다. 그리고 기원후 6세기의 유다교 회당이 발견되었는데, 일곱 모자이크가 인상적이다.

기원후 1-2세기에는 세포리스에 있던 여러 유다인들의 제도와 기관들이 티베리아스로 옮겨졌고, 마침내 이 도시는 유다인들의 종교와 학문의 중심지가 된다. 미쉬나를 편찬한 라삐 유다 하-나시(Judah ha-Nasi, 135-217년)의 제자인 요하난 벤 납파하(Johanan ben Nappaha, 180-279년)는 220년 경에 티베리아스에 라삐 학교를 세웠다. 이 도시에서 미쉬나, 예루살렘 탈무드와 다른 라삐 문헌들이 완성되었다. 산헤드린의 마지막 모임이 이곳에서 개최되었고 그 뒤를 잇는 유다인 학술원인 에쉬바(Yeshiva)가 생겨났다. 특히 8세기에서 10세기에는 벤 아쉐르(Ben Asher) 가문이 자음으로 된 히브리어 구약성경에 모음 부호를 첨가하는 작업을 하였다.

티베리아스에는 유명한 라삐들이 많이 묻혔다. 엘하데프(Elhadeff) 거리와 학캄 라삐(Hakkam Rabbi) 거리 사이에, 즉 현 시내 중심가에서 걸어서 멀지 않은 위치에 그들의 무덤들이 있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두 사람은 라삐 요하난 벤 자카이(Yohanan ben Zakkai)와 모세 벤 마이몬(Moses ben Maimon)이다. 전자는 얌니아(Jamnia) 혹은 야브네(Javneh)에 첫 라삐 학교를 세웠고, 후자는 12세기의 가장 유명한 유다인 현자이다. 이들의 무덤 보다 더 언덕 위에 흰 지붕 아래에는 라삐 아키바(Rabbi Akiba)의 무덤이 있다. 탈무드에 따르면, 그는 제2차 유다 항쟁 당시 시몬 바르 코크바(Simon Bar Kokba)를 메시아로 선언하였으나, 결국 로마인들에 의해 처형되었다.


송창현(미카엘) 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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